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이 캔 스피크>에서 9급 공무원 민재 역을 맡은 배우 이제훈.

배우 이제훈이 <아이 캔 스피크>로 공무원에 도전했다. 단순한 캐릭터가 아닌 처음과 끝이 많이 달라지는 입체적 캐릭터다. ⓒ 리틀빅픽쳐스


영화 <아이 캔 스피크> 촬영을 앞둔 고사는 좀 특별했다. 보통 사고 없는 촬영과 영화 흥행을 기원하는 이 자리는 감독과 배우들 스태프를 중심으로 진행되는데 이 영화 고사에는 특별한 손님이 참석했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었다.

영화에 참여한 배우 나문희, 이제훈 등의 마음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소소한 가족 코미디를 표방하는 영화이지만 그 안에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시선이 담겨 있는 만큼 배우 입장에선 부담을 느낄 법했다. 특히 이제훈은 "그간 겉핥기로만 알고 있었던 면이 많았다"며 "영화를 보면서도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고 인터뷰 중 소회를 숨기지 않았다.

막연한 생각

영화 속 9급 공무원 민재(이제훈)는 자신이 전근 온 동네에서 매번 크고 작은 민원을 넣는 옥분(나문희)을 원리원칙대로 대한다. 그저 '프로불편러'인 줄만 알았던 옥분이 알고 보니 시장 상인들의 생존권을 위해 그런 일을 자처한 것이었고, 나아가 과거 끔찍한 사건을 겪은 당사자라는 것을 알고 마음을 다해 그를 돕기 시작한다. 영화는 그래서 기본적으로 따뜻한 시각을 유지한다.

"고사 때 할머님들이 계셔서 인사도 드렸는데 그런 마음이 들었다. 교과서로도 배웠지만, 사회적 이슈에 대해 막연한 인식만으로 가득 찼던 건 아닐지. 이 작품을 하면서 저와 가까운 할머님 중 그런 분이 계셨다면, 만약 내 할머니였다면 하는 생각을 하니 감정이입이 되더라. 보통 작품 택할 때는 영화로서 재미가 첫 번째고, 두 번째가 장르적 쾌감이 있는지다. 그런데 그것 이상으로 주변 사람들과 영화 얘길 하며 뭔가 남는 작품이 있더라. 전작 <박열>로 배운 게 있었고, 그것으로 <아이 캔 스피크>를 택한 이유가 된 것 같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 관련 사진.

영화 <아이 캔 스피크> 속 옥분과 민재가 서로 티격태격하며 가까워지는 과정이 꽤 유쾌하게 묘사됐다. ⓒ 명필름


일제강점기 무정부주의자로 민족 해방을 외친 박열을 연기한 뒤 작품을 보는 안목에 일정 부분 변화가 있었다. 이제훈은 "연기를 잘하고 싶은 욕망에 사람들에게 희로애락을 전하고 싶은 마음도 강했는데 시간이 지나 다시 회자하는 작품의 의미가 크더라"며 "시각이 좀 더 확장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연기 흐름을 보면 <아이 캔 스피크>는 운명이었다.

"저 역시 초반까지 시나리오를 읽었을 땐 위안부 피해자분들의 이야기인 줄 전혀 몰랐다. 중반 이후 옥분의 사연이 나오며 진짜 놀랐고, 이걸 어떻게 풀어갈지 궁금해지더라. 그리고 책을 덮자마자 이건 꼭 하고 싶다. 그리고 나문희 선생님이 생각났다. (이미 캐스팅된 줄 모르고) 제작사에 나문희 선생님께서 하셨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피해자분들을 보듬을 수 있다거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의문점이 해소되진 않을 거다. 하지만 적어도 관객분들에겐 진정성 있게 다가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진심을 가지고 연기한다면 그걸 알아주실 거라 믿고, 제작사 또한 전작(<건축학개론>) 때 경험이 있기에 상업적으로 접근하지 않을 거란 믿음이 있었다. 그 생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공무원과 청년 사이

설정상 민재는 서른셋의 청년이다. 혈기왕성할 법하지만 '한국 공무원'이라는 특성상 뭔가 막혀 보이거나 갑갑해 보이기도 한다. 민재의 동료로 나오는 일부 캐릭터는 특유의 영혼 없는 응대, 무사안일주의 일부를 보여주기도 한다. 공무원에 대한 고정관념과 영화적 활약 사이에서 이제훈의 고민이 커 보였다. 사실 젊은 청년이 시장 내 한 할머니와 정서적으로 가까워진다는 설정 자체가 판타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부분을 이제훈도 인정했다. "적극적이지 않은 공무원도 계시겠지만 이 영화에선 뭔가 하려는 인물이 나오잖나"라며 이제훈은 "민재라는 캐릭터가 (공무원들의)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대변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구청 직원들 입장에선 옥분 할머니가 블랙리스트잖나. 이 분이 어떤 이야기로 직원들을 들었다 놨다 할까 참 궁금했다. 민재가 할머니 입장에선 만만찮은 상대처럼 보이는 게 중요했다. 그래서 옷이나 헤어에 더 신경을 썼다. 옥분 입장에서 싸가지 없어 보이는데, 영어를 잘하네? 옥분은 영어를 배워야 하니까 민재에게 다가가려 하고, 민재는 밀어내려 하면서 뭔가 동화되는 모습이 사랑스러워 보여야 했다.

뭔가 계획해서 준비해가긴 했는데 나문희 선생님 연기를 받는 것만으로 마음이 뭔가 채워지더라. 계획 자체가 필요 없었다. 국내 촬영이 모두 끝나고 미국 촬영만 남았을 땐 내가 잘 도와드려야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선생님께서 영어로 긴 대사를 하셔야 했거든. 현장도 그랬지만 영화를 보면서도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고통스러운 유년기, 삶 자체가 힘들었을 옥분을 껴안아 드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에서 9급 공무원 민재 역을 맡은 배우 이제훈.

ⓒ 리틀빅픽쳐스


함께 연기한 나문희 선생에 대해 이제훈은 한껏 존경심을 드러냈다. "현장서 어떻게 연기를 시작하셨는지에 대한 얘기부터 여러 대화를 할 수 있었다"던 그는 "스태프분들을 생색내지 않으시면서 항상 챙기시는 모습에서 많은 걸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연기를 오래 하신 분들은 삶이 연기에 묻어나는 것 같다. 나문희 선생님도 실제 모습과 캐릭터 사이에 간극이 있을 텐데 큰 차이를 못 느끼겠더라. 그래서 더 편하게 느껴졌다. 마음이 좋고 들떠서 어리광 피우고 싶었다. 시간이 지나서도 선생님 같은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남은 과제

상업 영화 활동을 하는 배우지만 이제훈은 앞서 말한 대로 작품의 외적 의미를 고려하고 있었다. 연이어 항일 내지는 일본 비판 코드가 담긴 작품을 했기에 해외 활동에 부담을 내심 느낄 수도 있는데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그는 "여전히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인식과 배움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면서 "이 영화가 다큐멘터리는 아니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담긴 만큼 진심으로 관객분들이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밝혔다.

"위안부 문제를 정공법으로 여러 작품이 다뤘다면 우리 영화는 따뜻한 시각에 우회적으로 보인다. 그래서 더 울림이 있을 것 같다. 일본 활동에 부담을 느끼냐고? 대한민국 배우로 당연히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를 한다는 게) 일본을 고려해야 할 사안인가? 만약 그런 면이 있다면 (오히려) 이 영화에 동참해 위안부 문제를 알리고 싶은 마음이다.

예전에 차인표 선배가 '007시리즈'에 북한군으로 캐스팅 제의가 있었는데 거절했다는 말을 들었다. 매우 훌륭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배우로 자긍심을 갖고 일하신 거잖나. 작품을 통해 뭔가 일본을 설득할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화해의 매개된다면 더없이 좋을 것 같다."

영화 이후 공익 활동에 대해서도 마음에 품은 모양새였다. 이제훈은 "배우로서 뭔가 할 게 있다면 기꺼이 함께 힘을 보태고 싶다"고 말했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에서 9급 공무원 민재 역을 맡은 배우 이제훈.

최근 드라마와 영화 두 편을 연달아 선보인 그는 현재까지 정해진 작품이 없다. 당분간 쉴 시간이 생긴 셈. 이제훈은 "극장에 가거나 집에서 밀린 영화를 보고 싶다"는 계획을 내비쳤다. ⓒ 리틀빅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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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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