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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 기사 별볼일 없던 독일인이 조선에서 벼락 출세하기까지에서 이어집니다. 

안녕하세요, 조지 포크예요.

지난 번에 1883년 7월 조선이 미국에 최초의 사절단을 파견하게 된 경위를 이야기 했습니다. 그때 큰 걱정거리가 대두되었습니다. 뭐였겠습니까? 바로 의사 소통 문제였지요. 당시 조선에는 영어 통역할 사람이 하나 없었고 또 미국에는 한국어 통역할 사람이 하나 없었으니 양측 모두에게 고민거리였지요.

고종 임금은 사절을 보낸 뒤에도 그게 내내 걱정이었던 모양입니다. 미국에서 돌아온 홍영식이 그 해 12월 임금을 알현했을 때 고종이 이렇게 물었더군요. 

"미국에 있을 때 언어는 어떻게 소통했는가?" 이에 홍영식이 대답하기를 "수행원중에 일본어에 통한 자가 있었고 미국 접반사 接伴使(의전관 겸 통역)가 또한 일본어를 해득하고 있었기 때문에, 뜻을 통할 수 있었사옵니디". 임금이 또 묻기를 "접반사는 어떤 벼슬의 인물인가?", 홍영식이 답하기를 "해군 장교 2명이었사온데 미국의 관례에 의하면 외국 국빈을 잘 대접하려면 반드시 해군무관을 접반사로 임용하고 있사옵니다. 대개 해군무관은 각국의 예속禮俗에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등장하는 "일본어에 통한 해군"은 바로 나 조지 포크를 두고 한 말입니다. 단지 홍영식은 내가 조선으로 발령날 것을 모르는 상태에서 귀로에 올랐기 때문에 그 사실을 고하지는 않았던 것이지요.

당시 나의 일본어 실력은 해군에서 다 알아주었고 중국어와 한자도 익혔지요. 뿐만 아니라 나는 산스크리트어에도 흥미를 느꼈고, 한국어 공부도 막 시작하던 참이었습니다. 물론 통역할 실력은 못 되었지만. 

헌데 이 대목에서 궁금하지 않나요? 우리 서양인이 한국어 공부를 무슨 책으로 했는지. 교재가 하나 있었지요. 언젠가 언급한 적이 있는 <Corean Primer>(한국어 첫 걸음), 이게 유일한 거였어요. 오늘날 한국인들이 영어 배우느라 골머리를 앓듯이 나는 한국어 독학하느나 골머리를 앓았지요.

아니, 나보다 먼저 머리를 싸맨 서양인이 있었지요. 영국인 3인방이었죠. 즉, 사토우 Earnest Satow, 아스턴 W.G. Aston, 챔벌레인 B.H.Chamberlain이 그들입니다. 사토우와 아스턴은 외교관이었고 챔버레인은 학자였습니다. 그들은 원래 일본 전문가로서 일본에 온 것이었지만 곧 조선이 개방될 것을 염두에 두고 한글에 뜻을 둔 것이지요. 그들은 또한 동양에 대한 호기심과 학문적 욕망이 대단했지요.

우리 서양인들은 당시 은둔 왕국 조선이 고유 문자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자못 흥미로웠고, 그 우수성이 또한 인상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해하기 힘든 일은 한글이 정작 그 나라 지식층에서는 천대받고 있다는 사실이었지요. 참, 야릇했지요.

오늘날 한국인들은 한글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겠지요. 하지만 당시엔 조선의 엘리트들이 한글을 거들떠 보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서양인으로서는 애로가 많았지요. 나보다 먼저 한글 공부에 몰두했던 사토우의 숨은 이야기를 이 기회에 소개하고 싶군요. 아마 금시초문일 거예요. 

사토우가 1878년 11월 처음으로 조선을 방문했을 때 소지하고 간 책이 바로 로스 목사의 <한국어 첫걸음>이었지요. 그때 한국어에 능통한 일본인 통역도 동행했습니다. 사토우는 조선 여행 중에 그 통역에게서 한국어를 약간 배웠는데 로스 목사의 책을 들춰본 그 통역의 설명을 듣고서 사토우는 로스의 책에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그러한 정황이 아스턴(그도 그 책으로 공부 중)에 보낸 1879년 3월 4일자 편지에 담겨 있지요. 

하지만 사토우는 그 책밖에 없었기 때문에 께름칙하게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 책으로 공부를 이어갔지요. 그러던 중 어느날(1880년 5월) 불쑥 생면부지의 조선인이 찾아 왔으니... 사토우가 이동인 스님에게 사사하면서 서로 친해진 사연은 앞서 자세히 보았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빠뜨린 사실이 있습니다. 로스의 책을 본 이동인 스님이 분개했다는 것입니다. 1880년 7월 1일자 아스턴 앞 편지에서 사토우는 이동인이 "로스의 책에 분개한다indignant"고 하면서 "로스 선생이 책을 너무 서둘러 낸 게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로스 목사의 <한국어 첫 걸음>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었을까요? 내가 공부했던 첫 레슨을 불러낼 수 있습니다.  
 
Ross의 <Corean Primer>(한국어 첫 걸음)
▲ 로스의 한국어 교재 Ross의 (한국어 첫 걸음)
ⓒ webcache.google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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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번역해 볼까요? 

나, 조선말 배우고자 한다.
너, 나를 선생 대접해주겠니?
나, 대접 하리다.
얼마나 주겠슴마?
한 달에 넉냥.
좋은 선생은 마땅이 대국말(중국어) 알아야해. 
조선말 배우기 쉽다.


역시 문제가 많은 교재였지만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건 아니죠. 어쨌든 사토우처럼 원어민을 만난다면 모를까 이 책으로 독학할 수밖에 없었죠. 사토우는 운이 좋은 편이었죠.  

혹시 기억하세요? 사토우가 아스턴에게 조선 지명을 일본식으로 표기하지 말고 조선인들이 쓰는 말로 표기하자고 제안했음을? 일본인들이 서울을 '게이조京城', 원산을 '겐산', 동래를 '도라이'... 그런 식으로 불렀고 우리 서양인들도 그걸 따라 할 수밖에 없었지요.  

실제로 사토우는 조선 지명을 제 발음을 따서 옮긴 지도 한 장을 마련했습니다. 그 지도를 지금 우리가 볼 수 있지요. 미국 지리협회에 소장되어 있기 때문이죠.
 
1895년 판
▲ 일본제 조선전도 1895년 판
ⓒ 미국 지리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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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도는 1875년 일본 육군 정보과에서 만든 초판을 후에 보정한 것인데 그걸 다시 사토우가 영국인 용으로 변용한 것입니다. 이 지도는 1895년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직후에 나왔습니다. 이 한 장의 지도를 잘 읽어보면 거기에 1875-1895년 일본의 야욕과 사토우의 관점 그리고 조선의 기구한 운명이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지도의 좌상단에는 사토우가 아스턴, 챔벌레인 등의 도움을 받아 현지어 지명을 옯겼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단, 이미 영국인에게 익숙한 지명은 그대로 두었습니다. 영국인을 위한 지도이기 때문이죠. 서울 일대를 볼까요? 
 
사토우의 조선 지명
▲ 조선 지명 사토우의 조선 지명
ⓒ 미국 지리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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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백두산은 보이지 않습니다. 일본제임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징표지요. 우상단 쪽에 적힌 지도의 제목이 끔찍합니다. 'KOREA OR CHO-SEN OF THE JAPANESE 코리아 혹은 일본인의 조센'.

이는 일본육군부에서 붙인 원래의 제목이 '일본인의 조센 CHO-SEN OF THE JAPANESE'이었음을 시사해 줍니다. 이를 사토우가 바꾸어 KOREA를 앞에 넣은 게 분명합니다. 이미 일본은 1875년에 침략 야욕을 품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동해안의 원산 일대를 보겠습니다.
 
1895년 일본제 조선전도
▲ 원산 일본 식민지 1895년 일본제 조선전도
ⓒ 미국지리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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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시피 원산에 '일본 식민지 Japanese Colony'라고 적고 있습니다. 당시 원산의 실제 상황을 증언해 주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어요? 지도의 하단 아래 여백에는 청일전쟁의 전승지를 적어 놓았습니다. 이 지도는 전체적으로 청일 전쟁의 승리로 일본이 조선 병탄을 눈 앞에 두고 있음을 암시해 줍니다.  

하지만, 1883년 가을 조선 사절단이 미국에 첫 발을 디딜 때만 해도 늦지 않았습니다. 희망이 있었습니다. 잘 하면 일본을 따라 잡을 수 있었으니까요. 급선무는 청나라의 고삐로부터 벗어나 서양의 근대 문물을 하루 속히 배워 부국강병을 실현하는 길이었지요. 그 첫 단추를 꿰어야 할 시기에 내가 조선과 접속이 되었습니다.

만일 그때 두 나라 간에  협력이 잘 되어 갔더라면 조선의 운명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지금 긴박한 지점으로 진입하고 있는 셈이지요. 이제 조선 사절단과 나와의 접속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되돌아 볼 차례가 온 것 같습니다.

-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태그:#조지 포크, #사토우 , #조선 지명, #로스, #한국어 첫 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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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만남이길 바래 봅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제2의 코리아 여행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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