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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보건기구는 매년 신규발생 암 환자의 4% 정도를 직업성 암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를 우리나라에 적용하면 직업성 암 환자 규모는 1만 명 수준에 육박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그러나 국내 직업성 암 산재 승인 건수는 2016년 113건, 2017년 178건, 2018년 205건 등에 불과하다. <오마이뉴스>는 '직업성·환경성암 환자 찾기 119 운동'의 도움을 받아 '암도 산재다'라는 4편의 기사를 통해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편집자말]
김아무개씨가 일한 조리실 모습.
 김아무개씨가 일한 조리실 모습.
ⓒ 김아무개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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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요리와 관련된 일 하세요?"

의사가 물었다. 지난해(2020년) 8월, 김수미(가명·57)씨는 폐암 판정을 받았다. 폐 전체에 암세포가 퍼져 있어 수술이 어렵다는 말도 들었다.

4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난 김씨는 "폐암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너무 억울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태어나서 한 번도 담배를 피워본 적이 없었다. 의사가 김씨의 직업을 물었다. "학교 급식실에서 10년 일한 조리실무사"라고 김씨가 답하자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요즘에 그런 분들(조리실무사)이 환자로 많이 온다"고 했다. 

실제 비흡연자들의 폐암은 보통 김씨처럼 폐의 주변부에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어류와 육류 등 모든 단백질 식품은 탈 때 발암물질이 생긴다. 식용유가 탈 때도 벤조피렌 같은 발암물질이 발생한다. 발암물질이 섞인 연기나 그을음이 폐에 침투해 폐암을 일으킬 가능성도 상당하다. 이미 수년 전부터 대한폐암학회를 비롯해 전문가들은 요리 중 발생하는 연기가 폐암의 주요 원인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의사의 말을 듣고 김씨는 매일 출근했던 초등학교 급식실을 떠올렸다. 2010년부터 폐암 판정을 받고 휴직하기 전인 2020년 8월까지 하루에 6시간 넘게 10여 년을 일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김씨는 250도 이상의 고온에서 펄펄 끓는 기름으로 300인분의 튀김요리를 만들었다. 튀김 연기가 자욱해도 환기시설이 약해 연기가 빠져 나가지 않았다. 조리기구와 바닥을 소독할 때는 주방용 액체 락스 2리터를 뜨거운 물과 섞어 사용했다. 뜨거운 튀김 솥을 닦을 때 약품을 넣으면 수증기가 올라오는데, 약품에 들어 있는 수산화나트륨이 암 유발 성분이라는 것도, 그 수증기가 폐에 좋지 않다는 것도 김씨는 알지 못했다.

"혹시 요리와 관련된 일 하세요?" 바로 맞춘 의사... 급식실 작업환경이 어떻길래
 
김아무개씨는 <오마이뉴스>와 만나 "조리기구와 바닥을 소독할 때는 주방용 액체 락스 2리터를 뜨거운 물과 섞어 사용했다"라고 말했다.
 김아무개씨는 <오마이뉴스>와 만나 "조리기구와 바닥을 소독할 때는 주방용 액체 락스 2리터를 뜨거운 물과 섞어 사용했다"라고 말했다.
ⓒ 김아무개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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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7시 10분, 김씨가 급식실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소독이다. 솥과 김치통, 음식을 조리할 때 사용할 그릇 등을 소독한다. 락스와 물을 섞어 담아놨다가 헹구는 걸 2~3차례 반복하면 오전 8시 30분 경이다. 이어 학교 영양사가 와서 음식 재료를 확인하면 조리를 시작한다. 매일 국과 밥 외에도 반찬 3가지, 과일 1개를 준비해야 한다. 일주일에 2~3번은 볶음요리를 하고 한 달에 수 차례 튀김요리를 준비한다.

김씨가 처음 일을 시작하던 2010년에는 4명의 조리실무사가 300명의 끼니를 만들었다. 이후 학생수가 줄어 선생님을 포함한 급식인원이 300명이 되지 않자 조리실무사는 3명으로 줄었다. 앞서 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아래 학비노조)은 지난 4월 '전국 대부분의 급식실에서 조리사 1명이 100명분 이상의 식사를 담당한다'라고 밝혔다.

"쇠 냄새라고 해야 할까요. 탄내가 심한데, 목에 그 냄새가 내내 남아 있어요. 그런데도 조리실 환기가 잘 안 돼요. 창문이 있긴 한데, 다 열리지 않거든요. 천장에 환기시설을 설치해서 창문을 가리고 있어요. 그런데 그 환기시설도 영 시원치 않고... 튀김요리를 하면 급식실 복도에서부터 튀기는 걸 알 정도로 냄새가 심하니까요. 그런데도 제가 10년 일하면서 급식실 환기 시스템을 점검하는 걸 본 적이 없어요."

교내 영양사가 준비한 식단에서 튀김·볶음·구이 요리는 거의 빠지지 않는 단골메뉴였다. 모두 가열이 필요한 음식이었다. 김씨는 "이런 튀김류는 환기가 중요한데, 환기 여부를 확인할 시간도 없이 음식을 만들었다"면서 "폐암판정을 받고 나서 제일 먼저 생각났던 게 튀김 요리였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국제암연구소(IARC)는 고온에서 기름으로 튀김이나 볶음·구이 같은 요리를 조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조리흄(cooking fumes, 230도 이상 고온 상태에서 기름이 들어간 요리를 할 때 지방 등이 분해되면서 배출되는 물질)이 폐암 발생의 위험도를 높인다고 판단하기도 했다.

다른 학교의 급식실도 상황은 비슷했다. 지난 4월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조리 시 발생하는 공기 중 유해물질과 호흡기 건강영향'에 따르면, 울산 지역 24개 학교 급식실을 조사한 결과 튀김이나 전 등의 조리과정에서 검출된 일산화탄소는 최대 295ppm이었다. 이는 산업안전보건법 등의 사무실 내 공기 질 관리 기준(10ppm)의 30배에 달하는 수치다.

울산 지역 24개 학교 급식실 이산화탄소는 기계측정 한계치인 8888ppm을 넘어서 정확한 측정조차 불가능했다. 8888ppm은 기준치(1000ppm 이하)의 9배에 달한다. 근로복지공단 직업환경연구원이 2019년 조리실 내의 작업환경을 평가한 결과 튀김·볶음 등을 조리할 때 각종 휘발성유기화합물(VOCs)과 대기오염물질(입자상 물질·PM)이 노출된다는 점이 확인됐다.

암에 걸린 건 내 잘못이 아니었구나... 노조를 찾아가다
 
직업성·환경성암환자찾기119(아래 직업성암119는 4월 28일 ‘세계 산재사망노동자 추모의 날’을 맞아 세종문화회관 계단 앞에서 '전국 직업성 암환자 찾기 운동' 선포식을 가졌다.
 직업성·환경성암환자찾기119(아래 직업성암119는 4월 28일 ‘세계 산재사망노동자 추모의 날’을 맞아 세종문화회관 계단 앞에서 "전국 직업성 암환자 찾기 운동" 선포식을 가졌다.
ⓒ 신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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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암 판정 후 표적치료를 받고 있던 김씨가 산업재해(산재)를 신청해야겠다 결심한 건 지난 4월이다. 그는 "조리실무사로 일하다 폐암으로 숨진 이아무개씨가 산재를 인정받았다는 뉴스를 봤다"라고 말했다. 조리실무사의 폐암이 산재 인정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암에 걸린 건 내 잘못이 아니었구나', 김씨는 학비노조를 찾아갔다. 

학비노조는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다 암에 걸린 조리실무사들의 현실을 개인의 탓으로 돌리면 안 된다고 판단했다. 이미 노조의 자체 조사 결과 경기 지역에만 300명이 넘는 조리실무사가 폐질환을 앓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학비노조가 학교 급식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직업성 암환자 찾기 사업과 집단 산재신청에 나서는 이유다.

학비노조에 따르면, 전국 1만 1835개 학교에 조리실무사를 포함한 총 7만 1268명의 급식노동자가 있다(2019년 기준). 노조는 직업성·환경성암환자찾기119와 함께 전국의 급식노동자를 대상으로 직업성암에 걸린 노동자를 찾아 오는 6월 3일 대규모 집단산재를 신청할 계획이다. 김씨의 말이다.


"치료 때문에 병원에 입원했을 때 같은 병실에서 수술을 기다리던 환자도 조리실무사였어요. 광주광역시 한 학교에서 15년 넘게 일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그 사람은 수술을 잘 받았는지 모르겠어요. 연락처를 미처 물어보지 못 한 게 못내 아쉬워요. 그 분에게도 폐암이 우리가 뭘 잘못해서 걸린 게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싶어요. 같이 산재 신청하자고 하고 싶은데, 연락할 방법이 없네요. 제 이야기가 기사로 나가면, 이걸 꼭 읽었으면 좋겠는데..."

태그:#산재, #급식실, #조리실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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