21.08.16 18:29최종 업데이트 21.08.16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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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우리마을 구두수선공 오펠리아는 도무지 살리지 못할 것 같은 가죽장화 한 켤레를 들고 골똘히 연구 중이시다. 마침 그 앞을 지나다 아무래도 너무 낡은 듯하여 "이번엔 살리기 어렵겠지?" 하고 물었더니 "림, 일단 내 손에 들어오면 못 살리는 구두는 없어. 다만 시간이 좀 오래 걸릴 뿐이지, 곧 부활할 거야"라면서 다시 또 웃는다. 혹시 오펠리아가 애타게 찾는 '혜순'이 이 사진을 본다면 부디 연락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림수진

 
오펠리아. 그녀는 나를 처음 봤을 때 혹시 '혜순'을 아느냐고 물었다.

'혹시'라는 말이 앞에 붙긴 했지만, 참으로 어이없는 질문이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혜순'이라는 발음은 정확했다. 내가 '혜순'을 알지 못한다고 말했음에도 그녀는 종종 나를 붙잡고 혜순의 사진을 보여줬고 혜순에게 받은 편지도 보여줬다. 어쩌다 닳아 망가진 신발을 맡기러 가면 기회를 십분 활용하여 '혜순'의 이야기를 시리즈로 쏟아냈다. 마치 '혜순'의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못 살 것 같은 병이라도 걸린 듯.
 

친구 '혜순'을 만났던 미국에서 3년 생활하다 고향으로 돌아와 가게 점원으로 일하던 시절의 오펠리아. 혹시 어디선가 ‘혜순’이 이 사진을 보게 된다면 부디 연락 줄 것을 간절하게 부탁하였다. ⓒ 림수진

 
그녀가 '혜순'을 만난 곳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였다. 그녀에 의하면 '혜순'은 북한 사람이었고(몇 번을 물어봤지만, 그녀의 답은 North Korea였다) 북한에서 한 자녀 이상 낳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상황에서 혜순의 엄마가 혜순에 이어 동생을 낳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뉴욕 월스트리트에서 일하는 삼촌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왔다고 했다. 그런데 그녀를 뉴욕이 아닌 로스앤젤레스에서 만났다고 하니, 여러 번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 들어도 이해가 쉽지 않았다. 이야기를 듣다 보면 중국 이야기 같기도 하여 늘 혼돈스러웠다.

구두수선공 오펠리아

1972년생, 그녀는 우리 마을 구두수선공이다. 집 바깥쪽으로 난 작은 마당에 지붕을 얹고 그 곳에 "하얀 구두"라는 상호를 스스로 그려 넣었다. 그 곳에서 언제나 해질 대로 해진 두툼한 앞치마를 두른 채 하루 종일 구두를 고친다. 아니 살린다는 말이 맞겠다. 도무지 다시 신을 수 없을 것 같이 망가진 신발들을 멋들어지게 살려낸다. 곁에선 팔순을 목전에 둔 그녀의 어머니가 늘 말없이 일을 거든다.
 

오펠리아의 좁은 구둣방에는 언제나 팔순을 목전에 두신 그녀의 어머니가 함께 계신다. 마을 구두 가게에서는 짝을 잃어 팔지 못한 구두들을 그녀의 구둣방에 헐값으로 팔아넘기는데, 그 곳에서 그녀의 어머니는 구두의 밑창과 가죽과 끈과 깔창 등 오펠리아가 언제라도 쓸 수 있는 재료를 구분하여 해체하는 작업을 주로 담당하신다. ⓒ 림수진

 
내게 '혜순'을 아느냐 물으며 시작된 이야기는 그녀가 살아온 50여 년 세월의 질곡 곳곳을 헤집고 다녔다. 아무리 아픈 이야기도, 아무리 어려운 이야기도 오펠리아는 늘 깔깔거리면서 끄집어내고 이어 나갔다. 오펠리아의 표현대로라면 언제나 얌전했던 혜순도 그녀가 대책 없이 깔깔거릴 때마다 뭐가 그리 즐겁냐며 조금은 새침하게 쏘아붙였다는데, 나 또한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어디에서부터 그녀의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태생부터 시작한다면, 어머니가 낳은 13형제 중 7번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본 적은 거의 없었다. 그녀 위로 여섯 명의 형제들과 그녀가 태어날 때도, 그리고 그녀 아래로 다시 여섯 명의 동생들이 태어날 때도 아버지는 늘 미국에 있었다. 열 세 명의 자식이 태어나는 동안 그리고 그들이 자라는 동안 아버지는 단 한 번도 그녀 가족에게 경제적 지원을 해 준 적이 없다.


그녀 말로는, 아버지가 동성애자라 했다. 이곳 멕시코 어느 소도시의 '뼈까지 가톨릭인'(그녀의 표현이 그랬다) 지독히 보수적인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쩔 수 없이 오펠리아의 엄마와 결혼을 하긴 했지만 종교와 가족과 사회 앞에 자신의 성정체성을 숨기기 위한 방편일 뿐이었단다. 미국에 가자마자 남성 애인과 살림을 차렸다는데, 어쩌자고 이곳에 자식을 열 셋이나 만들어 놓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이 또한 그 집안의 뼈까지 박힌 가톨릭의 영향인 것인지.

그나저나 아버지가 경제적 지원을 하지 않았으니 엄마 혼자 오롯이 품을 팔아가며 자식 열 셋을 먹여 살렸는데 어릴 적 그녀가 기억하는 것은 배고픔이 전부다. 새벽 같이 일 나가시는 엄마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 나면 다시 엄마가 돌아올 때까지 쫄쫄 굶을 수밖에 없었기에 너무 배가 고파서 뱃속이 늘 뜨거웠단다. 아마도 속이 쓰린 것을 뜨겁다고 표현하는 것 같았다.
 

집 앞마당 한 편에 지붕을 얹어 마련한 그녀의 구두공방 앞에서 오펠리아가 폼을 잡고 섰다. ⓒ 림수진

 
지독한 가난

늦은 점심을 먹고 다시 저녁때가 되면 엄마는 자식들에게 '동물과자(우리나라에도 동물 크래커라는 이름으로 팔린 적이 있다)' 다섯 마리와 끓인 설탕물 한 잔씩을 주셨다. 작은 동물 모양의 크래커 다섯 개를 설탕물에 불려 먹고 잠자리에 들면 중간에 너무 배가 고파서 밤새 엄마를 졸라 다음날 아침으로 먹을 양식을 일부 먹고서야 잠이 들 수 있었단다. 그 말끝마다 그녀는 오늘날 자신이 왜 이렇게 뚱뚱한 여인이 되었는지에 대한 항변을 잊지 않았다. 어릴 적 너무 배가 고파서,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거의 모든 돈을 먹는 것에 쏟아 부었기 때문이라고. 자기뿐 아니라 식구 모두가 그렇다고.

그녀가 아홉 살 때 엄마는 어느 날 새벽 열 번째 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를 아홉 살 먹은 그녀에게 맡겨 두고 그 새벽에 몸을 추슬러 일을 나가셨다. 그러면서 그녀에게 당부하시길, 날이 밝거든 가게에 가서 사정을 말하고 외상으로 우유를 사다 먹이라 하셨단다. 다행히 가게 아주머니가 외상으로 분유를 주면서 갓난아기에게 어떻게 타 먹이는지, 글을 모르는 그녀에게 세세히 그림까지 그려 설명해주신 덕분에 그 동생이 죽지 않고 살아날 수 있었다.

어느 날엔가는 엄마가 새벽일을 나간 사이 문틈에 손가락이 끼어 손가락 한 마디가 뼈까지 으스러졌는데도 병원에 갈 생각을 하지 못하고 밤이 늦도록 엄마만 기다렸다고 하니, 어릴 적 그녀 가족의 가난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할 수 있다. 그런 말을 하면서도 그녀는 늘 웃었다. 그 옆에선 아홉 살 차이 나는, 오펠리아가 외상 분유를 타먹여 살린 그녀의 남동생이 같이 맞장구를 치며 웃었다.

당장 먹을 것도 없을 뿐 더러 입을 옷도 없어 학교를 가지 못하는데, 어느 날 엄마가 그녀를 데리고 마을 구두 수선공을 찾아가 머리를 조아려가며 사정하여 겨우 그녀를 그 곳에 들이밀어 주셨단다. 그렇게 구두수선공으로서의 인생이 시작되었다. 물론 급여는 전혀 받지 않고 기술만 배우는 조건으로.

그곳 주인의 성격이 어찌나 괴팍스럽던지 못해도 때리고 잘해도 때리는 바람에 기술은 그만두고 맷집만 엄청 키운 듯했으나, 그래도 덕분에 오늘날까지 먹고 산다고 늘 자기 엄마의 탁월한 선택에 고마워했다. 오펠리아뿐 아니라 그녀의 형제 모두가 학교 대신 마을의 여러 장인들에게 보내졌다. 당시 남편 없이 자식 열 셋을 둔 엄마가 할 수 있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결혼, 남편의 폭력, 탈출

구두를 고치는 기술은 이미 탁월하였으나 자기 가게를 열 여력이 없어 여전히 괴팍한 구두수선공의 보조로 일하던 시절, 그녀 나이 열여덟에 남자를 만났다. 멕시코인이지만 어려서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주했고 그 곳의 국적을 취득한 사람이었다. 그 조건 하나만 보고 오펠리아는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결혼을 결심했다. 지독한 배고픔이 싫었고 그 즈음 미국에서 한 번씩 내려올 때마다 그녀에게 상상할 수 없는 폭력을 가하는 아버지로부터 탈출하기 위함이었다.
 

구두를 잘 살리기로 소문이 난 오펠리아의 구둣방에는 늘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늘 장부에 수선 내역이 빼곡하다. ⓒ 림수진

 
서둘러 결혼한 후에야 남편 되는 사람의 폭력과 마약중독 내력을 알게 되었다. 남자는 이미 폭력과 마약 전과가 있었고, 미국에서의 처벌과 감시를 피해 멕시코에 내려와 여전히 마약을 탐닉하던 중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멕시코에 내려올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미국에서 내려왔다면 돈도 있을 터, 돈을 물 쓰듯 했을 것이다. 미국에 올라가서 그곳의 국적을 취득하고 가끔 내려와 그들이 가진 '달러'의 위력을 믿고 거들먹거리는 젊은이들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약에 취하지 않았을 때는 오펠리아를 향한 지독한 폭력이 이어졌다. 너무 맞다 보니 맞는 것도 중독이 되어버렸는가 싶었는데, 뱃속에 아이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아이를 위해 어느 날 피투성이가 된 채 다시 지독한 가난이 있는 엄마네로 돌아왔다. 탈출이었다.

오펠리아는 더 이상 남자에게 돌아가지 않았고 남편 역시 오펠리아를 찾지 않았다. 엄마네 집에서 동생들과 함께 살다가 미국행을 결심했다. 아들이 두 살 되던 해였다. 아들을 엄마와 동생들에게 맡겨 두고 서른여덟 시간 버스를 타고 멕시코 국경 도시 티후아나로 갔다. 그 곳에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국경을 넘었다. 여벌 옷 한 벌 없이 입은 옷이 그녀가 가진 전부였다. 그렇게 미국으로 갔다.

다행히 먼저 미국에 가 있던 오빠를 만났고, 그 집에 얹혀살면서 유명 닭고기 체인점인 뽀요 로코(El Pollo Loco)에 취직했다. 처음엔 영어를 하지 못해서 손님들에게 다가서야 할 때마다 숨기 바빴다. 그런데 그녀가 누구던가? '혜순'이 말했듯 늘 뭐가 그리 행복한지 몰라도 하루 24시간이라도 쉬지 않고 깔깔거릴 수 있는 오펠리아가 아니겠는가. 그 대책 없는 깔깔거림으로 영어를 잘 하지 못하면서도 그녀가 일하던 통닭집 분위기를 좌지우지 할 정도였다니, 게다가 한 시간에 11달러나 받을 수 있었다니, 당시 미국 생활을 회상할 때는 그녀의 눈에서 하트가 쏟아져 나온다.
 

더 이상 신을 수 없을 만큼 낡은 구두의 밑창을 떼어 내고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 해진 가죽을 다듬고 새로운 창을 덧댔을 때 그녀는 매우 행복해 했다. ⓒ 림수진

 
그러다가도 순간 그 웃음이 흐느낌으로 바뀌는 대목은, 멕시코에 남겨두고 간 아들 이야기로 스위치가 전환될 때다. 결국, 미국에 간 지 3년 만에 다시 멕시코로 돌아왔다. 한 시간에 11달러나 벌 수 있는 미국 생활에 물 만난 고기처럼 잘 적응하여 늘 재미있게 지냈지만, 지독한 가난 속에 남겨두고 온 아들만 생각하면 가슴을 쥐어뜯고 싶었단다.

물론 미국에서 돈을 버는 족족 친정으로 보내긴 하였지만, 결국 아들이 밟혀 그 좋은 직장 '미친닭(그녀가 일하던 닭집 체인 El Pollo Loco를 번역하자면 그렇다)'에서의 일을 그만두고 멕시코로 돌아왔다. 두 살에 두고 간 아들이 다섯 살이 되어 있었다. 그 다섯 살 아들이 홀연히 나타난 엄마에게 반항을 해대는 바람에 어지간하면 다시 미국으로 갈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다시 지독한 가난 속에 눌러 앉았다.

다시, 구두 수선공

여느 멕시코 사람들처럼, 오펠리아는 다시 남자를 만나고 가정을 꾸리고 두 명의 아이를 더 얻었다. 그리고 운명처럼 이어지는 새 남편의 폭력을 견디지 못해 다시 혼자가 되었다. 세 아이들을 데리고.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엔 남편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집에서 남편을 쫓아내 버렸다는 거다.

다시, 구두 수선공이 되었다. 온 마을 사람들의 구두를 고쳐주는 일을 해 모은 돈으로 집도 샀다. 그리고 세 아이를 교육시켰다. 늘 나를 만날 때마다 낡고 해진 자신의 옷이 부끄럽다던 오펠리아가 위로 두 아이를 대학교까지 교육시켰다. 20대 젊은이들의 대학교 교육 이수율이 20%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니 대단한 일이다.

중학교에 다니는 막내가 대학교에 들어가면 다시 미국으로 가겠노라 늘 호언장담하며 나를 꼬신다. 같이 가면 자기가 책임지고 '미친닭'(El Pollo Loco)에 취직시켜주겠다고. 못 고치는 구두가 없으니, 아무리 봐도 내 눈에는 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구두장인 같은지라, 차라리 손기술 귀한 미국에 가거든 계속하여 구두 장인으로 살아가라 했더니 혀를 끌끌 차며 으스댔다.

"림... 네가 미국이란 나라를 몰라서 그래... 미국에서 구두 고쳐 신는 사람이 있는 줄 알어? 미국은 말이야... 멀쩡한 구두도 버리는 나라야!"

오늘도 우리 마을 구두수선공 오펠리아는 도무지 살리지 못할 것 같은 가죽장화 한 켤레를 들고 골똘히 연구 중이시다. 마침 그 앞을 지나다 아무래도 너무 낡은 듯하여 "이번엔 살리기 어렵겠지?"하고 물었더니 "림, 일단 내 손에 들어오면 못 살리는 구두는 없어. 다만 시간이 좀 오래 걸릴 뿐이지" 그러면서 다시 또 깔깔깔 웃는다.
1972년 멕시코 어느 집안에 13 형제 중 7번째로 태어나 가난, 배고픔, 폭력, 그리고 어쩌면 성공하지 못한 이주와 결혼생활의 멍에를 지고 오십 평생을 살아온 오펠리아가 웃는다.

삶의 순간순간 어쩔 수 없이 터져 나오는 흐느낌을 애써 웃음으로 지워가면서.
 

오펠리아가 살아가는 마을엔 아스팔트나 시멘트 포장 도로 대신 돌을 박아 만든 포석길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그럴까? 신발은 또 왜 그리 잘 떨어지는 것인지. 하지만 우리마을에 최고의 구두수선공 오펠리아가 있는 한,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지금까지 오펠리아가 살리지 못한 신발은 없었으니까. ⓒ 림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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