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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담은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에 올리는 방안에 대해 22일 여야 4당이 합의했다. 4당은 다음날 의원총회에서 이 합의안을 추인했다. 이에 따라, 패스트트랙에 올려진 시점부터 최장 330일 안에 개정안의 국회 통과 여부가 확정된다.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현실화가 한걸음 가까이 온 것이다.

자유한국당은 총력 투쟁을 예고하고 있다. 지난 20일 광화문광장에서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는 대규모 장외집회를 열었던 한국당은 23일 오후 청와대 앞에서 규탄 기자회견을 연 데 이어 국회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27일에도 대규모 장외집회를 연다는 계획이다.

각 정당의 전국 득표율을 의석수에 반영하는 '연동형'이 실현되면, 그간 전국 각지에서 어느 정도의 득표율을 올리고도 그에 상응하는 의석을 갖지 못한 진보세력의 국회 내 입지가 커질 수밖에 없다. 한국당이 총력 투쟁을 외치는 이유다.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가 지난 3월 12일 오전 국회 본회의장에서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하고 있다.
▲ 교섭단체 대표연설 나선 나경원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가 지난 3월 12일 오전 국회 본회의장에서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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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당은 지난 21일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의원내각제를 채택한 독일과 뉴질랜드 등 전 세계 2개 나라에서만 채택하고 있는 선거제도"라며 "개헌 없이 선거제도만 변경하면 대통령의 권력에 군소야당들이 이끌리면서 국회 대정부 견제 기능이 의미 없게 된다"는 논평을 냈다.

뿐만 아니라, 지난 3월 12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도 나경원 한국당 원내대표는 "민주당 2중대·3중대 정당의 탄생만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라며 '연동형'을 비판했다. 바른미래당 내분 사태의 핵심 당사자인 이언주 의원도 23일 탈당 기자회견에서 패스트트랙 합의를 추인한 야당들을 '2중대·3중대'로 지칭했다.

나 원내대표의 우려대로, 향후 '연동형'의 수혜자가 될 진보세력이 진짜로 민주당 2중대나 3중대가 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보수세력이 겁을 먹을 만한 이유가 충분하다는 점이다. 지난 70년간 유리한 선거법 덕분에 전국 득표율보다 더 많은 의석을 차지하는 일이 많았던 보수정당로서는, 국회에 등장할 새로운 진보세력을 염려할 수도 있다.

그런데 한국당의 반대 입장에는 타협의 여지가 없지 않다. 조건부로 연동형을 수락할 가능성도 있어보인다. 위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나 원내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내각제에 가까운 권력구조 개선을 위한 원 포인트 개헌이 함께 추진되지 않는 한,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담은 선거제 개편은 사실상 의회 무력화 시도입니다. 의회 민주주의 부정입니다. 결코 용납될 수 없습니다."
 
내각제 개헌이 보장된다면 '연동형'을 찬성할 수 있다는 발언으로 읽힌다. '연동형'은 보수정당에 불리하지만 내각제 개헌은 유리할 수 있다는 인식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연동형' 실시로 인한 손실을 내각제로 어느 정도 만회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내각제가 보수세력한테 진짜로 유리할지는 좀 따져봐야 할 일이다. 나 원내대표의 발언은 내각제 역사를 면밀히 검토한 데서 나온 것이 아닌 듯하다. 내각제 역사를 찬찬히 살펴보면, 그것이 보수세력한테 정말로 유리한지에 관해 새로운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보수세력이 재기를 도모하는 방법, 내각제

박정희 정권이나 전두환 정권 때는 내각제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많이 유포됐다. 국정 혼란을 야기하는 나약한 시스템이라는 인식이 존재했다. 강력한 대통령제를 합리화하고자 내각제 반대 여론을 조성한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이승만 집권기 때도 그렇고 박정희 집권 이후에도 그렇고, 보수세력은 대체로 강력한 대통령제를 선호했다.

하지만,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다. 위기 상황에서는 내각제를 지지한 사례가 있다. 1960년 4·19 혁명 직후의 자유당이 위기 돌파를 위해 내각제를 지지한 일이 있다. 내각제 개헌으로 집권에 성공한 쪽은 민주당이지만, 정치적 의도를 갖고 내각제를 지지한 쪽은 다름아닌 자유당이었다.

4·19혁명 2년 전인 1958년 제4대 총선에서 자유당은 총 233석 중 126석을 차지했다. 제1야당인 민주당은 80석에 불과했다. 그렇기 때문에 4·19로 표출된 민중의 의지를 헌법 조문에 반영하는 '1960년 6월 15일의 개헌'은 자유당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했다.

이때 자유당이 내각제 개헌에 동의했던 것은, 1960년판 촛불혁명으로 인해 차기 대선에서 패배할 게 확실해졌기 때문이다. 이승만 같은 대형 후보를 내놓기 힘들었던 것이다. 민주당은 이승만 12년 독재에 대한 염증 때문에 내각제를 추진한 데 반해, 자유당은 차기 대선에서 승리하기 힘들다는 이유 때문에 내각제를 지지했던 것이다.

내각제로 간다고 해도, 자유당이 집권에 성공하리란 보장은 없었다. 하지만, '강력한 민주당 대통령'보다는 '힘 없는 민주당 대통령' 하에서 활로를 모색해보자는 생각에서 내각제를 지지했다. 그들 입장에서 볼 때, 내각제 개헌은 '강력한 민주당 대통령'의 출현을 막는 동시에 보수의 재기를 도모할 수 있는 방편이었다.
 
내각제 당시의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
 내각제 당시의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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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자유당의 발상에는 한계가 있었다. 근시안적인 데가 있었다. 자유당식 해법은 강력한 민주당 대통령은 막을 수 있어도, 진보세력의 목소리를 차단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4·19 이듬해에 5·16 쿠데타가 발생하지 않고 내각제가 좀 더 오래 유지됐다면, 의회에서 표출되는 진보세력의 목소리에 대해 내각이 어느 정도라도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됐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진보는 더 강해지고 보수는 한층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의회를 구성하는 여러 세력의 목소리를 골고루 반영하는 데는 대통령제보다는 내각제가 훨씬 효율적일 수밖에 없다. 대통령제 하에서는 의회 다수당의 결정도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 막힐 수 있다. 하지만, 내각제에서는 정부가 의회의 눈치를 더욱 더 살피게 된다. 즉, 의회의 목소리가 국정에 훨씬 쉽게 반영될 수밖에 없다.

내각제에서는 진보정당의 목소리가 국정에 반영되는 일도 수월해진다. 경우에 따라서는, 소수 의석을 가진 진보정당이 거대 정당과의 연정을 통해 총리를 배출할 수도 있다. 이런 속에서 진보정당과 보수정당이 균형을 이루는 방향으로 정치시스템이 발전할 가능성도 많다. 아래 내용은, 성낙인 서울대 교수가 <헌법학>이란 교과서에서, 내각제를 경험한 유럽 정치에 관해 설명하는 대목이다.
 
"유럽에서 정당의 구도는 극우·극좌의 중간에 위치한 보수우파와 진보좌파 사이의 균형으로 나타나고 있다. 의원내각제에서도, 국민적 선호가 어느 극단에 이르지 않으면서도 보수와 진보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 영국의 보수당·노동당, 프랑스의 범우파와 사회당, 독일의 중도우파와 사회민주당의 체제 정립을 통하여, 국가적인 기본 문제에 대해서 공통의 정치적 인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독일연방의회의 모습.
 독일연방의회의 모습.
ⓒ 독일연방의회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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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각제는 보수보다 진보에게 유리하다

비례대표제와 더불어 내각제가 진보정당의 성장에 필요하다는 주장은, 김욱 서남대 교수의 논문 '왜 내각제인가-진보정당의 확립과 계급연합의 가능성을 위하여'에서 한층 더 강렬한 어조로 제기된다. 1998년에 발표된 논문이라서 그 시절의 정당들이 거명된다.
 
"노동계급에게는 자신들의 정당한 정치적 의사표시를 위한 출구가 존재하지 않는다. 선거 때마다 노조의 정치활동 금지 규정과 사표 방지 심리에 의해 그들의 정치적 의사는 왜곡되어 왔으며, 정당 구조는 아예 국민회의·한나라당·국민신당·국민승리21 등등과 같은 국민 정당의 형식과 지역 정당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민주주의법학연구회가 발행한 <민주법학> 제14호.
 
지금의 정치 시스템에서는 노동자 등을 대변할 진보정당이 출현하기 힘들다고 말한 뒤, 김욱 교수는 "이런 불합리한 사태"를 타개할 해법을 아래와 같이 제시했다. 위 인용문 바로 뒤에 이어지는 대목이다. 아래 글 속의 '반작용'은 진보정당의 출현을 억제하는 요인을 지칭한다.
 
"적어도 이런 불합리한 사태는 현재와 같은 정부 형태와 선거제도가 계속되는 한 단시일 안에 개선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그리고 이 점에 관한 한 대통령제적 반작용이 존재함을 부인할 수 없으며, 이 반작용은 비례대표제를 기초로 하는 내각제와 적극적인 의미의 정계개편에 의해서만 합리적으로 지양될 수 있을 것이다."
 
나경원 원내대표의 말을 들으면,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인한 보수세력의 손실이 내각제 개헌으로 어느 정도 만회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점을 헌법학 교과서들이나 김욱 논문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연동형'은 물론이고 내각제 역시 보수보다는 진보 쪽에 유리하다는 점이 이미 충분히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연동형을 하려면 내각제도 해야 한다'라는 나 원내대표의 주장은, 그것이 보수세력한테 유리할 거라는 생각에서 나왔다면 명확히 틀린 것이다. 하지만, 이 주장은 실상은 진보세력의 성장을 보다 확실히 도와주는 것이다. 진보가 성장하면 진보와 보수의 균형이 이루어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대한민국 전체가 잘되게 된다. 그의 주장은 실상은 대한민국 전체를 위한 것이 되는 셈이다.

나경원 원내대표의 주장은 진보·보수를 떠나 우리나라 전체를 이롭게 하는 '포용력 있고 통합적인 주장'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는, 그의 주장에 대해 '옳소' 하며 박수쳐줄 수 있을 것이다.

태그:#연동형 비례대표제, #내각제 개헌, #패스트트랙, #자유한국당, #장외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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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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