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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우며 사는 삶이 멋진 삶이죠
 도우며 사는 삶이 멋진 삶이죠
ⓒ 강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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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 전, 유럽 국가들이 르네상스로 예술의 꽃을 피우고 있을 때, 스페인은 홀로 몰락하고 있었다. 그때 세르반테스는 소설 <돈키호테>를 통해 스페인 사회에 일갈을 날렸다.

"누가 미친 거요? 장차 이룩할 수 있는 세상을 상상하는 내가 미친 거요? 아니면 세상을 있는 그대로만 보는 사람이 미친 거요?"

돈키호테는 정의가 사라진 사회를 비판하며 방랑기사가 된다. 그는 스스로 기사가 된 이유가 '고아와 빈민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말하며 늘 소수자와 약자의 편에 서서 싸웠다. 

소설가 소재원(33)씨를 보면 세르반테스가 떠오른다. 세르반테스의 소설은 익살스럽지만, 그의 소설은 아프다. 소설 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우리 사회의 모습과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도 <터널>, <균>과 같은 작품을 통해 사회의 문제를 알리고, 약자의 목소리를 전하고 있다. 지난 10일 서울 잠실역 근처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다부진 체격에 큰 키. 그리고 '공유 코트'가 눈길을 끌었다. 소설가인지 연예인인지 헷갈렸다. 훈훈한 외모만 보면 그가 꽃길만 걸어 왔으리라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는 어두운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릴 때 공동화장실 딸린 5평 남짓 되는 방 하나에 아버지, 어머니, 나 이렇게 세 식구가 같이 살았어요. 아버지가 지체 3급 장애인이셨는데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재산을 다 날렸어요. 그 사건으로 13살 때 어머니께서 집을 나가셨어요. 끼니 걱정하는 게 일과였죠. 돈이 없어서 두 달 동안 라면으로 배를 채우기도 했고요."

불행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13살 소년에게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사실은 충격, 그 이상의 것이었다. 그 후 그의 인생은 부서지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떠난 자리엔 증오와 원망만이 남았다.

"버림받은 기분은 겪어보지 않고는 몰라요. 어머니를 정말 많이 원망했어요. 아버지도 미웠고요. 앞이 캄캄했어요. 어떻게 살아야 할지 길이 보이지 않았죠. 그땐 꿈도 없었고, 배우고 싶은 것도 없었어요. 그냥 하루하루를 원망 속에서 무의미하게 살았어요."

아버지는 아들에게 미안했고,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괴로웠다. 마음 한편으로는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아들이 걱정되기도 했다. 어느 날 아버지는 그에게 하고 싶은 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엄마에게 복수하고 싶다고 말했어요. 아버지께서 그러려면 '네가 뭐라도 되어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말씀하셨어요. 근데 떠오르는 직업이 많이 없더라고요. 결국 고민 끝에 생각한 직업이 소설가였어요. 왜냐면 그 당시 저는 '한국어'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소설은 한국어만 알면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아버지는 아들이 대학교에 진학하길 바랐다. 적어도 대학을 나와야 밥벌이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동안 꼬깃꼬깃 모아온 200만 원을 그에게 주며 대학 입학을 권유했다.

"미래의 제 모습에 자신이 없었어요. 대학공부를 하려면 학자금 대출을 받아야 하는데, 대학을 졸업해도 그 많은 돈을 갚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고요. 200만원으로 뭘 할까 생각하다가 그냥 그 돈을 들고 가출을 해버렸어요. 그리고 한 달 만에 그 돈을 다 써버렸죠."

젊은 날의 객기로 내린 선택은 그를 더 깊은 절망의 터널로 밀어넣었다. 아버지가 준 돈 200만 원을 탕진한 후, 그는 영등포역과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노숙 하며 구걸을 시작했다.

"어떻게든 먹고살아야 했어요. 처음엔 잘 안되더라고요. 구걸을 잘하기 위해서 행인들 표정 읽는 연습도 하고, 멘트를 적어서 말하는 연습도 했어요. 그 생활을 몇 개월 하니깐, 사람들 얼굴만 봐도 저 사람이 돈을 줄지 안 줄지 알겠더라고요."

그는 구걸하고 남는 시간에 소설을 썼다. 어느 소설가의 말처럼 펜 끝에 혼을 담아, 온몸으로 꾹꾹 밀어 썼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쓴 소설을 출판사에 투고하는 족족 거절 당했어요. 한국어만 알면 쉽게 쓰일 것 같던 소설도 생각대로 안 되더라고요. 그러던 중에 어떤 술집 매니저가 지나가면서 저에게 같이 일해보자며 명함을 주고 갔어요. 명함을 보니깐 호스트 바였어요. 그때는 소설을 쓰기 위해서 어떤 경험이든 절실했거든요. 고민 끝에 그 술집 매니저에게 전화했어요."

그는 업소에서 일하면서 보고 느낀 것을 매일 기록했다. 인간의 욕망. 화려함 뒤에 숨겨진 초라함. 끝없이 확장되는 공허함. 시간이 지나면서 습작 노트가 조금씩 쌓이기 시작했다.

"매일 일기 쓰듯이 소설을 썼어요. 그때 업소 일을 하면서 느꼈던 감정, 깨달음. 전부 다 글에 담았죠. 6개월 정도 지났을 때 나와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돈도 잘 벌리고, 먹고 살 걱정도 없겠다 싶었는데, 마음 한쪽에 아직 어머니가 계시더라고요. 힘들어도 어떻게든 글을 계속 써야지 어머니 앞에 설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는 업소에서 보고 느꼈던 모든 것들을 이 소설에 다 담았다
 그는 업소에서 보고 느꼈던 모든 것들을 이 소설에 다 담았다
ⓒ 당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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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6개월 동안 모은 습작 노트를 정리해서 소설 <나는 텐프로였다>를 출간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출간되자마자 그의 소설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2008년에는 윤종빈 감독이 그의 소설 <나는 텐프로였다>를 바탕으로 영화 <비스티 보이즈>를 제작하면서 세상은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는 어머니를 찾아갔다.

"어머니를 만나면 그때 왜 날 버렸냐고 따지려고 했어요. 어머니 앞에서 그동안 참았던 분노를 다 쏟아 내려고 했죠. 그런데 막상 어머니 앞에 서니깐 아무 말도 안 나왔어요. 한참을 서 있다가 나온 말이 '어머니'였어요. 그다음에 '보고 싶었다'는 말이 나왔어요."

어머니에게 복수하기 위해 미친 듯 걸었던 증오의 길은 사실 그리움의 길이었다. 그는 소설 <나는 텐프로였다>가 성공하자, 다음 소설도 잘될 줄 알았다. 다음 집필한 소설 <아비>도 6만 권 넘게 팔렸다. 하지만 그 다음 작품 <밤의 대한민국>을 출간하고, 그는 또 다른 위기를 겪었다.

"그 당시 200권 정도 팔렸어요. 문제는 출판사 직원들이 저 하나 때문에 큰 손해를 봤어요. 그 사건으로 저는 절필 선언을 하고 경기도 가평에 있는 산으로 들어갔어요. 거기서 2년 정도 숨어 지냈어요. 그때 아버지께서 저를 찾아오셔서 한마디 하시더라고요. '모든 사람이 다 널 사랑할 수 없다. 예수나 부처도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지 못했다'고요. 그 말씀이 큰 힘이 됐어요."

아버지의 말을 듣고 그는 오랫동안 놓았던 펜을 들었다. 홀로 산 속에서 쓴 작품 <희망의 날개를 찾아서>와 <형제>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데 성공했다. 그 후 집필한 <소원>과 <터널>이 영화화되면서 그는 대중의 사랑을 받는 소설가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약자를 대변하는 소설가라고 부른다.

그의소설 터널은 영화로 만들어졌다.
 그의소설 터널은 영화로 만들어졌다.
ⓒ 작가와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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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우리 모두가 약자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우리는 그 사실을 모르고 살아요. 지금의 사회 구조가 상위 10%만 잘 사는 구조라고 생각해요. 나머지 90%는 약자의 인생을 살거든요. 사람들이 저보고 약자를 대변한다고 하지만 저는 '우리'를 대변한다고 생각해요. 약자 이야기를 쓰는 게 아니라 우리 이야기를 쓰다 보니 약자 이야기가 나온 것 같아요."

그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모두 약한 사람이다. 치매 판정을 받은 아버지, 위안부 할머니, 성폭행을 당한 아이. 하나같이 사회의 관심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그는 언제부터 약자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걸까.

"20대 초반에 사고를 쳐서 사회봉사명령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때 한센 병 환자들을 찾아가서 봉사활동을 했어요. 처음엔 빨리 시간을 채우고 끝내자는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하루하루 환자들과 지내면서 그들의 표정이 보이는 거예요. 전부 다 웃고 있더라고요. 나보다 신체적으로 불편하고, 어려운 환경에서 사는데 행복해 보였어요. 그들의 모습이 저에게 '너는 그동안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 건지' 물어보는 것 같았어요. 그때 진지하게 앞으로의 삶에 대해서 생각을 했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가면서 살자고 다짐했어요."

그의 소설이 영화화되고, 대중에게 알려지면서 그의 삶은 바빠졌다. 여기저기서 출판 제의, 사업 제의가 들어왔다. 하지만 그에게는 남들과 다른 원칙이 있다. 글쓰기 말고 다른 일로 수익을 내지 않는 것이다.

"종종 다양한 사업 제안을 받아요. 시나리오 각색이나 지역 홍보대사, 가게운영 등 종류도 다양해요. 죄송하지만 다 거절했어요. 물론 글을 쓰면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에요. 돈도 많이 벌 수 있고요. 하지만 나 하나로 인해서, 다른 한 사람이 일자리를 잃는다고 생각하면 쉽게 수락 못해요."

글로써 우리의 이야기를 더 많이 세상에 알리고 싶어요
 글로써 우리의 이야기를 더 많이 세상에 알리고 싶어요
ⓒ 소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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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시를 저버리지 않는 세상을 생각하며 시를 쓰듯, 그의 바람은 약자들이 웃을 수 있는 세상을 꿈꾸며 계속 글을 쓰는 것이다.

"글로써 우리의 이야기를 더 많이 세상에 알리고 싶어요.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집에 사는가 보다, 누군가를 돕는 삶이 가장 폼 나는 삶이라고 생각해요. 조금 부족해도 같이 웃을 수 있으면 그것보다 더 행복한 삶은 없어요."

덧붙이는 글 | 월간 세상사는 아름다운 이야기 4월호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소재원, #터널,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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