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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10년의 서울살이와 직장생활을 내려놓고 제주에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습니다. 서른일곱 살 늦은 나이에 '육아'의 세상에 갑자기 던져져 온갖 추태를 보이며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육아 중인 모든 이들에게, 이렇게 웃기고도 모자라게 육아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으로 위안을 드리기 위해 좌충우돌 육아일기를 연재해보려 합니다. - 기자 말

아이가 70일쯤 되면서 업기 시작했다. 도통 누워서 자지 않는 아이로 인해 업고 집안일을 했다.
▲ 포대기의 날들 아이가 70일쯤 되면서 업기 시작했다. 도통 누워서 자지 않는 아이로 인해 업고 집안일을 했다.
ⓒ 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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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일의 기절'(관련 기사: "우리 아기는 통잠 자요" 나만 못난 엄마인 걸까)을 맞은 후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다. 통통해지고, 또 그만큼 무거워졌다. 여전히 낮잠은 깰 때까지 안겨서 자고, 밤에는 '쭈쭈'를 찾느라 수시로 깼다. 나는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막노동꾼처럼 '에구구' 하며 곡소리를 냈다.

100일도 되기 전에 10kg을 향해 달려가는 아이로 인해 나는 일찌감치 '포대기'를 사용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똑똑맘(똑똑한 엄마)'들은 최대한 늦게 사용하라고 했지만, 내 두 팔은 자는 내내 매달려 있는 아이를 감당하지 못했다. 150cm를 턱걸이로 넘기는 '완소(완전 소형)' 키를 지닌 나는 출산하고 더 쪼그라들었다.

포대기는 팔다리의 자유를 허락해주었다. 나는 자는 아이를 업고서, 빨래를 개거나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육아서적에는 아이를 업고 집안일을 하지 말라고 나와 있던데, 책의 매뉴얼대로, 똑똑맘의 조언대로 애를 절대로 키울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수차례 시행착오를 통해 천천히 알아갔다. 

<도깨비>는 나의 힘

서울에서 자취 생활할 때부터 결혼해 사는 지금까지 10년이 넘도록 우리 집엔 텔레비전이 없었다. 애정하는 프로그램 두어 개만 인터넷을 통해 봤고, 나머진 볼 시간도 없었다. 드라마를 안 본 지도 꽤 오래됐다.

무거운 아이를 매달고 집안일 외에 할 수 있었던 것은 '드라마 시청'이었다. 아이의 낮잠 시간이 될 때마다 나는 드라마를 조금씩 보았다. 당시 내가 열혈 시청하던 드라마는 tvN에서 방영하는 <도깨비>였는데, 정말이지 <도깨비>는 어깨가 쪼개지는 아픔을 견디게 해주었다. 아이의 낮잠 시간을 사랑으로 버틴 것이 아니라 공유와 이동욱의 힘으로 견뎠다. <도깨비>가 끝나고는 KBS 2TV 드라마 <김과장>이 고통의 시간을 위로해주었다. 이 자리를 빌려 두 드라마에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아이는 300일이 지나서야 누워서 낮잠을 자기 시작했다. 수면교육 없이 기다림으로 버텨낸 시간이었다. 트림을 못 시켜 애먹던 때, 아이의 이상한 용쓰는 소리에 잠 못 이룰 때, 밤중 수유 때문에 미칠 것 같을 때마다 나는 잠 못 이루며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많은 엄마들이 공감하고 댓글을 달아주었다. 제주에서 홀로 육아를 하고 있는 내겐 SNS에 달린 지인들의 댓글이 무척 큰 위로였다. 육아 수다는 정말 끝이 없다. 남자들의 군대 이야기와 비슷하다. 나는 육아 동지인 엄마들의 '간증'에 힘도 얻고 '전우애'도 느꼈다.

그런데 페이스북 글에는 항상 빠짐없이 달리는 출산 선배들의 댓글이 있었다.

"옛날 생각난다. 그런데 진희야, 그때가 제일 좋고 편할 때야…."

기저귀를 가는 건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 뒤집기의 나날 기저귀를 가는 건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 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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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 선배의 말에 의하면 나는 항상 호시절이었다. 임신 중에도 "그때가 제일 좋을 때", 아이가 누워 있을 때도 "그때가 제일 좋을 때" 아이가 뒤집기를 시작할 때에도 "그때가 제일 좋을 때"였다. 도대체 "제일 좋을 때"는 언제 지나가는 것인가. 나는 "제일 좋을 때"인데 왜 이렇게 힘든 것인가!

아이가 뒤집기를 시작했을 때, 거의 두 달 동안 기저귀를 갈 때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물론 기기 시작하면서 더 힘들어졌다). 밤엔 자다가 뒤집고는 다시 돌려달라고 앵앵거렸다. 그땐 또 트림 못 시켜 안달이던 시절은 까맣게 잊고, 새로운 고민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출산 선배들의 '호시절' 타령이 생각나 피식 웃었다.

'정말 누워만 있을 때가 가장 좋았구나. 왜 그땐 그걸 누리지 못했을까.'

아이가 처음으로 응급실에 간 날

아이가 100일이 지나고 어느 날이었다. 밤 열 시쯤, 품에서 잠이 들었다가도 자꾸만 깜짝 놀라며 일어나는 아이를 남편에게 맡기고, 나는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해 방 한구석에서 새우잠을 자고 있었다.

"여보, 일어나봐."

남편의 사뭇 다른 목소리 톤에 벌떡 일어났다. 아이의 체온이 39.5도를 넘기고 있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처음 겪는 일이라 나는 우왕좌왕했다. 책에서 본 대로 아이의 옷을 벗기고 미지근한 물에 적신 거즈 손수건으로 몸을 닦았는데, 아이는 열이 나는 것보다 엄마의 돌발행동에 더 놀라 울기 시작했다. 당황한 나는 아이를 안았다 눕히기를 몇 번이나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해열제를 억지로 먹였으나 모두 토해냈다. 결국 우리는 밤늦게 응급실로 향했다. 병원으로 가는 동안 나는 자책하며 눈물을 흘렸다. 세상의 모든 불평불만은 사라지고, '아이를 살피지도 못하고 잠을 청했던' 나 자신을 미워하고 원망했다.

가까운 종합병원 응급실에선 아이가 너무 어려서 받아줄 수 없다고 했다. 제주에는 대학병원이 하나뿐이다. 우리는 아이를 데리고 캄캄한 밤길을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울음이 짧은 아이는 어느새 안정을 되찾고 내 젖꼭지를 문 채 어둠 속의 불빛들을 가만히 응시했다.

모든 아픈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던 날.
▲ 아이가 아팠던 날 모든 아픈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던 날.
ⓒ 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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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이 돼서야 대학병원에 도착했다. 난생 처음 가본 응급실엔 아픈 아이들로 넘쳐났다. 응급실이 익숙해 보이는 아이와 부모도 있었다. 공갈 젖꼭지를 입에 문 채 장난감과 놀고 있는 아이를 보고서야 우리는 기저귀 한 장 챙겨오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가 올 2월이었는데, 남편과 나는 맨발에 슬리퍼 차림이었고, 유일하게 손에 쥐고 온 것은 체온계였다.

아이는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약도 없이 스스로 열을 내렸다. 응급실 풍경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우리는 여러 검사를 해야 했지만, 대기 시간이 너무 길어 아이가 힘들어질까 봐 다음날로 소아청소년과 예약을 해놓고 집으로 돌아왔다.

지옥 같은 밤을 보냈다. 정황상 요로감염 증세 같았는데,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 또 인터넷 검색을 폭풍처럼 해대고선 슬퍼졌다. 핵의학이니 소변역류검사니… 요로감염에 관련된 검사는 이름마저도 무시무시했다. 갓 100일 지난 아이에게 이런 검사를 받게 해야 한다니, 너무 가혹했다. 다시 '모든 게 내 탓' 타임이 돌아왔다. 잠 좀 자주 깬다고 아이를 원망의 눈초리로 대했던 지난밤들이 후회스러웠다.

죄책감 가득한 하루를 보내고 이튿날, 대학병원을 가서 소변검사를 했는데, 역시 균이 좀 보였다. 하지만 아이가 열이 나지 않고 너무나 멀쩡히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아서 요로감염 확진이라 말하긴 어렵다며, 약 처방만 받고 돌아왔다. 일주일 뒤인 재검사, 소변은 깨끗해졌다.

감사함과 기쁜 마음으로 병원에서 돌아오던 날, 옛 직장동료와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그녀도 나처럼 늦은 나이에 결혼해 생후 7개월이 된 아이를 키우고 있었다. 그녀는 육아의 기쁨이 밤잠을 이긴다고 말했다. 난 그녀의 마음가짐에 감탄하며, 나는 힘들어서 많이 울었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녀가 말했다.

"난 애가 하도 울어서 내가 울 시간이 없었어."

노이로제에 걸린 엄마

응급실행 이후 한동안 나는 걱정을 달고 살았다. 항생제 부작용으로 아이는 며칠 설사를 했는데, 밤새 기저귀를 쳐다보느라 또 잠을 못 잤다. 아이가 귀찮아하는데도 틈만 나면 체온계를 아이의 귀에 대보았다.

어느 날은 아이의 배 속에서 너무 큰 소리가 났다. 나는 그 뱃소리에 신경 쓰느라 아이가 젖을 물려고 하는데도 젖꼭지를 내어주지 않았다. 아이는 그저 젖꼭지를 물고 싶어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는데, 나는 배가 아파서 아이가 우는 것이라 단정 지어버렸다.

당시 회식 중이었던 남편에게 울면서 전화를 걸었다.

"여보, 아기가 아픈 것 같아. 배에서 엄청 큰 소리가 나."

남편은 회식을 하다 말고 집으로 달려왔다.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남편은 아이를 받아 안았는데, 아이는 갑자기, 기다렸다는 듯 천둥소리를 내며 똥을 싸기 시작했다. 무지막지하게 큰 똥을 누고 생글생글 웃었다. 남편은 허탈하게 웃고는 똥 기저귀를 갈고 다시 회식 장소로 향했다.

"여보 미안해, 내가 아이 아픈 것에 너무 집중하고 있었나 봐."

웃겨서 울고 만 나는 그렇게 남편에게 사죄했다.

오는 10월, 아이가 세상에 나온 지 1년이 된다. 그때 응급실행 이후 감기 한번 앓지 않고 잘 지내가다 며칠 전 '돌발진'(6~15개월 사이의 아기들이 걸리는 바이러스성 발진으로, 고열 외에 특이점은 없고, 열이 내리면 온몸에 열꽃이 피며 자연적으로 낫는 병)으로 고생했다.

고열이 며칠째 계속됐으나, 아이는 잘 먹고 잘 놀았다. 아이가 아프니 또 그렇게 힘들던 밤중 수유가 껌처럼 쉬워졌다. 잠을 제대로 못 자도, 얼른 아이가 나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일주일을 버틴 것 같다.

사나흘 만에 열이 내리면서 또 사나흘은 아이의 보챔에 시달렸다. '액받이 무녀'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다 낫고 나니, 아이는 어느새 훌쩍 자라 있었다.

시련은 나와 아이를 자라게 한다. '내 아이는 절대 안 아팠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은 이뤄지지 않는다. 사실 인생에서 아픔과 시련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또 아이가 낫기 시작하면, 또 어느새 간절했던 마음은 사라지고 그간 없어졌던 불평·불만이 자리 잡게 될 것이다. 그렇게 또 일희일비하며 하루를 살아간다.

육아를 통해 철학을 배우고, 인생을 배워간다.


태그:#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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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담도 순식간에 뒤집어 즐겁게 살 줄 아는 인생의 위트는 혹시 있으면 괜찮은 장식이 아니라 패배하지 않는 힘의 본질이다.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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