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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선생
 백범 김구 선생
ⓒ 백범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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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눈만 뜨고 살라

우리 속담에 "중매를 세 번 하면 천당 간다" "중매는 잘하면 술이 석 잔, 못하면 뺨이 석 대"라는 말이 있다. 이는 중매라는 게 그만큼 하기도 어려운 일이거니와 또한 상대를 서로 구제하고 한 가정을 이루게 하는 대단히 소중한 일이라는 뜻이 포함된 말일 게다.

나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우연찮게 중매를 세 건 성사시켰으며, 결혼 주례는 스무 번 이상 섰는데 주로 제자들이었다. 참으로 다행한 것은 내가 중매한 세 쌍도, 주례를 선 20여 쌍 부부도, 여태까지 헤어졌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참 고맙게 생각한다. 그래서 간혹 그들로부터 식사 대접은 받은 적이 있지만 다행히 뺨을 맞은 적 없었다.

나는 중매를 하거나 주례를 할 때, 꼭 빠트리지 않고 신신당부하는 말이 있다.

"한 눈만 뜨고 살라."

곧 부부가 '서로의 장점만 보고 살아가라'는 말이다. 아마도 이 말은 부부해로에 금과옥조와 같은 금언일 것이다. 내가 중매했거나 또는 주례를 한 부부는 대체로 이 말을 생활의 좌우명으로 삼고 살았기에, 그들 앞에 닥친 위기를 슬기롭게 넘겼을 것이다. 아마도 내 말 때문에 도중에 헤어지는 일이 없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2005년 여름, 김구팀 자원봉사자였던  주태상, 이선옥씨가 미국 현지에서 결혼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었다. 그래서 3차 방미 때는 이들 부부를 초대해 한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나눈 바 있었다.

그런데 이번 4차 방문 때는 그들 부부의 초대를 받았다. 빡빡한 일정이지만, 이런저런 인연으로 볼 때 초대에 응하는 게 도리였다. 게다가 솔직히 나도 옛 정을 나누던 사람을 다시 만날 때는 '일기일회(一期一會)'란 말처럼 이번이 마지막 만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초대 메일을 받은 그날, 나는 박유종 선생에게 가능한 식사는 바깥에서 하고, 그의 집에서 차만 한잔 나누자고 부탁드렸다. 이튿날 박 선생은 이선옥씨에게 그렇게 전했으나 이번만은 자기 집에서 저녁을 꼭 준비하겠다고, 당신은 이미 주소까지도 전달받았다고 했다.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실 나의 4차 방문 일정은 짧았기에 시차 적응도 할 겨를 없이 도착 다음날 아침부터 곧장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로 출근해 문서 검색작업을 했다. 그렇게 나흘째 작업을 강행하자 눈도 아프고 머리가 빠개지도록 아팠다. 문서 검색작업은 쉬운 일은 아니다. 검색 도중 틈틈이 NARA 경내를 산책해도 그때뿐이었다. 

그런 낌새를 눈치 챈 박 선생은 약속 날짜인 목요일엔 자료 검색을 일찍 끝내고 그들 부부의 집으로 곧장 가자고 권했다. 그러면서 당신도 가능한 밤 운전을 피하고 싶다는 말씀을 했다. 그래서 우리는 애초 약속 시간보다 두어 시간 일찍 일을 마치고 NARA를 출발했다. 그들 집은 메릴랜드주 엘리코트시티에 있었는데, 박 선생은 초행길이지만 금방 집을 찾았다. 미국 주택들은 집 앞에 주소가 큼지막하게 적혀 있기에 찾기 아주 편리했다.

그들의 집은 아주 훌륭했다. 그들 부부는 지난날 가수 남진의 <님과 함께> 노랫말처럼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딸 아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부엌에서 일하던 이선옥씨가 차 소리를 듣고 후딱 뛰어나왔다. 그는 아이들과 남편은 학원에서, 직장에서 곧 돌아올 거라면서 우리를 거실로 안내했다.

우리는 그 집 거실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며 저녁준비를 하는 이선옥씨와 이런저런 정담을 나눴다. 나는 그때까지 잘 몰랐고, 궁금했던 점을 물어봤다.

"두 분, 나를 만나기 전에 서로 알던 사이였나요?"
"아니에요, 선생님. 전혀 몰랐어요. 저희는 김구팀에서 처음 만났어요. 두 분(권중희 선생과 필자) 선생님이 귀국한 뒤, 어느 날 주태상씨가 저에게 슬쩍 골프를 가르쳐주겠다고 불러내더군요. … 그래서 … 그렇게 됐어요. 1년 후인 2005년에 결혼했어요."

그렇다면 나는 이들 부부 만남에 간접 중매를 한 셈으로, 이들 부부는 결국 백범 선생님이 맺어준 천생배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결혼한 지 12년 만에 이렇게 넓은 대지(2에이커라고 한다) 2층집에서 네 식구가 단란하게 사는,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그들 부부에게 나는 중매쟁이로 저녁 한 끼는 대접받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런 말을 하자 이선옥씨는 기다렸다는 듯 화답했다.

"미국에 오실 때마다 저희 집에 꼭 오셔야 해요. 저흰 박 선생님, 권중희 선생님 그리고 백범 선생님을 평생 잊을 수가 없지요."

콩나물국밥

곧 주태상씨가 직장에서 돌아왔다. 10여 년 만에 만났지만 어제 본 듯 낯이 익었고 마치 헤어진 가족을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우리는 악수만으로 부족해 서로 얼싸안았다. 이어서 학원에 갔던 딸 민지(13)와 승민(11)이도 돌아왔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모두 우리말이 유창했다. 나는 국어교사 티를 버리지 못하고 그 점을 칭찬하자 주태상씨는 아내의 공으로 돌렸다. 그러면서 동포 2세들 가운데 우리말과 우리 문화에 익숙한 사람이 취업도 더 잘 된다는 실용적인 이야기도 해줬다.

이선옥씨가 우리를 위해 애써 장만한 그날 저녁 메뉴는 '콩나물국밥'이었다. 거기다가 자기네 텃밭에서 손수 가꿨다는 풋고추 그리고 열무김치로 식단을 차렸다. 그동안 나는 출국 후 양식만 먹다가 콩나물국밥에 풋고추를 날된장에 찍어 먹자 속이 후련해졌다. 동행한 박 선생도 콩나물국밥 뚝배기의 국물까지 다 비운 뒤, 밥상에 남은 풋고추는 비닐봉지를 얻어 포장한 뒤 당신 주머니에 넣었다.

식사 후 나는 그들 부부와 차담을 나누면서 밥값으로 덕담을 했다.

"그동안 사느라 고생하셨소. 행복한 때일수록 더욱 겸손하시오. 그래야 행복이 오래 간답니다."
"네, 선생님."
"부부해로의 비결이오. 한 눈만 뜨고 사시오."
"네, 선생님. 그 말씀 두고두고 명심하면서 살겠습니다."

그들 부부는 마치 결혼 주례사를 듣는 것처럼 공손히 대답했다. 나와 박 선생은 그들과 차담을 나눈 뒤, 집안을 한 바퀴 둘러본 다음 곧장 귀갓길에 올랐다.

이튿날 샌프란시스코 공항 대기실에서 인천행 환승 비행기를 타고자 10시간을 기다리면서 무료함을 잊고자 노트북을 꺼냈다. 그러자 아래와 같은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박도 선생님, 안녕하세요. 어제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만나 뵙게 되어 너무 좋았습니다. 두 분 선생님을 보내드리고 나서 정말 아쉬운 마음이 매우 커서 혼났습니다. 아직도 마음 한 구석은 아련합니다.

조금 더 함께 하고 싶었지만, 박유종 선생님께서 밤길 운전하시는 것이 걱정되고, 또 박도 선생님도 너무 피곤한 시간대이기에 보내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희 집 방문해 주셔서 정말 감사하고, 두 분 선생님 항상 건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언제인가 다시 만날 날이 또 오겠지요? 저희 예쁘게 잘 살고 있고, 앞으로도 잘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2017년 10월 27일 이선옥 드림."

나는 샌프란시스코 공항 대기실에서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그들 두 부부의 건강과 백년해로를 빌었다. 하늘에 계신 백범 선생도, 권중희 선생도 그들 부부의 건강과 행복을 빈다고 반짝 신호를 보내는 듯했다.

백범의 생애 중 가장 단란했던 상하이 시절로, 아내 최준례 여사와 큰아들 인(仁)과 함께 사진관에서 기념촬영을 하다(1920년대 초로 추정).
 백범의 생애 중 가장 단란했던 상하이 시절로, 아내 최준례 여사와 큰아들 인(仁)과 함께 사진관에서 기념촬영을 하다(1920년대 초로 추정).
ⓒ 백범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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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무명베 같은 삶

몇 해 전, 한 대학신문사의 보도에 따르면 학생들에게 복제하고픈 인물을 설문 조사한 바, 백범 김구 선생이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나 역시 언제 어디서나 백범 선생의 사진이나 동상을 대할 때면 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옷깃이 여며진다. 왜 많은 사람들은 백범 선생에게 머리를 조아릴까?

<백범일지>를 보면,  선생은 어렸을 때 수두를 앓았는데 당신 어머니가 예사 부스럼 다스리듯 죽침으로 고름을 짜낸 탓으로 얼굴에 마맛자국이 남았다고 한다.

선생은 소년 시절 청운의 뜻을 품고 공부를 해서 과거를 보고자 임진년 해주에서 거행되는 경과(慶科, 당시 과거제도)에 응시코자 과장에 갔다. 그런데 글도 모르는 부자들이 큰선비의 글을 몇백 냥, 몇천 냥에 사고파는 부패한 현장을 목격하곤 벼슬길을 단념했다. 그후 입에 풀칠이라도 하고자 풍수와 관상 공부를 했다.

선생은 석 달 동안 두문불출, 관상 공부를 하면서 거울을 앞에다 두고 먼저 자신의 상을 살펴봤다. 자신의 얼굴을 아무리 뜯어보아도 천격(賤格)인데다가 빈격(貧格)에 흉격(凶格)이었다. 선생은 자신의 상을 알고 난 뒤 비탄에 빠졌다. 세상 살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그런데, 관상 책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상호불여신호 신호불여심호"(相好不如身好 身好不如心好)

이는 "얼굴이 좋은 것이 몸이 좋은 것만 못하고, 몸이 좋은 것이 마음이 좋은 것만 못하다"는 말이다. 선생은 이 글귀에 용기를 얻어 '얼굴 좋은 사람보다 마음 좋은 사람이 돼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고 한다.

백범은 미남이 아니었다. 만년의 백범 모습도 그저 수수한 시골 할아버지 상이다. 그런데도 수많은 백성들이 백범을 우리나라 현대사 가운데 가장 존경하고 흠모하는 인물로 꼽는다. 그것은 바로 그분의 인품, 사상, 인생 역정 때문이다. 그분의 삶이 조선의 무명베처럼 고결했기 때문에 많은 백성들이 선생을 추앙하는 것이다.

"내 호 연하(蓮下)를 '백범(白凡)'이라 고친 것은, 곧 '백정(白丁)의 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인천감옥) 복역 중 뜰을 쓸 때나 유리창을 닦고 할 때는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하였다. '우리도 어느 때 독립정부를 건설하거든, 나는 그 집의 뜰을 쓸고, 창호(窓戶, 창문)도 닦는 일을 해보고 죽게 해달라'고." - 도진순 주해 돌베개 간행 <백범일지> 267쪽

백범이 어머니와 함께 두 아들을 데리고 아내 무덤을 찾았다.
 백범이 어머니와 함께 두 아들을 데리고 아내 무덤을 찾았다.
ⓒ 백범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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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보(業報)

<백범일지>와 백범 사진, 글씨들을 두루 섭렵하면서 가장 내 마음을 울렸던 것은 전 가족이 아내 무덤을 찾아가 묘비 옆에서 찍은 사진이다. 아내 최준례 여사의 묘비는 독립운동가이며, 한글학자인 김두봉 선생이 쓴 것으로 연대를 한글 자음으로 표기한 것이 특이하다.

백범은 49세에 아내를 떠나보냈다. 이후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재취(再娶, 재혼)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당신은 이후 줄곧 환부(鰥夫, 홀아비)로 생을 마쳤다. 임정의 다른 분들에게는 중매도 서고, 살림방도 차려주면서.

"나는 민국 6년(1924년) 처를 잃었고, 7년에는 모친께서 신을 데리고 고국으로 가셨다. 그 후 상해에서 나 혼자 인을 데리고 지냈는데, 모친의 명령에 의하여 인마저 본국으로 보냈다. 그림자나 짝하여 홀로 외롭게 살면서, 잠은 정청(政廳, 임시정부 청사)에서 자고, 밥은 직업이 있는 동포들 집에서 얻어먹으며 지내니, 나는 거지 중의 상거지였다." - 위의 책 317쪽

하지만 근현대 지도자 중 백범과는 다른 길을 걸은 이도 있다. 한 믿을만한 재미동포는 필자에게 이승만 전 대통령의 가족사와 관련된,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연을 제보했다.

이승만은 고국의 처자를 전혀 돌보지 않고 해외에서 벽안(碧眼)의 여인과 결혼했다. 고국의 부인은 생활고로 아들을 키울 수 없게 되자 아들을 미국에 보내게 됐는데, 아버지 이승만이 아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그 아들은 보육원에서 지내다가 병사한 것으로 알려졌다는 이야기다.

후일 그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된 후 이기붕 국회의장의 아들을 양자로 들였지만, 4.19 혁명 때 집단 권총 가족자살로 잃었다.

미국 필라델피아 교외의 한 공동묘지에 묻힌 이승만 아들 이태산의 무덤.
 미국 필라델피아 교외의 한 공동묘지에 묻힌 이승만 아들 이태산의 무덤.
ⓒ 제보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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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사례도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고향에서 시부모를 모시고 남편을 학수고대하는 조강지처를 돌보지 않다가 다른 여성과 결혼하고자 조카를 시켜 위자료 한 푼 주지 않고 장인에게 이혼장을 받아오게 했다. 그런 뒤 잉크도 마르기 전에 훌쩍 새장가를 갔다.

나의 할아버지 고향이 선산군 도개면 도개동(현 구미시 도개면 도개동)인 바, 바로 박정희 대통령 첫 부인 친정마을이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도개마을 할머니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귀에 익도록 들어왔다.

구미시 도개면 도개마을로 박정희 전 대통령 첫부인의 친정마을이다. 사람의 팔자를 따라 이 마을도 박복하여 거의 변화가 없는, 개발에서 소외된 옛 모습 그대로였다. (2012. 5. 3. 촬영)
 구미시 도개면 도개마을로 박정희 전 대통령 첫부인의 친정마을이다. 사람의 팔자를 따라 이 마을도 박복하여 거의 변화가 없는, 개발에서 소외된 옛 모습 그대로였다. (2012. 5. 3. 촬영)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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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기사 : 일선교의 봄, 사람은 가고 강물만 흐른다]

조갑제 기자가 쓴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제2권 244쪽과 369쪽에도 그때의 상황을 자세히 뒷받침하고 있다. 몇 해 전, 그때의 조카 아들과 그 조카 동생의 아들, 곧 사촌간 칼부림 살인사건으로, 그 진상에 대한 세상사람들의 의혹을 사고 있다.

결국 두 정치지도자 모두 "조강지처(糟糠之妻, 몹시 가난하고 천할 때에 고생을 함께 겪어 온 아내)를 내치면 잘된 집이 하나도 없다"는 옛말처럼 끝이 좋지 않았다. 그들은 권력이나 금력으로 인간 세상의 윤리와 법망을 용케 피했지만, 끝내 '하늘의 그물'은 피하지 못한 것으로, 이는 그 일을 저지른 이의 '업보(業報)'라 하겠다.

정치지도자의 비도덕성과 비윤리적인 처사는 나라의 수치로 기록하기조차 민망하다. 사실, 나는 이 글을 여기까지 쓰는 데도 다른 기사와는 달리 많은 고심과 용기가 뒤따랐다. <법구경>에 나온 말이다.

"남의 허물은 보기 쉬워도 자기의 허물은 보기 어렵다. 남의 허물은 보지 말라. 남이 했건 하지 않았건 상관하지 말라. 다만 내 자신이 저지른 허물과 게으름만 보라."

하지만 누군가 지도자의 비도덕성과 허물도 사실대로 기록으로 역사에 남겨야 이후에 똑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을 것이며, 후세 사람들에게 경계(警戒)나 교훈이 될 것이다.

'무지는 죄악의 근원'

지금은 왕조시대가 아닌 민주주의 시대다. 정치지도자의 도덕성과 윤리성은 백성들의 본보기가 돼야, 백성들도 이를 본받게 되고, 나라도 안정되는 시대다.

'무지는 죄악의 근원'이다. 이제라도 백성들은 뭘 좀 알고 정치지도자를 추앙했으면 좋겠다. 특히 아직도 콩과 보리도 분간치 못한 채 선글라스를 끼고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드는 분들과 그들을 부추기는 미욱한 세력이나 무리들에게 한 산골 퇴역 훈장이 드리는 고언(苦言)이다.

"도덕적인지 못한 개인이나 집단, 나라는 패망하기 마련이다."

더 이상 이 나라를 마피아 집단과 같은 이들에게 무참히 짓밟힌, 도덕과 윤리가 유린된 나라로 만들지 말자.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 백범의 동지로, 백범 부인의 묘비명을 써줬던 한글학자 김두봉 선생 사진을 마침 4차 방미 때 귀하게 입수해 이번 회에 싣는다. 아마도 백범 선생도 1948년 4월 남북 제정당 연석회의 4김 회담(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 때 이후 처음으로 대하는 김두봉 동지 사진으로 무척 반기실 듯하다. 나머지는 기자가 그동안 NARA에서 입수한 남측, 북측의 선전벽보와 삐라다.

나는 이들 선전물을 검색 스캔할 때, "두 손뼉이 맞아야 소리가 난다"는 속담과 '피장파장'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어느 날 갑자기 강대국이 그은 선 양편에서 백성들이 아직까지 서로 욕하고 총질하는,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이기도 하다.

한글학자 김두봉 선생(북조선 노동당중앙학교 제4기 1년 갑을반 졸업기념사진첩에서)
 한글학자 김두봉 선생(북조선 노동당중앙학교 제4기 1년 갑을반 졸업기념사진첩에서)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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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에 뿌려지는 삐라들
 전선에 뿌려지는 삐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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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측 선전물]

남측 선전물 1
 남측 선전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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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측 선전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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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측 선전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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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측 선전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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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측 선전물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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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측 선전물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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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측 선전물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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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측 선전물]

북측 선전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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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측 선전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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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측 선전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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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측 선전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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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측 선전물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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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측 선전물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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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측 선전물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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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 이번 회 기사 작성에는 전 백범기념관 홍소연 자료실장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 박도 엮음 눈빛출판사 발간 <미군정 3년사>가 출시될 예정입니다. 1945~1948 미군정기의 '덮어버린 역사' '묻어버린 역사'를 저와 눈빛출판사가 글과 사진으로 정리하여 펴낸 방대한 책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태그:#백범 김구, #이선옥 주태상, #박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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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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