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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23전 23승의 빛나는 승리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거북선을 세계 최초의 철갑선(鐵甲船)이라 자랑하면서도 함대의 맨 앞에서 싸웠던 돌격선인 거북선 함장인 '귀선 돌격장(龜船突擊將)'에 대해서는 제대로 아는 이가 없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기자는 그들의 행적을 쫓아 취재에 나섰다.

거북선을 만든 사람들

'거북선[龜船]'이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태종실록(太宗實錄)>13년(1413) 2월 5일조 기사에 "임금이 임진 나루(臨津渡)를 지나다가 거북선[龜船]과 왜선(倭船)이 서로 싸우는 상황을 구경하였다."는 기사이다. 그후 180여 년간 거북선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 않다가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亂中日記)> 중 <임진년(1592) 일기> 2월 8일조 기사에 "거북선에 사용할 돛 베(帆布) 29필을 받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또한 <난중일기>에 따르면 거북선에 비치한 포(砲)를 처음 시험 발사한 날은 임진년(壬辰年) 3월 27일이며, 4월 12일에는 "식후에 거북선을 타고 지자포와 현자포를 쏘았다"고 한 기록으로 보아 거북선은 임진년 3월 달에 첫 건조된 것으로 보인다.

여수시 돌산읍 돌산로 3617-22 돌산도 거북선 나루터에 전시된 실물 거북선
▲ 거북선 체험관 여수시 돌산읍 돌산로 3617-22 돌산도 거북선 나루터에 전시된 실물 거북선
ⓒ 황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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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첫 출전한 날은 언제일까? 이순신은 장계(狀啓)에서 임진년 "5월 29일 사천해전(泗川海戰)"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거북선이 좌수사 이순신의 기획으로 군관인 나대용(羅大用)이 감독하여 만든 것으로 알고 있다. 그가 1591년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 휘하에서 '감조전선출납군병군관(監造戰船出納軍兵軍官)'을 지낸 것은 사실이나 공식 기록에선 나대용이 거북선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가 없다. 야사에선 거북선 제작에 관여한 사람 수만 20명이 넘는데, 조선 중기의 유학자이자 도인이었던 구봉(龜峰) 송익필(宋翼弼)이 임란을 예견하고 거북선의 설계도를 만들어두었다가 이순신에게 주었다는 설도 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를 따라 성천까지 호종했던 이덕홍(李德弘)은 상소문에 귀선도(龜船圖)를 첨가하여 바다에는 거북선과 육지에는 거북거[龜車]를 사용할 것을 진언한 것으로 보아 나대용이 거북선을 건조하는데 그가 직간접으로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마하수(馬河秀)는 선공감 주부(繕工監 主簿)로서 거북선 건조에 참여하였다고 한 기록으로 보아 3척 중 한 척의 건조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1766년 간행된 이덕홍의 간재집 중 “상행재소병도”에 실린 귀갑선도. 현존하는 거북선 그림 중 가장 연대가 앞선다.
▲ 귀갑선도(龜甲船圖) 1766년 간행된 이덕홍의 간재집 중 “상행재소병도”에 실린 귀갑선도. 현존하는 거북선 그림 중 가장 연대가 앞선다.
ⓒ 박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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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전라좌수영 관할 거북선은 좌수영(左水營)․순천부(順天府)․방답진(防踏鎭) 3군데서 건조되었는데, 이 중 좌수영 거북선은 나대용의 감독하에 건조된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때 사용되었던 거북선 기준으로 주요 제원을 살펴보면 선체의 길이가 70자, 저판(底板)의 길이가 50자, 선체의 너비가 24자, 상장(上粧)의 너비가 30자, 탑승 인원이 125명, 노의 수는 14자루로 되어 있다.

단, 이는 전시 병력부족으로 인한 최소한으로 승선 숫자로 보인다. 전후 숙종대의 기록에 따르면 통제영 거북선엔 158명이, 일반 거북선엔 148명이 승선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들 구성원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선장(船將 : 귀선돌격장) 1명, 좌·우 포도장(捕盜將) 각 1명, 장령(將領) 6명, 선직(船直) 2명, 무상(舞上) 2명, 타공(舵工) 2명, 요수(繚手) 2명, 정수(碇手) 2명, 사부(射夫) 14명, 화포장(火砲匠) 8명, 포수(砲手) 24명, 노군(櫓軍) 90여명 등이 승선했던 것이다. 현재 거북선의 구조에 대해서는 2층설보다 3층설로 굳어지는 상황이다.

거북선을 만든 장소

그럼 거북선은 어디에서 만들었을까? 임진왜란 당시 활약한 거북선은 단 세 척이었는데, 이들은 현재 진남관(鎭南館) 망해루(望海樓) 정문 앞에 위치한 전라좌수영 선소(본영 남문 밖), 여수시 시전동에 위치한 순천부 선소, 돌산읍 군내리에 위치한 방답진 선소 등 모두 지금의 여수 지역에서 건조되었다.

이 중 시전동에 위치한 여천 선소는 여천 앞바다에 접한 선소마을에 위치하며 임진왜란 이전에 설치되었다가 임진왜란 당시에는 전라좌수영 관하 순천도호부의 수군 기지로 이용되었다. 1980년 해군사관학교팀에 의한 첫 조사를 시작으로, 1985년 명지대학교 한국건축문화연구소팀에 의한 2차 조사와 1994년 순천대학교 박물관에 의한 3차 조사가 이루어졌다.

전라남도 여수시 시전동 선소마을 708외
▲ 여천 순천부 선소 전경 전라남도 여수시 시전동 선소마을 708외
ⓒ 황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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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에 이루어진 1차 발굴조사를 통해서 선소유적이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영 관하 거북선이 건조되었던 3개 선소 가운데 하나인 순천도호부 선소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또한 그동안 구전되어 오던 세검정과 군기고의 규모를 확인함에 따라 1985년에는 세검정과 군기고가 복원되었다. 이곳에는 현재 자연적 지세를 이용하여 거북선을 대피시켰던 굴강(屈江)과 거북선을 매어 두었던 계선주(繫船柱), 돌벅수(돌장승) 6기(동벅수 2기, 서벅수 2기, 굴강변 벅수 2기), 수군들이 칼을 갈았다는 세검정지(洗劍亭址)의 초석이 남아 있다. 여천 순천부 선소는 1995년 사적 제392호로 지정된 바 있다.

다음으로 방답진 선소에 대해 알아보자. 1870년 발간된 <호남읍지(湖南邑誌)>에 의하면, 이곳 방답진(防踏鎭)에는 전선 8척, 수군 705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석축성인 방답진성은 둘레 661m, 높이 3.9m이며,  몸을 보호하기 위한 낮은 담장인 여장(女墻), 여첩(女堞)이 205개소가 있었다. 기타, 창고 20칸, 연못 1개소, 동문․서문․남문 등 성문 3개소가 있었다. 현재 서문터 밖으로는 조그만 만(灣)이 있어 적의 침입으로부터 전선을 보호하거나 즉시 출동시킬 수 있도록 인공적으로 깊게 판 굴강(掘江)이 있다. 이곳에 또 하나의 방답 귀선이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수시 돌산읍 군내리 1572-3
▲ 돌산도 방답진 선소 전경 여수시 돌산읍 군내리 1572-3
ⓒ 박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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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몇 척의 거북선을 운행했을까?

학계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이 건조한 거북선을 3~5척 정도로 보고 있다. 이후 팔도의 병선 중 거북선은 숙종 4년(1678)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에 5척, 영조 22년(1746) 편찬된 법전인 <속대전(續大典)>엔 14척, 영조 46년(1770) 편찬된지리지인 <동국문헌비고(東國輿地備考)>에는 40척으로 크게 증가한다. 이어 1808년에 편찬한 <만기요람(萬機要覽)>에는 30척으로 조금 줄었다가 1817년에 편찬된 수군의 함선 목록인 <선안(船案)>에는 18척으로 줄어들고, 조선시대 최후의 육전체제 통일법전인 <대전회통(大典會通 : 1865년간)>에는 모두 14척으로 나타난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경기도에 1척, 충청도에 1척, 경상도에 9척, 전라도에 3척 등 14척이 주진(主鎭)에 배치되었으며, 황해도․평안도․함경도(병선 없음)에는 거북선을 배치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가장 많은 거북선이 배치된 경상도의 경우 9척 중 우도(右道)의 주진인 통영(統營)에 3척, 좌도(左道)의 주진에 1척, 거제(巨濟)․진주(晋州)․가덕진(加德鎭)․부산포(釜山浦)․다대포(多大浦)에 각 1척씩을 배치한 것을 확인하였다.

1970년 그린 아산 현충사 충무공 십경도 중 거북선 건조 장면이다.
▲ 충무공 십경도 중 거북선 건조도 1970년 그린 아산 현충사 충무공 십경도 중 거북선 건조 장면이다.
ⓒ 박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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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의 경우 대맹선(大猛船) 20척, 소맹선(小猛船) 105척, 전선(戰船) 55척, 병박(兵舶) 66척에 비해 돌격선이었던 거북선은 소수만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조에 수십 척에 달하던 그 많은 거북선은 한 척도 남아있지 않고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1973년 김용환 화백이 일본 토쿄에서 그린 귀갑선 해전기 중 삽화.
▲ 귀갑선 해전기 1973년 김용환 화백이 일본 토쿄에서 그린 귀갑선 해전기 중 삽화.
ⓒ 박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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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사람이 탈 수 있는 실물 크기의 거북선 모형은 여수시에 3군데(이순신 광장, 돌산도 거북선 선착장, 오동도), 통영시 강구안 거북선 3척, 거제시의 옥포만 거북선과 조선해양박물관 앞 '1592 거북선' 등 2척, 창원시 태평동 해군사관학교 거북선, 남해군 충렬사 앞 거북선, 경남 고성 당항포 관광지 거북선, 사천시 삼천포대교공원 거북선 등이 복원되어 있어 거북선을 연구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최초의 거북선 돌격장 이언량(李彦良)

임진왜란에 출전한 영귀선(營龜船)․순천 귀선․ 방답 귀선 등 3척의 거북선 함장인 귀선돌격장(龜船突擊將)은 누구였을까?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 돌격장으로 활약한 사람을 <난중일기>와 <임진장초(壬辰狀草)> 등 문헌을 통해 확인한 결과 최초의 돌격장이었던 이언량(李彦良), 한산대첩 때 좌귀선 돌격장인 이기남(李奇男), 우귀선 돌격장인 박이량(朴以良) 외에 <난중잡록(亂中雜錄)>에는 방답귀선장(防踏龜船將) 신여량(申汝良)을 척후장(斥候將)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보여 현재까지 4명의 귀선돌격장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신여량의 경우 이순신의 기록이 아니라 좀 더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개령이씨 족보 중 계보도이다.
족보와 계보도 모두 이언량의 이름이 누락되어 있다.
▲ 개령이씨 계보도 개령이씨 족보 중 계보도이다. 족보와 계보도 모두 이언량의 이름이 누락되어 있다.
ⓒ 박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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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문헌에 나타난 최초의 거북선 돌격장인 이언량(李彦良)은 누구일까? 1799년(정조 23)에 간행한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 의하면 그의 본관은 개령(開寧), 자는 충민(忠敏)이며, 통정대부(通政大夫) 익수(益秀)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1588년(선조 21) 무과에 급제해 훈련원 첨정(訓鍊院僉正)이 된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李舜臣) 휘하의 군관으로 거북선을 만드는데 참여했고, 거북선을 지휘하며 돌격장(突擊將)으로 맹활약했다.

호남절의록엔 이언량의 본관이 개령으로 나온다
▲ 호남절의록 이언량조 호남절의록엔 이언량의 본관이 개령으로 나온다
ⓒ 박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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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 5월 7일 옥포(玉浦)해전에선 돌격장으로 참전하여 왜대선 1척을 총통을 쏘아 불사르는 등 대승을 거두었고, 6월 2일 당포(唐浦)해전에서는 이순신의 군관으로 공을 세워 훈련원 주부(訓鍊院 主簿)가 된다. 곧이어 6월 5일 당항포(唐項浦) 해전에선 다시 우귀선돌격장(右龜船突擊將)으로 참전하여 왜의 중선(中船) 2척을 불사르는 전과를 올린다. 7월 8일 한산해전에선 이기남․박이량이 좌우귀선돌격장으로 참여한 관계로 보인(保人)으로 출전하였다가 9월 1일 부산포해전에선 다시 거북선 돌격장으로 참전하여 공을 세운다.

이후 그는 공로로 초계군수(草溪郡守), 부호군(副護軍)으로 승진하게 되며, 뒤에 다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책록(策錄)된다. 그는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선조실록> 36년(1603) 7월 3일조 기사에, '심한 파도가 하늘에 닿을 듯이 솟구쳐 올라 전 군수(郡守) 이언량(李彦良)과 여도 만호(呂島萬戶) 송전(宋荃) 등이 탔던 배가 표류하다가 언덕에 걸려 파손되었다''는 전라좌도 수사 안위(安衛)의 치계가 보여 와전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龜船突擊將臣軍官李彦良(귀선돌격장신군관이언량)'이란 기사가 보인다.
▲ 부산파왜병장 '龜船突擊將臣軍官李彦良(귀선돌격장신군관이언량)'이란 기사가 보인다.
ⓒ 박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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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집안인 개령이씨(開寧李氏)는 통계청 인구 조사에 의하면 2000년에는 총 588가구 1927명이 생활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는데, 2012년 간행한 <개령이씨세보(開寧李氏世譜)>에도 이름이 올라있지 않았고, 문중에서도 모르고 있어 마음이 아팠다.

이언량과 이기남이 선무원종공신 1등에 나란히 책록된 것을 볼 수 있다.
▲ 선무원종공신록 중 이언량 이기남조 이언량과 이기남이 선무원종공신 1등에 나란히 책록된 것을 볼 수 있다.
ⓒ 박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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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대첩 좌귀선 돌격장 이기남(李奇男)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한산대첩에는 2척의 거북선이 참전했다. 그 중 좌측 거북선 을 지휘한 함장이 바로 이기남(李奇男)이었다. 그의 자는 대윤(大胤)으로 1553(명종 8) 전라도 순천(順天)의 광산이씨(光山李氏) 집안에서 정릉(貞陵) 참봉(參奉) 이천근(李千根)의 손자이자 선략장군(宣略將軍) 이사관(李思寬)의 아들로 태어났다. 

광산이씨 순천파 가계도 모습이다.
이기남은 통천파, 삽치파, 쌍암파, 관산파 4개 순천 문중 가운데 맏파인 통천파조이다.
▲ 광산이씨 순천파 가계도 광산이씨 순천파 가계도 모습이다. 이기남은 통천파, 삽치파, 쌍암파, 관산파 4개 순천 문중 가운데 맏파인 통천파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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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武勇)이 절륜(絶倫)했던 그는 1591년(선조 24) 별시(別試) 무과에 을과 1등(2/300)으로 급제하였다. 그는 1548년(명종 3)생인 우귀선 돌격장 박이량 보다 5살 아래의 고향 후배로 같은 해에 무과에 급제했다.

1592년(선조 25) 6월 2일 당포(唐浦)해전에 거북선 돌격장으로 참가했으며, 7월 8일 한산해전에선 좌귀선 돌격장으로 왜대선 1척을 바다 가운데에서 사로잡아 머리 7급을 베었다. 1604년 (선조 37년) 6월 4일 오후에 일본 선단과 벌어진 당포 해상 전투에서 다른 27명의 장수와 승리하여 <당포전양승첩지도(唐浦前洋勝捷之圖)>를 하사받았다.

한산대첩 좌귀선 돌격장인 이기남 장군의 묘소이다. 비석이나 상석 등이 없어 말년이 평탄치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순천시 상사면 마륜리 산31번지에 부인인 숙인 청주한씨와 쌍분으로 조성했다.
▲ 좌귀선 돌격장 이기남 장군 부부 묘 한산대첩 좌귀선 돌격장인 이기남 장군의 묘소이다. 비석이나 상석 등이 없어 말년이 평탄치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순천시 상사면 마륜리 산31번지에 부인인 숙인 청주한씨와 쌍분으로 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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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묘소는 순천시 상사면(上沙面) 마륜리(馬輪里) 산31번지 조변산(鳥邊山)자락 임좌(壬坐)에 자리하고 있다. 지난 6월 28일 방손인 이형주씨의 안내로 산속 나무숲길을 따라 올라간 그의 묘는 왕년의 거북선 돌격장이란 말이 무색하리만치 묘비나 상석도 없이 방치되다시피 하여 기자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왜 이토록 무덤이 관리되지 않은 것일까? 후손들은 이를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에 연루된 동인의 영수 이발(李潑)과 연관 짓는다. 하지만 그는 이미 임진왜란 발발전인 1589년 사망했고, 1592년 임진왜란 참전은 물론 1604년 (선조 37년) 당포(唐浦)전투에도 참전하여 정여립 사건과는 무관해 보여 앞으로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견내량파왜병장 중 이기남 기사이다. 좌귀선 돌격장으로 이기남이 왜대선 1척을 바다 가운데에서 사로잡아 머리 7급을 베었다는 기사가 보인다.
▲ 견내량파왜병장 중 이기남 조 견내량파왜병장 중 이기남 기사이다. 좌귀선 돌격장으로 이기남이 왜대선 1척을 바다 가운데에서 사로잡아 머리 7급을 베었다는 기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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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광산이씨 순천파(順天派) 4문중인 통천(桶泉) 문중[파조 李奇男], 삽치(霅峙) 문중[파조 李奇胤], 쌍암(雙巖) 문중[파조 李奇俊], 관산(冠山 문중[파조 李奇賢] 중 맏파인 통천 문중의 파조이다.

현재 이기남의 직계인 통천파는 후손이 없어 4촌 동생인 이기윤의 12대손인 이병국(李炳國 : 1951년생)씨를 양자로 삼아 계대를 이어 한 가구만이 남은 상태이다. 마륜리에 이장군의 재실(齋室)과 이기남 등 임진왜란 4충신의 사적을 기록한 '광산이씨 사충기적비(光山李氏四忠紀蹟碑)'가 남아 있어 함께 답사해보면 좋을 듯하다.

순천시 상사면 마륜리에 있는 광산이씨 사충기적비의 모습이다. 
이기남과 이기윤, 이기준과 이기현 등 광산이씨 순천문중 중 4개 지파의 파조의 사적을 기록한 비이다.
▲ 광산이씨 사충기적비 순천시 상사면 마륜리에 있는 광산이씨 사충기적비의 모습이다. 이기남과 이기윤, 이기준과 이기현 등 광산이씨 순천문중 중 4개 지파의 파조의 사적을 기록한 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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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대첩 우귀선 돌격장 박이량(朴以良)

지난 4월 1일 한산대첩 우귀선 돌격장인 박이량(朴以良) 장군의 사적을 찾아 후손 박태수씨의 안내로 순천시 해룡면 신성포에 위치한 장군의 묘역을 답사했다.

<무과방목(武科榜目)>에 의하면 박장군은 1548년(명종 3) 전라도 순천에서 영의정 박원종(朴元宗)의 6대손이자 훈련원 주부를 지낸 박성춘(朴成春)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자는 여람(汝覽 : 방목) 또는 여현(汝賢 : 족보)이다. 박장군의 생년은 1548년(명종 3) 무신생[무과 방목])과 1520년(중종 15) 경진(庚辰)생[족보]이 있으나, 여기서는 <무과방목>의 기록을 따른다.

이어 선조(宣祖) 24년(1591) 신묘(辛卯) 별시(別試)에 좌귀선 돌격장 이기남(李奇男)과 함께 응시해 병과(丙科)에 206위(241/300)로 급제했다.

임진왜란에 이순신 휘하에서 싸웠던 훈련원 주부 박성춘과 우귀선 돌격장 으로 훈련원 첨정을 지낸 박이량 부자의 공적비이다.
▲ 박성춘. 박이량 공적비 임진왜란에 이순신 휘하에서 싸웠던 훈련원 주부 박성춘과 우귀선 돌격장 으로 훈련원 첨정을 지낸 박이량 부자의 공적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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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선조 25) 7월 8일 한산도 해전에서는 우귀선 돌격장(右龜船突擊將)으로 참전하여 왜적의 목 1급을 베는 전과를 올린다.[견내량파왜병장(見乃梁破倭兵狀)에 의함] 이때 그의 부친인 상주포(尙州浦) 곡포 권관(曲浦權管) 박성춘(朴成春)은 왜선을 쫓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하게 된다. 그는 죽으면서 아들 박이량에게 복수를 부탁한다. 이순신 휘하에서 올린 전과로 박성춘은 후에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된다.

한산대첩 우귀선 돌격장 박이량 장군의 묘역 전경이다.
아래쪽으로 정면 약 300미터에 있는 순천 왜성을 내려다보고 있다. 
순천시 해룡면 신성포 마을에 있다.
▲ 우귀선 돌격장 박이량 장군 묘 한산대첩 우귀선 돌격장 박이량 장군의 묘역 전경이다. 아래쪽으로 정면 약 300미터에 있는 순천 왜성을 내려다보고 있다. 순천시 해룡면 신성포 마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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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이어 7월 10일 벌어진 안골포(安骨浦) 해전에서도 박이량은 돌격장으로 활약하게 된다. 
하지만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상관인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하옥되자 그는 귀선 돌격장을 사임하고 고향인 순천으로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선조실록> 11월 28일조 기사에 "순천 부사(順天府使) 김언공(金彦恭)의 치보에 '본부에 사는 훈련원 첨정(訓鍊院僉正) 박이량(朴以良)은 처자가 적중에서 피살되자, 울분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군인을 모아 적을 토벌하여 복수를 것을 결심하므로 장수로 정할 것을 허락했는데, 순천의 많은 적과 서로 접전하여 머리 1급을 베고 말 1필을 탈취하였으므로, 머리 1급을 올려보낸다.'고 하였습니다"라는 기사가 보여 이때부터는 순천부에 군관으로 소속되어 왜적과 싸운 것으로 보인다.

박이량 장군 묘 바로 아래에 있는 사당 천마산 천마사의 모습이다.
▲ 천마사 전경 박이량 장군 묘 바로 아래에 있는 사당 천마산 천마사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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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광양시지(光陽市誌)>에 의하면 '아버지와 처자가 적중에서 피살되자, 순천부사 권준(權俊)과 토량에서 왜군을 크게 격파하여 덕진관(德鎭官) 적량수군도위(赤梁水軍都尉)에 제수(除授)된' 것으로 되어 있다.

<광양시지>에는 그가 '이후에 전투 중에 전사하여 과의교위(果毅校尉)·소위장군(昭威將軍)·건공장군(建功將軍)에 추증(追贈)되었다'고 되어 있다. 또 순천박씨 족보와 박이량 묘갈(墓碣)에는 '順天府使權俊合擊破倭於露梁唐浦亦中丸而卒(순천부사 권준과 함께 노량․당포해전에서 왜적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는데, 또한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나 그는 이 전투에서 전사하지 않았음을 적량 만호(赤梁萬戶) 박이량(朴以良)을 파직하였다는 <광해군일기> 4년(1612) 11월 13일(계묘)조 기사가 입증하고 있다.

한산대첩 승전기록인 '견내량파왜병장' 중 우귀선 돌격장 박이량에 대한 기사이다. '斬首一級(참수일급)'이란 기록이 보인다.
▲ 견내량파왜병장 중 박이량 기사 한산대첩 승전기록인 '견내량파왜병장' 중 우귀선 돌격장 박이량에 대한 기사이다. '斬首一級(참수일급)'이란 기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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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끝나자 그는 전공을 인정받아 조방장(助防將) 어영담(魚泳潭)과 함께 <선무원종공신> 2등에 책록된다.

그는 사후에 순천시 해룡면(海龍面) 신성포(新城浦) 상동(上洞) 천마산(天馬山) 해좌(亥坐 : 북북서)에 묻혔는데, 묘역 아래 일직선으로 약 300미터 거리에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지로 유명한 순천 왜성(倭城 : 전라남도 기념물 제171호)이 바라보여 그의 죽어서도 왜적을 막겠다는 우국충정을 느낄 수 있었다. 가까운 신성리 산 28-1엔 이순신을 모신 충무사(忠武祠 : 전남문화재자료 제48호)도 있어 임진왜란 유적지 순례시 함께 둘러본다면 더욱 뜻 깊은 답사가 될 듯하다.

선무원종 2등공신록에 이순신 부장인 첨정 박이량, 절충 어영담의 기록이 보인다.
▲ 선무원종공신록 박이량, 어영담 기록 선무원종 2등공신록에 이순신 부장인 첨정 박이량, 절충 어영담의 기록이 보인다.
ⓒ 박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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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의 과제


이처럼 혁혁한 전공을 세운 거북선 돌격장에 대해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에서는 이들에 대한 학술 세미나 등 재조명 작업과 성역화 작업이 필요해 보인다. 특히 순천에서는 3명의 거북선 돌격장 가운데 이기남과 박이량의 2명의 돌격장을 배출한 관계로 묘역을 정비하고 거북선 모형과 돌격장의 동상을 건립하고 거북선 전투를 묘사한 조형물 건립 등 테마공원인 '거북선 돌격장 기념공원' 등을 조성한다면 임진왜란 호국성지로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해군에서는 장보고급(SS급) 잠수함에 충무공 이순신 휘하의 장수 중 4명의 장수 이름을 따서 6번함은 정운함(SS-067), 7번함은 이순신함(SS-068), 8번함은 나대용함(SS-069), 9번함은 이억기함(SS-070)으로 명명한 바 있다. 앞으로 3명의 거북선 돌격장도 군함 이름으로 명명될 날을 고대해 본다.


태그:#거북선, #귀선돌격장, #이언량, #이기남, #박이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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