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우리에게 중요한 키워드가 되어버린 보안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라는 매개체를 통해 좀 더 쉽고 재미있게 다뤄보고자 한다. [편집자말]
 <히든피겨스> 스틸 샷

<히든피겨스> 스틸 샷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올 3월에 개봉한 <히든 피겨스>는 관객들의 호평을 받으며 45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히든 피겨스>는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이 극심했던 미국의 1960년대를 배경으로 NASA에서 온갖 차별을 받으면서도 미국 최초의 우주인을 만드는 데 공을 세운 3명의 흑인 여성의 실화를 다룬 작품이다. 영화에는 우주 항공역사를 바꾼 수학자 캐서린 고블린과 NASA최초의 여성 프로그래머 도로시 본 그리고 NASA 최초의 흑인 여성 엔지니어 메리 잭슨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영화는 흑인 여성 작가 마고 리 셰털리가 쓴 동명의 논픽션을 원작으로 하고 있으며, <히든 피겨스>는 89회 미국 아카데미에서 작품상 등 3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며 작품성을 인정받은 작품이다. 제작비 2500만 달러가 투여된 이 작품은 북미에서 2주 연속 박스오피스 정상을 차지하며 북미에서만 1억 6938만 달러의 극장수입을 거두며 '흥행 대박'을 거두었다.

감독은 <세인트 빈센트>로 주목받았던 데오도르 멜피이다. 그는 <스파이더맨 홈커밍>의 감독직을 걷어차 버리고 이 영화를 선택했는데, 이유는 딸에게 들려주고 싶은 영화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필자에게도 딸이 있다면 꼭 보여주고 싶은 작품이기도 하다.

흑인 여성이 받아야 했던 삶의 무게, <히든 피겨스>

이 영화는 지적이고 유쾌한 웃음과 묵직한 감동 그리고 가슴에 새겨도 좋을 메시지들로 중무장하고 있다. 심지어 로맨틱한 면도 가지고 있다. <히든 피겨스>는 미국 최초의 우주인을 탄생시켰던 역사적 사건을 다루며 우리가 미처 몰랐던 숨은 뒷이야기를 알아가는 것과 그 과정이 주는 지적인 즐거움을 동시에 제공한다. 여기에 유머러스한 배우들의 연기와 위트있는 연출이 시너지를 발산하며 유쾌함도 장착하고 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매력은 감동을 동반하고 있는 메시지다.

영화는 여성의 권리와 인종차별 문제가 극에 달했던 1960년대 초반의 공기를 고스란히 담아낸다. 당시 미국사회는 화장실마저 '백인 전용'과 '유색인종 전용'으로 구분짓던 시기였다. 영화에서도 캐서린이 일하던 건물엔 유색인종 전용 여자화장실이 없었던 탓에 그녀는 800미터나 떨어진 건물에 가서 일을 봐야 했다.

또한 캐서린의 상사 폴 스태포드는 미 국방부와의 회의에 여자가 참석한 적이 없다는 이유로 그녀의 참석을 저지했으며, 보고서 작성자인 그녀가 일개 전산원이란 이유로 보고서에 캐서린의 이름을 제외하기도 한다. 10년 동안 일하며 슈퍼바이저에 해당하는 업무를 하고 있음에도 도로시는 승진에 항상 누락되고 있으며, '백인 섹션'에서 책을 고르려 했다는 것만으로 백인 경비원에 의해 도서관에서 쫓겨나기도 한다.

여성 엔지니어를 꿈꾼 메리 잭슨의 경우 수학과 물리학 학위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갑자기 NASA가 엔지니어가 되기 위한 필수 조건으로 백인들만 입학 가능한 고등학교 수업을 이수해야 한다고 규정을 바꿔 그녀의 진입을 막아선다.

당시 이러한 흑인 여성의 처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캐서린이 알 해리슨팀에 배정받았던 첫날, 야근을 마친 뒤 건물 통로 대리석 벽에 잠시 기대며 한숨을 쉬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대리석 벽에는 캐서린의 추가적인 실루엣들이 잡히는데, 당시 흑인여성으로서 받아야 했던 삶의 무게가 훨씬 컸음을 표현하고 있다

 <히든피겨스> 스틸 샷

<히든피겨스> 스틸 샷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이렇게 흑인과 여성으로서 극심한 차별 속에서도 그녀들은 작은 기회들을 놓치지 않고 열정과 실력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해나간다. 이 영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순간은 '메리 잭슨'이 자신의 백인 고등학교 입학을 허가받기 위해 법원에서 판사에게 버지니아에서 흑인여성을 최초로 백인 고등학교에 입학시킨 최초의 판사가 되라며 설득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잘못된 사회 규범 속에서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거부당해 쉽게 포기할 것이 아니라 전례가 없다면 역사에 남을 최초가 되라는 이야기를 하며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쓸모없는' 연구데이터, 과연 그냥 버려도 될까?

영화 리뷰는 이쯤 하고 '영화 속 보안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영화에서 보안이야기를 끄집어내고 싶은 장면은 다소 의외일 수 있다. 캐서린(타라지 P. 헨슨)이 알 해리슨(케빈 코스트너)이 이끄는 스페이스 태스크 그룹에 배정받고 백인 남성들로 우글거리는 사무실에서 일을 하게 된다.

그녀는 그곳에서 연구원들이 만든 데이터를 검토하는 역할을 맡는다. 캐서린은 야근까지 하고 늦은 시간 알 해리슨에게 검토한 데이터를 넘기지만 알 해리슨은 상황이 달라져 그 데이터는 쓸모가 없어졌다며 보지도 않고 버리라고 이야기한다. 캐서린이 어리둥절해 하자 친히 캐서린에게서 자료를 건네받아 쓰레기통에 던져버린다.

 <히든피겨스> 스틸 샷

<히든피겨스> 스틸 샷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근데 정말 쓸모가 없어진 실패한 연구 데이터는 그렇게 버려도 될까?

천만의 말씀이다. 실패한 연구 데이터이기에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 정보라 할지라도 그것이 유출되어 경쟁사가 입수하면 경쟁사는 개발과정에서 시간을 단축할 수 있으며, 다른 분야에 응용될 수 있어 그들에겐 매우 유용한 정보가 될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을 '소극적 정보(Negative information)'라고 부르며 또한 그 실패한 정보들이 장래에 충분히 경제적 가치를 지닐 수 있다고 판단되면 영업비밀로 보호받을 수 있다.

실제로 영업활동에 이용되지 않은 개발 단계에 머문 정보일지라도 영업비밀로 볼 수 있다고 판시한 사례(사건번호: 대법원 2008. 2. 15. 선고 2005도6223 판결)가 있다. 광 반도체 LED를 생산하는 A회사 직원 2명이 제품화되지 않은 기술정보와 경영정보를 가지고 경쟁사에 취업한 사건이 발생했고, 당시 그들은 절도와 부정경쟁방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었었다.

소송 당시 피고인들은 문제가 된 자료들은 A회사에서 제품화 되지 않은 정보들로 A회사에 유용한 정보들이 아니며, 이론적으로만 성립 가능한 것일 뿐 실제 생산에 적용할 수 없는 자료들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해당 자료는 생산기술과는 상관없이 누구나 샘플만 확보하면 실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자료로써 시제품 실험 결과를 집계한 것에 불과한 것이므로 영업비밀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법원은 그들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앞서 서술한 대로 실패한 데이터는 직접적으로 유용하다고 보긴 어렵지만 경쟁사가 이 정보들을 입수하여 사용할 때 동일한 실패를 하지 않아도 되고 그 자료를 기초로 하여 빠른 시일 내에 개발을 할 수 있어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연구개발비, 시간 등을 절약할 수 있으므로 해당자료는 독립적인 경제적 유용성을 지니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영업비밀의 요건에는 비공지성과 경제적 유용성 그리고 비밀관리성이 성립되어야 하는데, 영화 속 알 해리슨처럼 정보를 버리게 되면 '비밀 관리성'을 상실하게 되고 당연히 영업비밀로 인정받기 어렵다. 따라서 오랜 시간을 인력과 비용을 투자해 얻는 자료가 경쟁사에 유출되어 경쟁상 우위를 잃어버린다 해도 손해배상청구 등의 법적 조치를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워진다.

따라서 기업과 연구기관의 보안담당자들은 연구원들이 실패한 데이터를 소홀히 관리하지 않게 기업의 정보자산으로 등록시켜 영업비밀로 관리해야 한다. 또한 영업비밀의 보유 증명을 위해 원본증명서비스(영업비밀보호센터)와 기술임치서비스(기술자료임치센터)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

실패한 정보들을 영업비밀로 보호하는 것은 단순히 유출 시 경쟁사에 이득을 막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실패한 데이터는 충분히 자체적으로 활용이 가능하다. 그것들을 적절히 내부에서 공유해 또 다른 실패를 방지하고, 더 나아가 다양한 실패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연구개발에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패학'의 창시자이자 권위자로 유명한 하타무라 요타로 도쿄대 명예교수는 실패학에 관련된 책들을 여럿 저술하였다. 요타로 교수는 저서를 통해 "사람이 성장하려면 실패는 불가피하다. 실패의 책임을 묻는 게 아니라 실패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집단적인 지혜를 쌓아가자"고 주장했다. 그리고 "성공은 99%의 실패 속 교훈과 1%의 영감으로 만들어진다"고 이야기했다.

이렇게 보면 영화 속 케빈 코스트너는 '쓸모없는 자료를 버린 것'이 아니라 'NASA의 매우 중요한 정보 자산을 버린' 셈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구건우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blog.naver.com/zig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히든피겨스 실패한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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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이의 아빠이자 영화 좋아하는 네이버 파워지식iN이며, 2018년에 중소기업 혁신대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보안쟁이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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