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드물지만 한국에서 만든 블랙코미디 영화 중 잘 만들어진 작품이 있냐고 물으면 나는 <그때 그 사람들>을 뽑곤 한다. 박정희 암살 사건을 다룬 이 영화에는 그야말로 웃음을 참을 수 없는 장면들이 즐비하다. 개인적으로 짧지만 가장 강렬했던 순간은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취조실 장면이다.

스치듯 지나가는 이 시퀀스에서 한 인물이 '빨갱이'로 몰려 고문을 당한다. 이유는? 그 인물이 피카소의 그림을 가지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피카소가 공산당원이었던 것이다. 헛웃음이 났다. 처음에는 생사람을 불순분자로 몰았던 현실을 꼬집은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중에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니 비슷한 이야기를 자기도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언제나 영화는 현실을 뛰어넘지 못하는 것 같다.

사실 '사상검증'은 그 자체로 말이 안 되는 행위이기에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이상 누가 무슨 신념과 정치관을 가졌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남은 것은 그 사람의 행동과 성향을 통해 유추에 유추를 거듭하는 것뿐인데, 모든 추론의 과정이 그렇듯 연결고리가 길어지면 논리적 근거는 희박해지고 비약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아니, 하다못해 검증이 성공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고 해도 '왜 그런 사상을 가지는 게 위험한 일인가'라는 중요한 질문이 남는다. 어떤 정치적 탄압의 역사를 들춰봐도 여기에 대해 명확한 답을 남긴 사례는 찾기 매우 어렵다. 대부분 국가안보에 위험하다거나 사회 혼란을 야기한다는 두루뭉술한 소리뿐이다. 이것이 <그때 그 사람들>과 같은 영화가 나올 수 있는 이유다. 겉으로 보기에 멀쩡한 사람이 헛소리를 하고 다니면 코미디가 된다.

'사상검증'이 웃음거리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

물론 지나고 나면 비웃음거리에 불과한 일이지만, 당사자로서 사상검열에 가까운 사건을 겪거나 현실에서 마주하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다. 전자의 사람에겐 고통을 주고 후자에겐 분노를 안긴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이런 일이 얼마 전 발생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렇다. 게임 <트리 오브 세이비어>의 원화가가 소위 '메갈'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당사자는 SNS에 이를 해명하는 내용의 사과문을 올렸다.

여기까지만 들어도 황당하기 짝이 없는데, 더 큰 문제는 그 다음에 등장했다. 게임의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회사 대표가 직접 입장을 밝힌 것이다. IMC 게임즈의 김학규 대표는 당사자인 직원과 이 일로 면담을 했다고 밝혔다. 대표의 이름으로 작성된 게임사의 공지 글에서는 심지어 원화가의 실명까지 공개하며 면담 내용의 일부를 전했다.

 넥슨이 서비스하고 있는 게임 '트리 오브 세이비어'에 관해 '사상검열'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게임사 대표는 공지 글에서 원화가에게 '왜 트위터에서 여성민우회, 페미디아 계정을 팔로우했냐’고 물었다고 밝혔다.

넥슨이 서비스하고 있는 게임 '트리 오브 세이비어'에 관해 '사상검열'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게임사 대표는 공지 글에서 원화가에게 '왜 트위터에서 여성민우회, 페미디아 계정을 팔로우했냐’고 물었다고 밝혔다. ⓒ 넥슨 홈페이지


입장문에서 김학규 대표는 해당 직원이 "변질되기 전 의미의 페미니즘과 메갈을 구분하지 못하고 관련된 단체나 개인을 팔로우한 것 등"의 실수를 했을 뿐 범죄 행위를 한 것은 아니라고 전했다. 질문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도대체 '변질되기 전 의미의 페미니즘'과 '메갈'은 정확히 무엇일까. 그리고 그 직원이 팔로우했다던 '관련된 단체'가 김 대표가 적극적으로 방지하고 대응하고자 한 '사회적 분열과 증오를 야기하는 반사회적인 혐오 논리'를 퍼트리는 곳이었을까.

공개된 면담의 내용에 따르면 김학규 대표는 왜 문제가 될 계정을 팔로우하고 있었는지 질문하기 위해 "여성민우회, 페미디아 같은 계정은 왜 팔로우했는가요?"라고 물었다. 그렇다면 한국여성민우회와 페미디아가 '반사회적 단체'라는 의미일까?

'진짜 반사회적 행위'는 누가 하고 있는가?

지적해야 할 문제가 너무 많아 막막할 지경이다.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입장문을 발표하기 이전에 진행된 면담부터가 문제였다는 점이다. 자기 회사의 직원이 SNS에서 도마 위에 올랐을 때,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대표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업무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면 상사에게 해당 직원과 개별 면담을 할 권리가 있을까. 심지어 그는 단순히 사태파악을 위한 '질문'을 했다기보다 '왜 그랬냐', '이유가 뭐냐'고 추궁에 가까운 물음을 던졌다. 이런 대화는 보통 '취조'나 '수사'에 가깝지, 단순한 면담이라고 보기 힘들다.

대표와 일개 직원이 가진 권력의 차이는 크고 당연히 둘 사이에는 위계가 존재한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해당 직원의 개인적인 정치관과 신념을 판별하고자 하는 일은 그 자체로 압박이 될 수밖에 없다. 한 마디로 <그때 그 사람들> 속 경찰들과 모양새만 다를 뿐 결과적으론 사상 검증과 탄압이 되는 셈이다.

심지어 김학규 대표는 '메갈과 관련된 인물들이 당장 문제가 되니 사과문으로 면피를 했다가 뒤에 가서는 다시 본색을 드러내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던 전례'가 있으므로 '전사적인 교육을 비롯한 방지책'을 마련하고 '끝없는 경계와 주의'를 하겠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그 교육과 방지책, 경계와 주의가 어떤 모양새일지 별로 궁금하지는 않다. 이미 역사에서 많이 봐오지 않았는가. 부디 그의 말이 현실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또한 김학규 대표는 입장문에서 해당 직원의 (여성민우회 계정 팔로잉, 특정 게시글 리트윗 등) 행위가 "정말로 민감한 사회적 이슈에 대한 무지나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판단되었"다고 말했다. 글쎄 정말로 무지하고 무관심했던 사람은 누구일까?

그가 '문제의 계정'을 지닌 것으로 언급한 단체 중 하나인 페미디아는 여성주의 정보생산자조합을 표방하는 콘텐츠 플랫폼이다. 이들이 한 일은 글을 쓰고 기사를 번역하고 연구를 소개하는 것뿐이다. 한국여성민우회는 어떤가.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 단체가 한 일은 성폭력을 추방하고 성차별을 해소하며, 낙태죄를 폐지하거나 여성혐오 범죄를 방지해 여성이 안전하고 평등한 권리를 가질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자 노력한 것이다. 이 모든 정보는 그저 노트북 앞에 앉아 손가락만 몇 번 움직여도 알 수 있다. 만약 김학규 대표가 '나는 무지하지 않았다'고 항변해도 상황은 더 우스워진다. 그렇다면 저 단체가 벌이는 일을 '반사회적'이라고 생각한다는 뜻밖에 되지 않으니 말이다.

 넥슨이 서비스하고 있는 게임 '트리 오브 세이비어'에 관해 '사상검열'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게임사 대표는 공지 글에서 원화가에게 '왜 트위터에서 여성민우회, 페미디아 계정을 팔로우했냐’고 물었다고 밝혔다.

넥슨이 서비스하고 있는 게임 '트리 오브 세이비어'에 관해 '사상검열'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게임사 대표는 공지 글에서 원화가에게 '왜 트위터에서 여성민우회, 페미디아 계정을 팔로우했냐’고 물었다고 밝혔다. ⓒ 오마이뉴스


어쩌면 그에게 '반사회적' 행위에 대한 감각이 별로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혹시나 해서 알려주자면 보통 사람들은 이런 행위를 증오를 부르는 반사회적 행위라고 이야기한다. '소녀에게 왕자가 필요 없다'는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입었다는 이유로 한 노동자의 작업물을 일방적으로 삭제하는 일. 과잉 성적 대상화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굳이 게임에 몸매와 노출을 강조한 여성 캐릭터를 집어 넣는 일. 10대 초반 외형을 가진 여성 캐릭터에게 '당신만을 위한 도구가 되겠어요'라는 대사를 하게 만들거나, 속옷이 보일 정도로 짧은 치마를 입히는 일이 여기에 가깝지 않을까(관련 기사 : '복종하겠다'는 여자아이, 대체 누굴 위한 게임인가).

이 모든 일을 한 회사가 어디냐고? 바로 논란이 된 <트리 오브 세이비어>를 서비스 중인 넥슨이다. 거기다 이번 '원화가 면담' 사태로 넥슨은 '자사가 제공하는 게임의 제작자가 직원을 사상검증하고도 대응까지 무책임하게 했다'는 오명도 얻게 될지도 모르겠다.

차별과 검열을 일삼는 행보에 미래는 없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오늘날 사회에서 사상검증은 결국 코미디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대부분 추론의 과정은 난잡하고 전제하는 위험과 적은 허황되고 부풀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학규 대표가 성급한 무리수를 둔 이유는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하다. 당장 입장문에 달린 댓글만 봐도 그렇다. 그가 제작한 게임의 주사용자층이 누구인지 너무도 뻔히 드러나지 않는가. 페미니즘이라면 치를 떨고, 여성운동은 모두 '메갈'뿐이라고 생각하는 일부 남성들 말이다. 한국 게임사의 대표라는 사람이 이 한줌의 남자들의 구미를 맞추는 동안 해외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게임 오버워치의 디렉터, 블리자드의 제프 카플란은 지난해 D.I.C.E. 서밋에서 세계여성행진에 등장한 '전국디바협회'(한국)의 깃발을 이야기하며 '세상을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가능성을 발견하라'는 자신의 주제가 현실에서 구현되고 있다고 격찬을 보냈다. 익히 알려져 있듯 <오버워치>에는 성소수자·노인 여성·비백인 인종 등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캐릭터가 등장하며 제작사인 블리자드는 '다양성을 추구하고 차별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이는 단순히 옳고 그름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제작자의 이런 태도는 사용자 층의 확장으로도 연결된다. 당장 나만 해도 누군가 '레즈비언 캐릭터가 활약하는 게임과 제작자가 페미니즘을 불온한 것으로 여기고 사상 검증에 나선 게임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당연히 전자를 고를 것이다. 블리자드는 심지어 게임에 별로 관심도 없는 나를 PC방 의자에 앉도록 만들기도 했다.

 게임 오버워치 속 여성 캐릭터 '트레이서'는 성소수자로 알려졌다. 지난 2016년 12월 제작사 '블리자드'가 공식 발표한 카툰에서 트레이서가 여성 연인과 키스하는 장면이 공개된 바 있다.

게임 오버워치 속 여성 캐릭터 '트레이서'는 성소수자로 알려졌다. 지난 2016년 12월 제작사 '블리자드'가 공식 발표한 카툰에서 트레이서가 여성 연인과 키스하는 장면이 공개된 바 있다. ⓒ 블리자드


결론적으로 김학규 대표와 같은 행보는 당장의 주 사용자층의 반발을 진화하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이용자 폭의 축소와 이로 인한 퇴보라는 결과를 만들어낼 것이다. 부흥하는 젠더 평등 운동과 인권 감수성이 발전될 세상에서 여성주의를 배척하는 사람과 게임들은 도태될 것이라고 나는 감히 예상한다. 이것은 단순한 걱정도 우려도 아니다. 시대의 흐름을 무시하지 말라는 강력한 경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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