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1 08:07최종 업데이트 20.04.01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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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라. 사이비 언론인들이여, 나오라. 이 민주의 광장으로 나와 국민과 선배에게 속죄하라...

안타깝다. 그 자리 그 건물이건만 민주투사는 간 곳 없고 잡귀들만 들끓는가. 사자의 위용은 어디 가고, 도적 앞에 꼬리 흔드는 강아지 꼴이 되었는가...


동아야, 너도 보는가.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올라만 가는 조선(일보)의 저 추잡한 껍데기를. 너마저 저처럼 전락하려는가. 너마저 알맹이는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았는가...

우리는 한 가닥 양심을 지니고 고민하는 언론인이 어딘가에 있으리라 믿으며 그들에게 호소한다... 과감히 편집권 독립투쟁에 나서라."  (<자유언론 40년 - 실록 동아투위 1974-2014> 75쪽)


반세기 전에 나온 외침이다. 나의 수습기자(1년) 시절인 1971년 3월 26일, 서울대생 50여 명이 동아일보 앞에 와서 '민중의 소리 외면한 죄 무엇으로 갚을 텐가'라는 플래카드를 펼치며 절규한 '언론인에게 보내는 경고장'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들은 경고장을 낭독한 뒤 그 자리에서 언론 화형식을 가졌다.

동아, 조선 '따라하기' 하면서 몰락 자초
 

서울 종로구 서린동 동아일보사. ⓒ 권우성

  
서울대생의 경고장에는, 당신네 동아일보 선배 기자들은 항일과 민주의 투사로 싸웠는데, 지금은 무엇을 하는가, 라는 강한 질책과 책망이 담겨 있었다. 그랬기에 "민주투사는 간 곳 없고 잡귀들만 들끓는가" "사자의 위용은 어디 가고 도적 앞에 꼬리 흔드는 강아지 꼴이 되었는가"라고 힐난했던 것이다.

서울대생들이 동아일보 앞에서 언론화형식을 한 이유는 당시 동아일보가 우뚝 솟은 1등 신문으로 영향력이 가장 큰 데다, 일제 강점기 때는 젊은 기자들이 항일의 민족정신을 보였고,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 치하에서는 '야당지'로서 저항의 필봉을 휘두른 찬란한 전통이 있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전통을 가진 신문이 박정희 독재정권의 치하에서 입을 다물고 독재정권에 순치된 모습을 보인데 대한 분노가 이날 시위에서 터져나온 것이다.

그러고 나서 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그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더군다나 4월 1일 창간 100주년을 맞는 동아일보의 지금은 어떤가.

그때는 박정희 독재 권력의 폭압에 눌려 언론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한 소극적 죄를 우리 역사와 사회에 지었다면, 지금은 스스로 언론권력이 되어 갖은 사회적 패악을 저지르는 적극적인 범죄자가 되었다. 더군다나 반세기 전 서울대생들이 '조선일보의 추잡한 껍데기'를 따라가지 말라는 그 경고에도 불구하고, 동아일보는 '조중동'의 한 묶음 속에서 '조선일보 바라보기', '조선일보 따라가기' 흉내나 내며 조선의 아류로 전락하고 말았다.

동아일보는 1975년 봄 이전까지 조선, 중앙, 한국일보 등 2위 그룹 신문들과는 한참 거리가 있었던 1등 신문이었고, 많은 국민들이 사랑했던 신문이었다. 물론 일제 강점기 말, 조선과 함께 부끄러운 친일의 행태를 보였고, 군부 독재 때 그 권력의 품에 안긴 부끄러운 역사가 있었다. 중요한 역사의 굽이굽이마다 권력의 품에 안겼다.

그럼에도 동아일보는 4.19 혁명, 1974년 10.24 이후 1975년 3.17 대량 해직 사이, 그리고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때 민주주의, 언론의 본령을 지키려 애쓴 시절이 있었다. 언론이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본래의 목소리를 냈고, 그것이 동아일보의 존재가치였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게 자기 목소리를 내고, 마땅히 가야 하는 길을 걸을 때 동아일보는 1등 신문의 길을 갈 수가 있었다. 그런데 동아일보가 그것을 포기하고 '조선일보 따라가기'를 하면서부터 몰락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창간 100년을 맞는 지금의 모습이다.

젊은 기자들의 끊임없는 저항

서울대생들이 동아일보 앞에서 언론 화형식을 한 소식은 동아일보 기자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이날 언론 화형식을 전후하여 그 해 3월과 4월, 대학가에서는 "권력에 목 졸린 언론", "재벌의 앞잡이로 둔갑한 언론", "황금과 권력을 제일주의로 하는 탈선 상업언론"이라며 당시 언론을 격하게 성토했다. (위의 책 75쪽)

대학생들의 이러한 언론 규탄 외침과 특히 동아일보사 앞에서 있었던 언론화형식이 결정적인 자극제가 되었다. 동아일보사의 젊은 기자들은 마침내 '언론자유 수호선언'을 하게 되었다. 동아일보 51주년 창간 기념일 보름 뒤인 1971년 4월 15일의 일이다.

"...오늘의 언론이 진실의 발견과 공정한 보도라는 본연의 기능을 거의 거세당하고 만 것은 주로 외부로부터의 불법 부당한 제재와 간섭 때문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돌이켜 보면 자랑스러운 선배 언론인들은 숨 막히는 외족(外族)의 억압 아래서도 국민의 알 권리와 국민에게 알릴 의무를 떳떳이 싸워 지켰다...

정보기관의 상주(常住)가 빚어내는 모든 불합리한 사태는 일선 언론인인 우리에게 치욕과 슬픔을 안겨주었다... 기관원의 상주나 출입은 허용될 수 없으며 신문 및 방송의 제작 판매의 전 과정은 언론인의 양심에 따라 자유롭게 이루어져야 한다. 아울러 우리는 오늘의 언론 위기의 책임을 전적으로 외부로만 전가하려 하지 않으며 권력 위에 잠잔 스스로 게으름을 반성하려 한다." (위의 책 77쪽)


이런 성명을 발표한 뒤 ① 우리는 기자적 양심에 따라 진실을 진실대로 자유롭게 보도한다 ② 우리는 외부로부터 직접 간접으로 가해지는 부당한 압력을 일치단결하여 배격한다 ③ 우리는 우리의 명예를 걸고 정보요원의 사내 상주 또는 출입을 거부한다는 세 가지 결의 사항을 밝혔다.

동아일보에서 이런 '언론자유 수호선언'이 발표되자 전국의 양심적인 기자들이 뒤따라 언론자유 수호선언을 했다. 한국, 조선, 중앙, 경향, 신아, 문화방송 등 일간지, 방송, 경제지, 통신사 등 전국 14개 언론사 기자들이 언론자유 수호선언에 가담했다.

중앙정보부 직원이 편집국에 상주하며 간섭
 

강제해산당한 기자들은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를 결성, 회사와의 투쟁에 들어갔다. ⓒ 동아투위

 
그러나 이 언론자유 수호선언은 말로 그친 선언이었을 뿐이었다. 중앙정보부 등 정보기관 요원들은 계속 편집국에 상주했고, 간섭은 끝나지 않았다.

동아일보사의 언론자유 수호선언은 그 뒤 두 차례 더 있었다. 유신체제가 선언된 1972년 10월 유신 이후 박정희 정권의 언론 옥죄기가 더욱 심해진 1973년 11월 20일 '언론자유 수호 제2선언문'을, 그리고 2주 뒤인 12월 3일 '언론자유 수호 제3차 선언문'을 채택했다.

이 과정에 여러 차례 기자 총회와 농성, 저항이 있었으나 현실에서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었다. 기자들의 좌절도 깊어만 갔다. 결국 우리가 깨달은 것은 '언론자유 수호 선언'을 '실천'할 수 있는 '기자 조직의 힘'이었다. '선언'에 참여하는 개인의 도덕적 결단만으로는 재갈 물린 언론의 현상을 타개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1974년 3월 초, 전국출판노동조합 동아일보 지부가 출범하게 되었다. 한국 언론사상 최초의 기자 중심 노동조합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동아일보 경영진은 펄쩍 뛰었다. 경영진은 두 차례에 걸쳐 노조 지도부와 대책위 소속 기자들 35명을 해고하거나 중징계 조치했다. 이후 노조와 경영진 사이에 법정 분쟁이 계속되다 결국 경영진이 해고, 징계 조치를 모두 풀고 손을 들었다.

노조 설립과 해고, 징계 과정에서 조합원들의 결속력은 강화되었고, 그 힘과 조직력이 그해 가을 '10.24 자유언론 실천선언'의 원동력이 되었다.

마침내 1974년 10월 24일, 우리는 박정희 독재 권력의 재갈에 물린 암흑시대에 '선언'이 아닌 '실천'을 다짐하는 횃불을 들어 올렸다. 그 횃불은 눈부시게 찬란했다.

'자유언론 실천선언'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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