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지 길을 묵묵히 걷다가 뒤늦게 이름을 알리는 사람을 보면 기분이 좋다. 무명 생활을 오래 하다가 중년의 나이에 빛을 보는 배우들이 그렇다. 이성민은 45세에 드라마 <골든타임>으로 빛을 봤고, 곽도원과 마동석은 각각 39세, 40세에 <범죄와의 전쟁 : 나쁜 놈들 전성시대>로 대중들에게 자신을 각인시켰다. 무명 생활을 하는 동안 얼마나 고생했을까 안쓰럽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 더 정이 가는 배우들이다.

그런데 어느날 문득 의문이 생겼다. 왜 여자 배우는 이런 사례가 없을까? 무명으로 지내다 뒤늦게 인정을 받는 것은 고사하고 20대에 잘 나가던 배우들도 나이가 들수록 드라마나 영화에서 자취를 감춘다. 여배우 중 나이가 들어서 이름을 알린 사람으로는 라미란 정도밖에 안 떠오른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것은 나이든 중견 여배우가 맡을 수 있는 배역이 없기 때문인 듯하다. 사랑을 주제로 한 이야기에는 젊고 예쁜 여배우가 필요하고, 전문직업인이 등장하는 이야기나 범죄물에는 여자 배우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여배우들 인터뷰에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말은 맡을 역할이 없다는 것이다. 손예진은 2016년 JTBC 뉴스룸과의 인터뷰에서 "남성 위주의 영화들이 어쩔 수 없이 많다. 그래서 여배우들이 선택할 수 있는 폭이 좁다. 이것은 어떤 부분에서는 억압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왜 여배우는...

그런데 최근에 중견 여배우들이 동시에 대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송윤아, 채시라, 김희애가 그들이다. 송윤아(46)는 SBS 드라마 <시크릿 마더>에서 아들 교육에 올인한 강남 열혈 엄마 김윤진 역할을 맡았다. 의사 출신이지만 오로지 아들을 위해 사직하고 전업 주부의 삶을 사는데 집에 의문의 입시 보모 김소연이 들어오면서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일들을 그리고 있다.

 시크릿마더

시크릿마더 ⓒ sbs


채시라(51)는 MBC 드라마 <이별이 떠났다>로 3년 만에 대중들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엄마로 살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극심한 상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세상과 자신을 단절시킨 서영희 역을 맡았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살다가 '나'를 잃어버린 채 고갈되어버린 여성의 회한을 통해 소통으로 깊은 상처가 치유되는 과정을 세밀히 그린다.

 이별이 떠났다

이별이 떠났다 ⓒ mbc


김희애(52)는 영화 <허스토리>에서 일본에 맞서 싸운 위안부 할머니들을 이끌었던 원고단 단장 문정숙 역할을 맡아 이달 27일에 관객과 만날 예정이다. 이 영화는 당시 일본 열도를 발칵 뒤집을 만큼 유의미한 결과를 이뤄냈음에도 지금껏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관부 재판' 실화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허스토리

허스토리 ⓒ 수필름


반갑다. 드라마, 영화에서 간혹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던 그녀들을 동시에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고맙다. 더군다나 남자 인물들이 주를 이루는 극에서 소모적인 역할을 맡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극을 이끄는 역할로 시청자와 관객을 만나게 된다는 점에서 더 의미가 있다.

그녀들의 복귀가 반갑다는 말을 하지 않는 날이 오길

우리나라 여배우들은 젊고 예쁜 역할 아니면 누군가의 어머니 역할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연기 경험이 많은 중견 여배우들이 설 자리가 없다. 잘 나가던 여배우들이 어느샌가 자취를 감추는 이유가 바로 그것일 것이다. 중견 여배우들이 반드시 주연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연기력을 누가 맡아도 상관없는 보조적이고 소모적인 역할을 하는 데에 쏟아 부으라고 강요할 수도 없는 것 아닌가. 연기력에 대해 말할 필요가 없는 배종옥이 드라마 <이름없는 여자>에서 맥락 없이 소리 지르는 연기를 하며 발연기 논란이 있었던 것만 봐도 배우가 어떤 역할을 맡는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시청자와 관객의 입장에서도 항상 비슷한 내용의 극이 반갑지 않다. 이제 흔한 사랑이야기나 수동적이고 남자 주인공에게 도움만 받는 민폐녀가 나오는 극은 대중들에게도 외면 받는다. 우리에게는 많은 자원이 있다. 남자 배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자 배우도 있고, 젊고 예쁜 여자 배우뿐만 아니라 경륜이 있는 중견 여배우들도 있다. 이들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극들이 나오길 기대한다. 앞으로는 중견 여배우들이 몇 편의 주연을 맡은 것만으로 반갑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되는 때가 오길 바라본다.

중견여배우 송윤아 채시라 김희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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