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13일 오전 류코쿠대학 국제문화학부 동아시아 고대문화(담당 서광휘 교수)와 한국어 수업에서  초청강연을 했습니다. 강사는 김선기 선생님이 오셨습니다. 김선기 선생님은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에서 정년 퇴임하시고, 교토 불교대학 객원연구원으로 와 계십니다.

          강의실과 양 옆으로 강연를 담당하신 김선기 선생님(사진 왼쪽)과 통역을 담당하신 서광휘 선생님입니다.
 강의실과 양 옆으로 강연를 담당하신 김선기 선생님(사진 왼쪽)과 통역을 담당하신 서광휘 선생님입니다.
ⓒ 박현국

관련사진보기


강사로 오신 김선기 선생님은 대학교 1학년 때부터 미륵사지 발굴 조사에 참가하셔서 40년 이상 미륵사지와 왕궁리 오층석탑을 중심으로 백제 문화 관련 유물의 발굴과 조사, 연구에 매진해 오셨습니다.

백제 문화 관련 유적이나 유물은 도읍지였던 부여나 공주 부근에도 많습니다. 이 지역에서 출토되었거나 유적지로 알려진 공방터, 절터, 왕궁터는 물론 백제금동대향로와 같은 유물은 찬란했던 백제 문화의 모습을 지금까지 생생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김선기 선생님을 비롯한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에서는 여러 곳의 도움으로 익산 미륵사지 부근 여러 유적지를 발굴하여 미륵사지 둘래에 미륵사뿐만 아니고, 제석사, 대관사와 같은 절이 있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백제 미륵사 석탑과 속리산 법주사 팔상전입니다. 미륵사 석탑이 목탑 형식을 본떠서 만들었다는 사실을 말할 때 자주 쓰이는 사진입니다.
 백제 미륵사 석탑과 속리산 법주사 팔상전입니다. 미륵사 석탑이 목탑 형식을 본떠서 만들었다는 사실을 말할 때 자주 쓰이는 사진입니다.
ⓒ 박현국

관련사진보기


제석사가 금당을 중심으로 탑과 승방이 일직선으로 놓여진 절로 전통적인 가람배치방식을 따랐으며 과거 세상의 국조 신앙 의례를 담당했다는 사실 밝혔습니다. 대관사는 권위적인 가람배치를 따라서 지었으며 당대 임금의 국가 통치 안녕을 기원하고 왕실의 발전을 기원하는 절이었습니다.  

미륵사는 내세불인 미륵 신앙을 중심으로 국가와 국민의 발전을 기원하는 혁신적인 절이었습니다. 외형적인 모습도 다른 절과 달리 가운데 목탑을 세우고, 동서 양 옆에 석탑을 두었습니다. 이처럼 미륵사가 혁신적인 것은 백제 사람의 뛰어나 건축술과 깊은 불교 신앙을 반영한 것입니다.

미륵사 석탑은 9층이었는지 7층이었는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다만 나무로 지은 목탑에서 석탑으로 넘어오는 초기 작품입니다. 비록 돌로 지었지만 나무탑이 지닌 형태를 그대로 답습하여 돌로 지었습니다. 무겁고 단단한 돌을 나무 다루듯 자르고, 다듬어 15미터 이상의 석탑을 지었습니다.

          서탑 탑신 사리공(舍利孔)에서 나온 사리봉영기(舍利奉迎記)에 백제 왕후가 가람을 창건하고 기해년(639)에 탑을 조성해 왕실의 안녕을 기원했다고 쓰여있습니다. 가운데 사진은 미륵사지에서 나온 삼국시대 풍탁으로 가장 오래되었습니다.
 서탑 탑신 사리공(舍利孔)에서 나온 사리봉영기(舍利奉迎記)에 백제 왕후가 가람을 창건하고 기해년(639)에 탑을 조성해 왕실의 안녕을 기원했다고 쓰여있습니다. 가운데 사진은 미륵사지에서 나온 삼국시대 풍탁으로 가장 오래되었습니다.
ⓒ 박현국

관련사진보기


백제의 탑 짓는 기술은 뛰어나서 신라 땅 경주에 세운 황룡사 9층탑을 지을 때도 도와주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입니다. 뿐만 아니라 백제 사람들의 예술적 기량은 일본에도 전해졌습니다. 일본 간사이 시가현에는 백제사, 석탑사라는 절들이 있고, 호류지 절에는 백제 관음상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신하 무리가  말하길 백제에서 재인바치를 청한 뒤에야 비로서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이리하여 보물과 폐백을 가지고 백제에 가서 재인바치를 초청하였다. 아비지라는 재인바치가 명령을 받고 와서 공사를 경영하는데 이간 용춘이 이 일을 주관하여 재인바치 2백명을 인솔하였다.<삼국유사 권 제 3 탑과 불상 제 43황룡사 9층탑 조>

群臣曰 請工匠於百濟 然後方可 乃以寶帛請於百濟. 匠名阿非知 受命而來 經營木石 伊干龍春 幹蠱 率小匠二百人.

미륵사지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에도 남아있습니다.

어느 날 백제 무왕이 왕비와 함께 사자사에 행차를 하였을 때 용화산 아래 큰 못가에 이르자  미륵 삼존이 나타나서 수레를 멈추고 예를 표하였다. 왕비가 왕에게 이곳에 절을 세우기를 부탁하자 지명법사가 신통력을 발휘하여 산에 있는 흙으로 연못을 메워 고른 터를 닦았다. 미륵 삼존의 모습을 본떠서 만들고, 회전과 탑과 낭무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라고 했다.
一日王與夫人 欲幸師子寺 至龍華山下大池邊 彌勒三尊出現池中 留駕致敬 夫人謂王曰 須創大伽藍於此地 固所願也 王許之 詣知命所 問塡池事 以神力 一夜頹山塡池爲平地 乃法像彌勒三尊 殿塔廊廡各三所創之 額曰彌勒寺[國史云 王興寺] 眞平王遣百工助之 至今存其寺[三國史記云 是法王之子 而此傳之獨女之子 未詳][네이버 지식백과] 무왕 [武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 2012. 8. 20., 한국인문고전연구소)

          1974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가 중심이 되어 미륵사지 발굴 작업을 할 때 모습입니다. 사진 뒷줄 맨 왼쪽 머리 모습이 발표자인 김선기 선생님입니다.
 1974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가 중심이 되어 미륵사지 발굴 작업을 할 때 모습입니다. 사진 뒷줄 맨 왼쪽 머리 모습이 발표자인 김선기 선생님입니다.
ⓒ 박현국

관련사진보기


김선기 선생님은 자신이 대학교 1학년때 발굴 작업에 참가한 인구 하루 품삯이 1000원으로 일본돈 100엔 정도라고 말하자 학생들이 놀라기도 했습니다. 백제 무왕이 도읍지였던 부여가 아니고, 멀리 익산 금마에 여러 절을 지은 까닭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곳 익산 금마가 무왕이 태어난 곳이기 때문이 아닌가 보고 있습니다.

백제는 역사적으로도 일본과 가까웠습니다. 백제가 싸움에서 지자 당시 일본 조정에서 군대를 파견하여 백강에서 싸웠으나 졌다는 기록이 있습니다.(구당서 권199 열전149 동이백제전.) 다만 백강이 어느 곳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때 일본 조정은 백제에 지원군을 보낼 정도로 가까웠습니다.

백제 사람들은 불교 미륵신앙을 새롭게 해석하여 독창적인 절이나 탑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뛰어난 건축술이나 선진 기술을 이웃 신라나 일본에 전해주었습니다. 비록 백제 나라는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문화 유산은 발굴을 통해서 밝혀지고 있으면 일본에 남아있기도 합니다. 일본 학생들도 이번 강의를 통해서 백제의 뛰어난 기술이나 역사적인 사실 따위를 새롭게 알게 되었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국립전주박물관에 마련된 미륵사의 모형과 가람배치도입니다.
 국립전주박물관에 마련된 미륵사의 모형과 가람배치도입니다.
ⓒ 박현국

관련사진보기


참고누리집>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http://maback.wku.ac.kr/, 2017.6.13
참고 문헌> 일연, 삼국유사,

덧붙이는 글 | 박현국 기자는 일본 류코쿠(Ryukoku, 龍谷)대학 국제학부에서 일본 학생들에게 주로 우리말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태그:#미륵사지, #김선기 선생님,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석탑, #발굴 조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제가 일본에서 생활한지 20년이 되어갑니다. 이제 서서히 일본인의 문화와 삶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한국과 일본의 문화 이해와 상호 교류를 위해 뭔가를 해보고 싶습니다. 한국의 발달되 인터넷망과 일본의 보존된 자연을 조화시켜 서로 보듬어 안을 수 있는 교류를 기대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