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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부터 나는 개를 무척 좋아했다. 부모님도 동물을 좋아하셔서 고양이도 키웠다. 우리 집에는 셰퍼드와 누렁이가 함께 살았다. 셰퍼드가 조금 컸을 때 내 종아리를 물었던 아랫집 '똥개'를 혼내주려고 했었다. 셰퍼드의 덩치가 꽤 커졌을 때 동네에 데리고 나가면 개들이 몇 번 짖다가 숨어 버리곤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는 어린 시절부터 개와 함께 놀기를 좋아했다. 외아들인 나에게 온기를 줄 다른 식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위니와 산책 중인 어머니
 위니와 산책 중인 어머니
ⓒ 나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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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없이 어린 시절을 자라서 사람을 그리워하고, 강아지를 좋아했다. 현철이, 하늘이, 사랑이, 또롱이, 다롱이, 까미, 조이, 대박이, 위니, 깐지…. 내가 키운 강아지 이름이다. 지난해에는 15년 동안 키운, 위니라는 예쁜 강아지를 잃고 많이 울었다. 위니는 치매 어머니가 무척 아꼈던 강아지다. 치매 환자에게 '동물 친구'는 치매를 늦춰주기도 한다.

식구 많은 집 부러워 친구네 쌀집에서 '기숙'

참새들이 쌀집 주인의 눈을 피해 만찬을 즐기고 있다(자료사진).
 참새들이 쌀집 주인의 눈을 피해 만찬을 즐기고 있다(자료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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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아들이라서 외로웠던 나는 형제 많은 집을 부러워했다. 초등학교 때 자기 소원을 쓰라고 하면 "형제가 여덟인 집안이면 좋겠다"고 적었다. 그 마음은 외아들만 아는 비밀(?)이다.

우리 집에서 몇 집 건너 봉순이라는 아이가 살고 있었다. 동네 쌀집 딸이다. 나보다 한 살 위였던 것 같다. 다섯 살 때부터 나는 그 집 식구처럼 지냈다. 그 집은 여덟 남매 집안이었다.

통행금지가 풀리는 새벽녘 오전 4시만 되면 그 집으로 달려갔다. 기상 시간은 물론 오전 3시 반이었다. 일찍부터 일어나 옷을 입고 마루에서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렸다. 처음에는 걱정하셨던 부모님도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놔두셨다. 마치 나를 쌀집 식구인 양 여기셨다.

나는 쌀집 식구들이 자는 틈에 들어가 한 이불에서 잠을 잤다. 냄새 나는 이불이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아침에는 그 집 식구들과 같이 기상해 우리 집처럼 밥을 먹었다. 어린 시절 매운 것을 잘 못 먹었는데 그 집에만 가면 고등어에 조린 무를 그렇게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그 집 우물곁에 만들어 놓은 큰 물통에 들어가 물놀이를 하고 놀았다. 포도가 열릴 때는 포도도 따 먹었다. 대부분 점심도 쌀집에서 해결했다. 점심까지 먹고 집에 가면 우리 집이 남의 집 같을 때가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많이 귀찮았을 듯한데 쌀집 식구들은 나를 아들처럼 대해 주셨다. 거의 1년 내내 오전 4시만 되면 대문을 두드리는 꼬마를 상상해 보라. 눈이 쌓인 날, 비가 내리는 날도 갔으니까.

"봉순아! 봉순아!"

꽝, 꽝, 꽝!

"관호 왔니?"

어떨 때는 아주머니가 미리 기다리고 계셨다. 나는 시계처럼 정확히 쌀집에 갔다. 오전 3시 정도부터 일어나 잠을 자지 않고 옷을 챙겨 입고 준비했다. 통행금지가 풀리면 쌀집으로 갔다.

쌀집은 큰 방이 두 개였는데 중간은 미닫이문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한 이불을 여럿이서 덮고 자는 그 틈에 들어가야 했다. 지금 좋은 기억만 남은 것을 보니 당시 그 집 식구들이 나를 혼내거나 상처 주는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어릴 적 상처는 어른이 된 후에도 남는데 난 즐거운 기억만 있다.

식구 아닌데도 먹여주고 재워준 쌀집 8남매

봉순이 오빠는 봉학이였다. 봉학이 형은 자그마한 키였지만 단단한 체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형은 나의 '보디가드'였다. 항상 나를 데리고 다니며 보호해 주었다. 어느 날은 쌀을 팔아서 나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었던 기억도 있다. 봉학이 형 위로 누나가 있었는데 이름이 기억에 없다. 다만 나와 다른 동생들을 목욕시켜 주고 따뜻하게 챙겨주었다. 그래서 어릴 적에 "난 왜 누나가 없지?"라며 늘 부러워했었다.

나는 사람 냄새 나는 집을 좋아했다. 어머니가 내 위로 4남매를 잃지 않았다면 나는 부러워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사실 외아들은 외롭다. 형제 많은 집안은 외아들의 우상이다. 고등학교 때 부러웠던 친구는 자기 매형에게서 용돈을 받아쓰는 아이들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사람들을 참 좋아한다. 우연히 연결되었더라도 그 사람을 내가 먼저 잊지 않는다.

나는 사람이 좋다.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사람을 좋아할 수 있게 만든 8남매 쌀집은 내 마음의 고향이다. 어린 시절 형제 없이 외롭게 커야 했던 나에게 훈훈함과 사람냄새를 알게 한 곳이다. 돌이켜 보니 그것이 얼마나 좋은 경험이었는지, 내 인격과 성격 형성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이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면서 일을 하는 성격은 그때 만들어진 것 같다.

내 마음의 고향 '8남매 쌀집' 같은 훈훈함이 지금 이 사회에도 있었으면 좋겠다. 냄새 나는 이불을 덮고 있어도 행복하고, 간지럼을 피우면서 서로 웃고, 발을 서로 비벼 가며 잠을 자는 그런 행복 말이다. 서로 처지를 바꿔 보고, 무책임하게 상처 주는 말을 쉽게 하지 말고,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사람을 존중하고, 사람의 가치를 최고로 아는 그런 만남은 축복이다. 사람은 언젠가는 처지가 바뀌는 법이니까….

덧붙이는 글 | 나관호는 '크리스천커뮤니케이션연구소' 대표, 문화평론가, 칼럼니스트, 작가이며, 북컨설턴트로 서평을 쓰고 있다. <나관호의 삶의 응원가>운영자로 세상에 응원가를 부르고 있으며, 따뜻한 글을 통해 희망과 행복을 전하고 있다. 또한 기윤실 200대 강사에 선정된 기독교커뮤니케이션 및 대중문화 분야 전문가로, 기윤실 문화전략위원과 광고전략위원을 지냈다. 역사신학과 커뮤니케이션 이론, 대중문화연구를 강의하고 있으며, '생각과 말'의 중요성과 영향력을 가르치는 '자기계발 동기부여' 강사로 기업문화를 밝게 만들고 있다. 심리치료 상담과 NLP 상담(미국 NEW NLP 협회)을 통해 사람들을 돕고 있는 목사이기도 하다.



태그:#나관호, #쌀집, #행복한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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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제이 발행인, 칼럼니스트다. 치매어머니 모신 경험으로 치매가족을 위로하고 있다. 크리스천커뮤니케이션연구소 소장이다. 기윤실 선정 '한국 200대 강사'로 '생각과 말의 힘'에 대해 가르치는 '자기계발 동기부여' 강사, 역사신학 및 대중문화 연구교수이며 심리치료 상담으로 사람들을 돕고 있는 교수목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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