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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의 항쟁이 본격화되던 7세기, 한반도는 동북아 국제전의 현장으로 비화되었다. 백제와 고구려, 여기에 왜까지 끌어들여 신라를 포위한 가운데 신라는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당나라와의 군사 동맹에 사활을 걸게 된다. 이러한 한반도의 정세 변화 속에 당나라와의 외교 협상을 주도했던 이가 김춘추(태종무열왕, 이하 무열왕)였다.

무열왕(재위 654~661)은 한국사에 있어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인데, 특히 많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는 부분은 외세를 끌어들여 백제를 멸망시킨 행적과 관련한 부분이다. 하지만 그때는 지금처럼 민족이라는 개념이 자리 잡히지 않았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이런 관점이라면 같은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백제와 고구려가 서로 대립하고, 백제 개로왕이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쳐줄 것을 요청한 것 역시 비난 받아야 할까?

신라와 백제 간의 싸움은 이제 누구 하나가 망해야 끝날 정도로 골이 깊어져 있었다는 점과 당시 국제질서에서 백제와 고구려, 왜가 서로 손을 잡고 신라를 압박했던 상황이었기에, 신라 역시 여기에 대항하는 세력을 형성한 것이 바로 당나라였던 셈이다.

따라서 생존을 위한 선택에 대해 '민족의 배신자'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은 다소 과하다고 할 수 있다. 오늘은 이러한 신라 중대의 시작을 알리는 무열왕의 시대와 백제 멸망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중심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폐위된 왕의 손자에서 다시 권력의 핵심으로

무열왕의 가계를 살펴보면 진흥왕의 차남인 진지왕이 무열왕의 할아버지에 해당한다. 진지왕은 왕위에 오른 지 4년 만에 '황음정란(荒淫政亂)'을 명분으로 폐위되었다. 이러한 진지왕의 아들이 용춘(龍春, 혹은 용수)인데, 용춘과 진평왕의 첫째 딸인 천명 공주와 혼인해서 낳은 아들이 바로 무열왕이다. 무열왕은 폐위된 왕의 손자였기에 폐쇄적인 신라의 신분제도에서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없는 인물이었다.

경주 무열왕릉, 비석을 통해 피장자가 확인된 경우로 신라왕릉 연구에 있어 기준점이 되고 있다.
▲ 무열왕릉 경주 무열왕릉, 비석을 통해 피장자가 확인된 경우로 신라왕릉 연구에 있어 기준점이 되고 있다.
ⓒ 김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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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당시 성골의 신분은 덕만 공주와 승만 공주가 유일했기 때문에, 성골의 혈통은 진덕여왕을 끝으로 끊어지게 된다. 바로 이러한 시대에 무열왕은 김유신과 손을 잡고, 권력의 핵심으로 등장하게 된다. 무열왕과 김유신의 관계는 단순히 왕과 신하의 관계가 아니라 평생의 동지라는 표현이 정확한데, 둘 사이는 혈연적으로도 이어졌다.

무열왕의 가족사는 곧 신라의 역사와 다를 바 없는데, 무열왕의 왕비는 김유신의 누이동생인 문명왕후(문희)로, 김유신의 지원을 등에 업은 무열왕은 새로운 권력과 권위를 창출했다. 무열왕은 문명왕후와의 사이에서 아들인 김법민(=문무왕)과 김인문을 낳았는데, 이 두 사람은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는데 있어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642년 8월, 신라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대야성이 함락되면서, 무열왕의 사위인 품석과 딸인 고타소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에 무열왕은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갖고, 백제에 맞서기 위해 고구려와 '왜'와의 협상을 벌였다. 하지만 큰 성과를 얻지 못했고, 오히려 죽령 이북의 땅을 내놓으라는 고구려의 입장을 거부하면서, 투옥 당하는 시련을 맞이하기도 했다.

결국 마지막으로 남은 선택지인 당나라로 이동해 당 태종과의 협상 끝에 서로 손을 잡는데 합의하게 된다. 이는 서로 간에 이해관계가 일치했기 때문인데 당은 고구려를 정벌하는데 있어 신라를 배후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과 신라로서는 백제를 제거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나당 군사동맹으로 발전되어 역사의 변곡점을 맞이하게 된다.

부여 나성, 백제의 도읍인 사비성의 외곽을 방어하는 시설로 660년 나당 연합군의 침공에 함락 당했다.
▲ 부여 나성 부여 나성, 백제의 도읍인 사비성의 외곽을 방어하는 시설로 660년 나당 연합군의 침공에 함락 당했다.
ⓒ 김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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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백제와 고구려의 압박에 신라는 멸망에 가까울 정도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고, 이러한 위기감이 나당연합군으로 결실이 맺어졌다. 결국 660년 6월, 결국 18만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 사비성이 함락되고 이후 웅진성으로 피신했던 백제 의자왕이 항복하면서 백제는 그렇게 무너졌다. 지난날 사랑했던 딸 고타소의 죽음 앞에 백제를 반드시 멸하겠다고 다짐했던 무열왕의 한이 현실이 된 것이다.

백제가 멸망한 이듬해 무열왕은 세상을 떠나게 되고, 그의 아들인 법민이 왕위를 이어받으니 이가 문무왕(재위 661~681)이다. 무열왕이 활동한 시기는 삼국의 항쟁 가운데 가장 치열하고, 전략적이었으며, 외교적으로 복잡한 함수를 지녔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시대는 이전과 다른 형태의 새로운 전장, 외교라는 무대에서 그 능력을 발휘했다고 볼 수 있다.

문경에 위치한 당교사적지, <삼국유사> 태종 춘추공 편에 김유신이 짐독을 먹여 소정방과 당나라 군사를 죽이고 묻었다고 전한다.
▲ 당교사적지 문경에 위치한 당교사적지, <삼국유사> 태종 춘추공 편에 김유신이 짐독을 먹여 소정방과 당나라 군사를 죽이고 묻었다고 전한다.
ⓒ 김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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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무열왕을 태종무열왕으로 칭하고 있는데, 여기서 '태종(太宗)'은 창업에 버금가는 위업을 달성했다는 의미와 함께 기존의 불교식 왕호를 버리고, 중국식 묘호를 받아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담이지만 당나라에서 태종의 묘호와 관련해 신라에 시비를 걸었는데 여기에 대해 신라는 가볍게 무시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비석의 명문을 통해 피장자가 규명된 무열왕릉

신라가 중대에 접어들며 묘제 양식에서 이전과 다른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는 능묘를 조성할 때 피장자의 업적을 담은 비석을 세우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새로운 변화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비석을 세우는 것이 비단 왕릉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동시대를 살았던 김유신의 묘에도 비석이 세워졌고, 김인문의 묘에도 비석이 설치되었다.

태종무열왕릉비, 비문은 사라지고 없으며 현재 귀부와 이수가 남아있다. 이수의 중앙에 명문을 통해 무열왕릉인 것이 확인되었다.
▲ 태종무열왕릉비 태종무열왕릉비, 비문은 사라지고 없으며 현재 귀부와 이수가 남아있다. 이수의 중앙에 명문을 통해 무열왕릉인 것이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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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문무왕릉을 비롯하여 성덕왕릉에도 비석이 세워지는 것을 볼 수 있어 이 시기 비석을 세우는 것이 보편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왕릉 가운데 무열왕릉이 중요한 지점도 여기에 있다.

무열왕릉은 비석을 통해 피장자가 확실하게 인정이 되는 경우로, 비석의 비문은 사라지고 없지만 이수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 명문이 남아 있다. 신라왕릉 가운데 최초로 당대의 기록을 통해 고증이 된 경우다.

이처럼 확실한 왕릉으로 인정이 되다 보니, 무열왕릉은 신라왕릉의 위치 비정에 있어 기준점이 되고 있다. 무열왕릉의 장지 기록과 관련해 <삼국사기>에는 '영경사(永敬寺)' 북쪽이라고 했으며, <삼국유사>에는 '애공사(哀公寺)' 동쪽에 장사를 지내고 비석을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추사 김정희 역시 영경사 북쪽과 서악리를 동일하게 보고, 서악동 고분군 중 하나를 진흥왕릉으로 추정했으며, 고 이근직 교수나 김용성 박사 등의 연구자들도 애공사와 영경사를 동일한 사찰 내지는 시간의 변화에 따라 명칭의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무열왕릉의 주위 돌출된 괴석, 봉토가 무너져 내리면서, 호석의 일부가 돌출된 모습이다.
▲ 무열왕릉 무열왕릉의 주위 돌출된 괴석, 봉토가 무너져 내리면서, 호석의 일부가 돌출된 모습이다.
ⓒ 김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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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무열왕릉의 외형은 원형 봉토분으로 능의 주위로 괴석이 돌출되어 있는데, 이러한 괴석은 봉토의 흙이 무너져 내리면서 호석의 일부가 돌출된 형태로 추정된다. 한편 무열왕릉을 중심으로 뒤로는 서악동 고분군이 일렬로 조성되어 있으며, 무열왕릉의 아래에 김양의 묘와 김인문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무열왕릉의 배장 묘로 추정되는 김양과 김인문의 묘는 현재 도로로 인해 단절된 모습이지만, 본래 하나의 능역으로 조성이 되었다. 지금도 무열왕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신라에 있어 새로운 창업주에 비견되는 무열왕의 존재는 결코 가벼워 보이지는 않는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본인의 저서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 신라왕릉답사 편>의 내용을 토대로 새롭게 작성한 글입니다.



태그:#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신라왕릉, #무열왕릉, #김춘추, #김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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