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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엄마의 공책> 스틸컷
 영화 <엄마의 공책> 스틸컷
ⓒ 영화사 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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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혼자가 된 애란은 30년 넘게 반찬가게를 해오고 있다. 규현과 혜원 남매를 반찬가게로 키웠고 대학까지 가르쳤다. 그렇게 고생해서 키운 자식들이건만 애란은 아들 규현에게 언제나 까칠하다. 규현도 마찬가지, 무뚝뚝하며 퉁명스럽다. 그래서 지척에 살면서도 데면데면한 모자사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딸 혜원이 돈 걱정 없을 집으로 시집갔다는 것. 그러나 시집의 사업을 돕는다고 바쁜 편이라 얼굴보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 자식이 둘이라지만 누구든 붙잡고 마음 속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다.

애란은 오래전부터 자신이 만드는 음식에 관한 것들을 공책에 써오고 있었다. 써두면 생각나지 않을 때 도움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어느 날 애란은 김치를 담그다 "액젓을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난감해한다. 그런 애란에게 오랫동안 가게 일을 돕고 있는 윤자가 "형님이 일일이 써놓은 공책을 보면 알 거 아니냐?"고 귀띔한다.

그런데 애란은 '대체 뭔 소리냐?'는 눈치. 잠시 후 "불려 놓은 당면 건지는 것을 잊었다"며 화들짝 놀라 주방으로 달려가는 윤자를 보며 "치매가 왔나?"며 혀를 찬다. 그런 후 혼잣말을 한다.

"공책은 무슨 얼어 죽을 공책이 있다고!"

무엇이든 써둔다고 늘 가까이 뒀던, 그래서 세상 그 무엇보다 친숙한데다, 소중히 여기는 보물 같은 공책의 존재마저 까맣게 잊고 만 것이다. 이것을 시작으로 애란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들을 보여주곤 한다. 어느 날은 약속이 있다는 아들 규현을 닦달해 춘천에 가서는 자신이 왜 그곳에 왔는지 몰라 하염없이 강물만 바라보다가 오기도 한다.

영화 <엄마의 공책>(2018년 3월 개봉) 앞부분이다. 남은 물론 자식에게도 신세지는 것을 싫어해 계산 똑 부러지고 억척스러운, 음식 솜씨 좋은 72세 어머니 애란은 이주실씨가, 그 아들 42세 규현은 이종혁씨가 연기한다.

영화로 읽는 치매 이야기

<엄마의 공책> 책표지.
 <엄마의 공책> 책표지.
ⓒ 궁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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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얼마 전까지 이 영화의 존재를 몰랐다. 영화를 알게된 것은 영화 제목과 같은 <엄마의 공책>(궁리 펴냄)을 읽기 시작하면서다. 영화를 바탕으로 쓴 책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 애란은 채소 값을 줬다고 우기기도 하고, 손녀 소율과 시장에 가서는 운동화를 훔쳐 파출소에 가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반들반들하도록 닦아 관리해온 간장 항아리를 찾지 못해 헤매기도 하고, 윤자에게 "누구 맘대로 항아리를 옮겨 놨냐?"며 버럭 화를 내기도 한다. 도둑이 들었다며 한밤중에 소동을 피우기도 한다. 이른 새벽 거리를 배회하기도 한다.

평소 애란의 성격이나 인품으로 아예 생각조차 못할 일들이었다. 영화는 '나이 들면 당연한 현상'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거나, 건망증 정도로 간주하며 흘려버리기 쉬운 치매 초기 증상부터, 대체적으로 많이 알려진 치매 증상까지를 점진적으로 보여 준다. 그런 후 가족 중 누군가의 치매를 알게된 후 벌어지는 여러 상황들을 보여준다.

정말 치매가 맞는지, 마음을 다치지 않게 병원에 모시고 가야하는 것부터 다들 바쁜 와중에 그렇다면 누가 모시고 갈 것인가, 요양원에서 치료를 받게 해야 할 것인가, 아니다, 아직은 그래도 가벼운 증상인데 우리 엄마를 그런 곳에 보낼 순 없다, 집에서 모셔야 한다, 가게를 정리해 엄마가 더 이상 일을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래서 치료만 받게 해야 한다…. 등, 드라마나 주변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병든 부모님을 두고 벌어지는 갈등과 상황들 말이다.

-머릿속이 순간적으로 텅 비어버리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간다고 해도 존재 자체가 하찮아지는 것은 아니다. 뇌의 어느 부분이 손상돼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이 있는가 하면, 아직 남아 있는 기능이 분명 있다.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는 기능을 '잔존기능'이라고 하는데, 치매환자는 이 잔존기능을 사용해서 오늘을 살아간다. 따라서 환자가 할 수 있는 것을 도와주는 게 아니라 하지 못하는 것을 도와야 한다. 할 수 있는 걸 도와주게 되면 할 수 있는 것까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49쪽)

-아주 오랫동안 진행되어 오다가 이제 드디어 겉으로 드러나게 된 치매, 하지만 치매진단을 받았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하던 일을 못하고 생각이 멈춰버린 것은 아니다. 흔히 치매노인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고 여기기 쉽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설사 사람들 앞에서 배변실수를 할 정도라 해도 자존심이나 수치심까지 다 사라졌다고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된다. 지적인 능력은 이전보다 점점 못해지더라도 감정은 끝까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치매노인의 감정, 마음을 읽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78쪽)


이 책은 우리 사회에서 고령화란 용어조차 낯설던 때부터 노인복지현장에서 일을 해오고 있는 두 사람(이성희, 유경)이 썼다. 책은 치매의 시작부터 진행 과정, 가족이나 주변 환경의 변화, 치매를 대하는 바람직한 자세나 역할, 보다 효과적인 치료 방법 등을 영화 속 중요한 상황에 따라 9장으로 나눠 설명한다.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각장마다 줄거리와 상황들을 먼저 설명한 후 상황에 맞는 치료나 대처법 등을 조언하는 형식으로 썼다.

저자 중 한 사람은 치매를 앓은 부모를 뒀다. 전문가적인 의견이나 조언을 서술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두 사람 각각 현장에서 얻었던 관련 지식들을 대담형식으로 풀어놓는데, 치매 부모를 살폈던 경험까지 더하고 있다. 의견이나 조언이 훨씬 현실감 있게 느껴짐은 물론이다. 

책을 읽으며 자주 느낀 것은 치매처럼 전문적이며, 그래서 무겁고 복잡한 문제는 이처럼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드라마 혹은 영화와 연결지어 이야기하는 것이 여러모로 훨씬 좋겠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 책은 치매와 치료에 대해, 그리고 치매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현실을 쉽게 들려주고 있다.

"가족 중의 누군가가 '이상하다'고 느끼면 곧바로 긴장하고 세심한 관찰에 들어가야 한다. 외출하기 싫어하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다, 옷매무새가 예전 같지 않고 흐트러진다,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한다, 거스름돈 계산이 제대로 안 된다, 옛날 엄마 요리가 아니다, 재활용품 수거요일을 자꾸 잊어버린다, 항상 같은 옷을 더러운 채로 입고 있거나 목욕하기 싫어한다, 같은 물건을 계속 산다, 냉장고에 상한 음식이 많다, 물건을 도둑맞았다고 한다, 대화가 이어지지 않고 끊어진다….

아들 규현이 어머니가 조금 이상하다고 눈치 채는 순간이 있는데, 윤자처럼 나이 탓이라며 웃어넘기기만 하면 위험하다. 한 번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이 중요하다. 이런 순간순간을 무시하며 넘기다보면 치매증세가 눈앞에서 가려져 보이지 않고, 결국 병이 깊어진 다음 후회하며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 지금의 치매는 이미 15년 전부터 시작된 것이고, 그에 앞서 25년 전부터 걸음걸이 등을 통해 그 조짐을 알 수 있다는 연구보고도 있다. 짧게 잡아 15년, 지금 나이 60세라면 75세 이후 치매 없는 건강한 삶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저절로 그 답이 나오게 되는 셈이다."-(21~22)
우리는 치매에 대해 얼마나, 제대로 알까

책에 따르면 65세 이상 10명 중 1명이 치매일 정도로 치매는 이제 흔한 질병이 되었다. 노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암보다 치매라는 것을 읽은 적이 있다. 그 말은 틀리지 않은 것 같다. 친정 엄마는 물론 여러 어른들께 비슷한 이야길 그동안 여러 차례 들어왔으니 말이다. 그런데 노인들만 치매를 두려워할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치매는 막연히 두려운 존재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치매에 대해 얼마나, 그리고 제대로 아는 것일까?

부모님이 칠순이 되면서 노인문제에 관심을 두게 됐다. 치매가 급속도로 늘고 있어서인지 최근 관련 책들이 많이 보인다. 그간 읽어온 치매 관련 책 중 이 책이 훨씬 설득력 있게 와 닿은 것은 복잡한 뇌 구조나 연구 자료 등을 언급하는 것 등으로 설명하지 않고 주변이나 드라마 등으로 흔히 볼 수 있는 치매 증상과 가족들의 현실을 토대로 이야기하기 때문일 것이다.

책을 읽기 전까지 치매는 막연히 두려운 존재였다. 물론 여전히 두려운 존재다. 그런데 책을 읽기 전과 같은 막연한 두려움은 더 이상 아니다. 치매 없는 내 스스로의 노후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곁의 누군가 이상한 모습을 보이면 영화 속 윤자처럼 "늙으면 다 그래!" 정도로 흘려버려 대책없이 진행되게 놔두지 않겠다 생각할 정도로 치매에 대해 좀 더 알았기 때문이다.

치매에 대해 생각하면 그저 안개 속만 같고, 그래서 막연하게만 생각되다가 치매에 대해 조금 정리되었다고 할까. 책 덕분에 그동안 치매를 부모나 배우자와만 연관 지어 생각해오고 있었다는 것을 자각하기도 했다. 실은 내 사정이 될 수 있음에도 말이다. 그래서 고마운 책이다. 형제들의 건강한 노후를 위해 내형제들에게도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

덧붙이는 글 | <엄마의 공책>(이성희, 유경 씀) | 궁리 | 2018-04-01 ㅣ정가 12,000원.



엄마의 공책 - 치매환자와 가족을 위한 기억의 레시피

이성희.유경 지음, 궁리(2018)


태그:#치매, #엄마의 공책, #노인복지, #이주실(배우), #이종혁(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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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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