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6.13 11:56최종 업데이트 21.06.13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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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쿠데타는 그에게 정치적 야심이 있었고 주변에 장교들이 모여 들었기 때문에도 가능했지만, 그가 1960년 4·19혁명 직후에 군부 개혁운동을 일으켰기 때문에도 가능했다. 3·15 부정선거에 개입한 군부 지도부를 겨냥해 '정군(整軍)운동'을 일으킨 것이 1년 뒤에 반혁명적 쿠데타를 일으키는 데 적지 않게 도움이 됐다.

정군운동

2012년 <한국사 연구> 제158호에 실린 홍석률 성신여대 교수의 논문 '4월혁명 직후 정군운동과 5·16 쿠데타'는 "박정희 소장과 일부 영관급 장교들이 추진한 정군운동은 그 의도와 동기는 어떠하든 4월 혁명 직후 전 사회적으로 조성된 개혁 요구에 부합하는 것이었다"며 "여론의 관심과 지지도 받았다"고 설명한다.


정군운동은 육사 2기인 박정희와 육사 8기인 김종필·김형욱 등에 의해 주도됐다. 머지않아 4·19혁명을 뒤집을 장교들이 4·19혁명의 뜻을 계승하는 개혁파 군인들로 부각됐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는 박정희가 쿠데타 동조자들을 쉽게 끌어 모으는 데 도움이 됐다. 정군운동 경력으로 인해 박정희의 포섭 작전에 명분이 실렸고, 포섭 대상들은 박정희의 동기를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쿠데타에 가담한 상당수 군인들이 그의 민정이양 약속을 믿었던 배경 중 하나는 이것이다.

상지대 연구교수 등을 지낸 정치학자 전인권(1957~2005)은 1960년 정군운동은 5·16 쿠데타를 파악하는 데 필요한 자료라고 말한다. <박정희 평전>에서 그는 "5·16 쿠데타를 실행하기 전 쿠데타 주체세력이 공공연한 정군운동을 벌였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는 것은 5·16 쿠데타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고 평가한다.

정군운동 이전만 해도 박정희는 제3의 인물을 쿠데타 주역으로 내세울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랬던 그가 정군운동 과정에서 군부 지도자로 급부상했고, 다른 누군가를 내세울 필요도 없이 자신이 직접 쿠데타 준비를 지휘할 수 있게 됐다.

<박정희 평전>은 "박정희는 대체로 '○○○를 지도자로 모시고 쿠데타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이제 서서히 그 자신이 정군파 장교들의 지도자가 되어 쿠데타의 물결에 휩싸여 들어가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4·19 당시 만 43세였던 박정희가 지도자로 급부상한 것은 특유의 대담함으로 정군운동을 벌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군운동의 희생 제물로 거물급 지도자를 설정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송요찬 육군참모총장을 제물로 삼은 것이 그의 위상을 높여준 결정적 요인이었다.
 

5.16 쿠데타 당시 박정희. ⓒ 위키백과

 
박정희의 제물

3·1운동 1년 전인 1918년에 출생한 송요찬은 논란이 될 만한 행적을 많이 남겼다. 그는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군 하사관이었다. 해방 직후인 1946년 2월 친미 교육기관인 군사영어학교를 1기로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한 그는 1948년 10월부터는 제주 4·3항쟁 진압에 관여했다. 한국 현대사에 씻을 수 없는 죄악을 저질렀던 것이다.

한국전쟁 때 강릉·원산·함흥·청진 등을 함락하는 데 참여하고, 상대 병력 2개 사단을 격파한 그는 1953년 7월 미국 육군지휘참모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군사영어학교 졸업과 더불어 미국 유학 경력은 훗날 4·19 때 미국이 그를 신임한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1954년 8월에 귀국한 그는 제3군단장·제1야전군사령관을 거쳐 1959년 2월 육군참모총장이 되고 4·19 때 계엄사령관을 겸하게 된다.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선거에 관여했으므로 그는 4·19의 불길을 피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는 4·19 공간에서 정반대 상황에 직면했다. 4·19 때 경찰과 달리 군대는 발포를 하지 않았다. 또 정치적 중립을 유지하겠다고 공언했다. 이는 그가 4·19 때 뜻밖에도 칭송을 듣는 원인이 됐다.

UPI통신 찰스 스미스 기자의 글을 옮겨 적은 1960년 5월 3일자 <동아일보> 기사 '국민 모두 군정 반대'에 따르면, 5월 2일 기자회견에서 송요찬은 "국민은 일절 군정에 반대하고 있다"며 "우리는 무관이 문관의 지배를 받는 민주주의를 위하여 투쟁하고 있는 것"이라고 천명했다.

이로 인해 그는 상당한 국민적 신망을 얻었다. 박정희가 정군운동으로 주목을 받기 직전에 그는 광범위한 국민적 지지를 얻었다. 미국도 그를 이승만의 대안으로 주목했다. 친미 정권이 한국민들의 공격을 받는 상황을 수습할 수 있는 대안으로 그를 주목하게 됐던 것이다.

<김정렬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국방장관 김정렬은 이승만 하야 성명이 발표된 다음날인 4월 27일 송요찬 사무실을 방문했다가 놀랄 만한 상황을 목격했다. 주한미군사령관의 명령으로 작성된 군사고문단장 하우츠의 서신이 그 방에 배달되는 장면을 목격했던 것이다.

편지의 핵심은 '우리는 송요찬을 지지한다'였다. 한국 국방부장관을 거치지 않고 육군참모총장에게 곧바로 이런 서신을 전달했다는 것은, 해석에 따라서는 '당신이 알아서 정권을 잡으라'는 의미가 될 수도 있었다. 김정렬의 강력한 반대 등으로 인해 미국의 구상이 물거품이 되기는 했지만, 이 사례는 4·19 당시 송요찬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잘 반영한다.

바로 그 송요찬을 박정희는 표적으로 삼았다. 4·19로 인해 가장 크게 부각된 군인을 정군운동의 희생 제물로 삼았던 것이다. 4·19로 인해 부각되기는 했지만 3·15 부정선거에 책임이 있으므로 송요찬을 겨냥할 만했던 것이다.
 

송요찬

 
송요찬 역시 3·15 부정선거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만, 그 문제를 갖고 자신을 공격할 사람이 박정희일 줄은 예상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자신과 박정희의 특수 관계 때문이었다. 1948년에 남로당원 신분이 들통 난 박정희가 서울 남산 헌병대 영창에 갇혔을 때 송요찬이 박정희 구명운동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그 뒤로도 지속적으로 도움을 베풀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평전>은 이렇게 말한다.
 
"송요찬은 박정희의 군인 정신을 높이 사고 그를 좋아하며 군대 시절 많은 은혜를 베풀었다. 그는 남로당 경력으로 진급 심사에서 언제나 애를 먹고 있던 박정희의 소장 진급을 적극 추천했으며, 1958년 1군사령관 시절에는 박정희를 참모장으로 임명했다. 일상적인 업무에서도 박정희의 편의를 많이 봐주었다."

송요찬 입장에서 볼 때, 박정희는 한 살 많기는 하지만 자기가 열심히 챙겨준 부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박정희가 자신의 부정선거 책임을 부각시키리라고는 예측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박정희는 그렇게 했다. 이승만이 하야한 4월 26일 직후부터 군부가 동요하는 상황에서,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으로 있던 그는 '3·15 부정선거를 도운 군부 지도자는 물러나라'는 서한을 송요찬에게 제출했다. "박정희의 편지 건은 삽시간에 육군본부를 비롯해 전군에 퍼졌다"며 "군이 술렁거렸다"고 <김형욱 회고록> 제1권은 말한다. 이 책에 따르면 편지의 일부는 이렇다.
 
"각하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고 각하를 누구보다 존경하고 있는 저는 이러한 깊은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 각하의 진퇴 문제에 관련하여 충고의 말씀을 드리는 것이 유일한 방도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군의 최고 명령권자이신 각하께서 부정선거에 대한 전 책임을 지고 성화의 태풍이 군내에 파급되기 전에 용퇴하시는 것이 마땅하다고 믿습니다. 각하는 4·19 혁명을 민주적으로 조직하여 내외의 절찬을 받은 바 있는데 부정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시면 국민이 갈채를 보내고 각하를 기억할 것이며, (중략) 국민이 애석해하는 시기를 택해서 처신하심이 각하의 장래를 보증하고 과거를 청산하는 유일한 방도라고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KBS <역사저널 그날>(272회)의 관련 장면 ⓒ KBS

 
이 편지를 보낸 날이 하필이면 5월 2일이다. 송요찬이 '군은 정치에 불개입한다'는 기자회견을 연 바로 그날, 박정희가 '부정선거 책임을 지고 물러나시라'며 공격을 가했던 것이다.

반격, 그러나

4·19로 인해 인기가 올라가던 상황에서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송요찬은 분을 참지 못했다. "송요찬은 격노를 못 이기는 한편 당황해하면서 길길이 뛰었다"며 "오금이 저린 부관이 부동자세로 굳어 있었다"고 <김형욱 회고록>은 전한다.

뒤이어 송요찬은 과거의 감정을 털어버리고 대응에 나섰다. 해병대 사단 병력을 부산에 파견한 뒤 박정희의 사령관 직위를 거두는 방안을 구상했다. 때마침 '부산의 혁신세력 배후에 남로당 출신 박정희가 있다'는 보고가 이종찬 국방장관에게 보고돼 있었다. 박정희가 흑색선전으로 곤란에 빠진 틈을 활용해 그의 지휘권을 거두고자 했던 것이다.

송요찬은 박정희 주변의 장교들도 겨냥했다. 5월 17일부터 이틀간 정군운동 참여자 중 5명을 체포했다. 하지만 '두목'인 박정희를 무력화시키지는 못했다. 이종찬 국방장관이 해병대의 부산 파견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황이 뜻대로 되지 않자, 송요찬은 결국 퇴진을 결심했다. 5월 19일, 허정 권한대행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혈서를 보내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심금을 울리고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간 박정희가 편지 한 통과 정군운동으로 군부를 뒤흔드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하지만 박정희도 타격을 피하지 못했다. "이 시점에서 박정희는 육본 수뇌부의 장성들로부터 시류에 영합하는 인물로 낙인이 찍혔으며, 이로 인해 박정희는 7월 28일 광주 1군사령관으로 부임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명백한 좌천이었다"고 <박정희 평전>은 말한다.

영광과 상처를 함께 입은 채 좌천되기는 했지만, 이 사건은 박정희의 쿠데타에 유리한 여건을 조성했다. <박정희 평전>은 "박정희는 분명 소수이기는 하지만 변화를 요구하는 청년 장교들의 적극적 지지를 받는 지도자가 되어가고 있었다"며 "이 시점에서 박정희의 일거수일투족이 여러 집단에서 찬반양론에 휩싸일 정도로 박정희는 지도자의 위치를 차지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송요찬을 라이벌로 만들어 총장직에서 끌어내린 일은 박정희가 쿠데타 지도자로 부각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5·16으로 가는 박정희의 길에 송요찬이 디딤돌이 됐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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