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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접 장면.
 면접 장면.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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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일을 잃게 될 거라 생각해 말하지 못했어요. 잘못하면 한국 시장에서 일이 끊기잖아요."

20일 오후 서울역에서 기자와 만난 게임회사의 그래픽 디자이너 A씨는 두려움을 토로했다. 그는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게임회사 직원 채용 면접에서 '페미니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A씨는 지금은 다른 회사에 다니지만 페미니즘에 대해 직원들과 말하지 않는다. 혹여나 불이익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관련기사: 게임업계 내 '여성 블랙리스트' 실제로 존재하나? http://omn.kr/1lns9).

A씨와 같은 회사에서 다른 직군 면접을 본 B씨 역시 사상 검증을 당했다고 증언했다.

"면접 과정에서 실무 관련 질문은 하나도 없었고 '야한 여캐(여성 캐릭터)를 그려달라고 하면 어떻게 할 건가요?' '요즘 난리 난 넥슨 성우 관련 논란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물었다. '넥슨이 잘못했다고 생각한다. 성우가 질타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고 답변하자 면접관들은 낄낄거리면서 '넥슨이 불쌍하지도 않나?'라고 말했다."

B씨는 "이후 몇 시간도 안돼 불합격 통지가 왔다, 계열사 한 곳도 면접을 봤는데 아예 불합격 통지 메일조차 오지 않았다"라며 "나는 원화나 일러스트를 그리지 않아 표적이 될 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일을 겪었다"며 황당해 했다.

입사 전부터 "페미니즘 어떻게 생각하냐"

면접 때 '사상 검증'을 당했다는 증언이 쏟아지고 있다. 이름이 이미 알려져서 관련 업계에서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을 제외하고 취재에 응한 대부분 게임업계 종사자들은 익명을 요청했다. 페미니즘을 언급했다가는 잘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유명한 게임 회사 넥슨은 2018년 면접에서 디자인 직군에 한해 "넥슨 관련 여혐(여성혐오) 논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고 물었다고 공개적으로 IT매체 <블로터>에 밝힌 바 있다. 한 구직자는 중소 게임 회사 면접에서 "회사로서는 개인의 사상을 억압한다는 말을 들을 수 있으니 유저들더러 나가라든지, 성우에게 유저가 떠나고 있어 같이 할 수 없다고 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어떻게 생각하나"라는 질문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한국여성노동자회 배진경 대표는 "채용 과정에서 질문을 토대로 점수를 매겼을 텐데 이때는 업무에 관련된 질문을 해야 하지 않나"라고 비판했다.

남성도 예외 없어

면접 때만이 아니다. 업무중에도 검증은 계속된다. 현직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 C씨는 아예 게임이 공개되기도 전에 작업물이 내려갔다. SNS 계정에 페미니즘 관련 글을 올린 탓이었다.

회사는 C씨의 작업물을 내리고 이 일을 비밀로 하자는 합의계약서를 작성하도록 했다. 합의계약서에는 '작업물이 회사와 관련 있다는 정보를 노출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이 있었다.

남성도 '사상 검증'을 피해갈 수 없었다. 남성 게임 캐스터 김경우씨는 2016년 '넥슨 사태' 당시 SNS에 김자연 성우의 교체를 비판하면서 "지금의 행동이 독재정권 시절 사상검증을 하던 들개와 같아 보인다"는 글을 올린 뒤 고초를 겪었다.

해당 글은 게임 커뮤니티 사이트에 퍼졌고 유저들은 '김경우가 우리를 개돼지라고 불렀다'거나 '캐스터가 소속된 인터넷 방송국 대회 권한을 뺏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씨가 소속된 인터넷 방송국의 한 중간 관리자가 사과문을 강요했다. 결국 김씨는 사과문을 작성했고 회사는 마음대로 고친 '최종' 사과문을 김씨의 개인 SNS와 게시판에 올렸다.

하지만 이것으로 일은 끝나지 않았다. 김씨는 이후 회사로부터 '오늘 중계 나오지 말라'는 통보를 받았고, 그로부터 며칠 뒤에 '게임 중계를 제외한 나머지 업무를 해 보는 게 어떻겠느냐'면서 간접적인 퇴사 제의를 받았다. 김씨는 회사를 나왔고 이후 '이스포츠' 업계에서 일을 받지 못했다.

김환민 게임개발자연대 대표는 "예전에는 그래도 성별이 남성이라면 넘어가는 게 있었는데 이제는 남성이 페미니즘을 말하면 용서받지 못하는 분위기다, '남성 카르텔'로부터 버림받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남성인 김환민 대표 본인도 게임 업계 내부에서 목소리를 낼 때마다 안티 페미니즘 유저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고 증언했다.

"여성 유저 정보 알려주겠다"

게임 제작자들만이 아니라 여성 유저들에게도 페미니즘은 금기어다. 지난 8월 1인 게임 방송 진행자가 생방송 도중 한 유저를 가리켜 '메갈'이라며 고의적으로 게임을 방해했다. 진행자가 처벌을 받자 게임 커뮤니티에서는 회사가 페미니즘을 옹호했다는 식의 주장이 올라왔다.

그러자 해당 게임의 '운영팀장'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우리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해명하는 동시에 '유저 닉네임을 물어보면 알려주겠다'는 식으로 답변했다. 게임 회사들이 유저들에게 적극적으로 '반페미니즘을 지지한다'는 시그널을 주는 것이다.

한 게임회사는 여성 유저가 사용한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를 향해 "페미니즘을 따르거나 주장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확인되며 이는 사회적 갈등 이슈에 동조 및 조장하는 행위로 확인돼 제재가 진행됐다"고 공지를 했다.
 
한 게임업체가 여성 유저에게 경고하면서 보낸 공지문.
 한 게임업체가 여성 유저에게 경고하면서 보낸 공지문.
ⓒ 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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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성 유저는 "한국 게임회사들이 매년 시장이 얼어붙었다고 미래가 없다고 이야기하는데 이들이 말하는 미래는 여성을 배제한 미래가 아닌가 싶다"라며 "모바일 게임 유저의 절반이 여성인데 이들마저 배제하는 게 타당한가"라고 물었다.

한 게임 업계 관계자는 이러한 반 페미니즘 정서를 공유하는 유저들의 행태가 세계적인 게임 트렌드와 다르다며 "시장이 빠르게 교체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사상 검증의) 흐름이 오래 가지 않을 거라고 본다"고 진단했다. 그는 "게임 오버워치에는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등 다양한 사람들이 나온다"라며 "이는 예전처럼 게임에서 백인 남성만 다루었다가는 장사가 안 된다는 것"이라고 전했다.

태그:#게임업계, #페미니즘사상검증, #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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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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