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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공동체를 파괴하는 방아쇠, '트롤'
② "저 새X들은 왜 또 트롤짓인가?"

당신이 평소 게임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트롤'이란 말을 들어봤을지 모른다. 북유럽 신화 속 심술쟁이 괴물을 뜻했던 '트롤'은, 현대에 이르러 인터넷과 게임 공간에서 다른 사람들의 분노를 유발하고 반응을 이끌어내는 반사회적 행위(자)를 일컫는 말로 전유 됐다. 지난 연재들에서는 게임 속 여러 트롤 유형과, 그 발생 원인을 살펴봤다.

가장 빈번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언어폭력', 같은 팀원들의 플레이를 고의로 방해하는 '그리핑', 게이머들끼리 암묵적으로 통용되는 영웅 조합을 벗어나는 '꼴픽', 팀원끼리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정치질' 등. 유저들마다 심각하게 생각하는 트롤은 다양했다. 한편 인터뷰에 응한 게이머들은 지정 성별에 따라 미묘한 인식 차이가 있었다. 연재의 마지막인 이번 편, '그녀가 게임을 던진 이유'가 주목해볼 것은 바로 이 차이다.

연재 1편에서 살펴봤듯 인터뷰에 응한 대부분의 남성 게이머들은 언어폭력(성차별 발언도 언어폭력이다)을 트롤에 포함시키긴 했으나 우선순위가 다소 떨어졌으며 일부는 언어폭력조차 크게 개의치 않는 개인차도 보였다. 반면에 여성 게이머들은 언어폭력, 특히 성차별 발언을 트롤로 인식하는 경향이 명확했다. 이것은 중요한 차이다.

그녀는 왜 게임을 던지고 나갔을까
 그녀는 왜 게임을 던지고 나갔을까
ⓒ 하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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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문화사학자 요한 하위징아는 <호모 루덴스: 놀이하는 인간>에서 사기 놀이꾼과 놀이 파괴자를 구분하고 후자의 경우 놀이판에서 추방돼야 할 존재로 봤다. 왜냐하면, 사기 놀이꾼들은 표면적으로라도 놀이판과 그 규칙을 존중하는 척하는데 반해, 놀이 파괴자는 놀이 참여자들이 자신에 놀이에 관여하고 있다는 '환상'을 깨뜨려 놀이판 자체를 붕괴시키기 때문이다.

보통 게임 공동체 파괴자의 대표적인 유형은 고의로 같은 팀원들의 플레이를 방해하고 패배를 유도하는 그리핑형 트롤이 꼽힌다. 이와 달리 성차별로 인해 여성 게이머들의 환상이 깨지는 경우는, 패배를 유도 당해서라기보다는(대의 경우 게임 내 성차별자가 '팀의 패배를 원해서' 성차별 발언을 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놀이판에서 한 명의 '동등한 게이머'로 존중받고 있다는 신뢰가 깨질 때 발생하는 것 같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파국의 직접적인 원인 제공자인 성차별자를 또 다른 '놀이 파괴자'로 판별하고 응보적인 제재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제까지 대부분의 게임에서 성차별자는 '놀이 파괴자' 수준의 심각한 위협으로 인식되지 못해왔다. 이점은 '부모욕'이라고는 하지만, 대개 상대방의 모친의 여성성을 모욕하는 '패드립(패륜 드립)'을 꽤 많은 게이머들이 일상적으로 주고받거나 묵인해온 습속이 증거한다.

이들에게 언어폭력형 트롤들은 가끔 분노와 2차, 3차 트롤링을 유발하고 신고 글과 남초 커뮤니티에 후기를 남기고 싶게끔 하긴 하나, 대부분의 경우 일단 게임을 마치기 위해 암묵적으로 안고 갈 수 있었던 '덜 심각한' 위협에 가까웠던 것이다. 반면에 여성들은 이러한 게임 내 성차별 행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목소리를 낼 기회 자체를 '원천적으로' 차단 당했다. 이유는 지금부터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연스레 알게 될 것이다.

라이엇 게임즈사의 리그 오브 레전드(LOL, 롤) 채팅창. 게임 관련 커뮤니티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패드립 후기 중 한 사례다.
 라이엇 게임즈사의 리그 오브 레전드(LOL, 롤) 채팅창. 게임 관련 커뮤니티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패드립 후기 중 한 사례다.
ⓒ 라이엇 게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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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게임을 던지고 나간 이유

블리자드사의 인기 FPS 게임 오버워치 출시 초창기부터 게임을 즐겨온 최지연(25)씨는 최근 속상한 일을 겪었다고 한다. 게임 중 팀플레이를 위해 켜둔 음성채팅으로 성별이 드러나자, 목소리를 들은 팀원 중 한 명이 바로 추근대고 성희롱을 했기 때문이다. 추근대는 것이 싫었던 지연씨가 거절을 하자, 해당 팀원은 팀플레이에 비협조적으로 굴며 인신공격과 성희롱을 했다. 하지만 다른 팀원은 지연씨를 희롱하는 해당 팀원을 자중시키긴 커녕 "싸우지 마라"는 기계적 중립을 보였다.

심지어 지연씨에게 "왜 다 대꾸해주느냐"고 비난까지 했다. 지연씨와 그룹이었던 게이머가 "안 부끄럽냐? 남자 망신시키지 마라"고 경고를 해봤지만, 적팀까지 가세해 지연씨를 향해 차마 글로 옮기기 힘든 성희롱을 지속했다. "이 상황에서 받아치려면 나도 언피씨한(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방식을 쓰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게 답답하다." 지연씨의 말이다.

연재 1편에서 지연씨는 트롤의 전형으로 팀플레이를 신경 쓰지 않고 "고집 부리는 사람"을 꼽았다. 하지만 지연씨가 생각하기에 성차별 발언을 하는 사람도 충분히 트롤이다. "사실 고집부리는 사람은 딱히 저 때문에 고집부리는 것은 아니거든요. 반면에 성차별은 제가 특정되는 거잖아요. 제가 평소 멘탈이 강한 편인데도 멘탈이 깨질 정도라면 게임에 큰 영향을 준다는 거죠." 지연씨의 말이다.

ⓒ 최지연님 제공

음성채팅하나 켰을 뿐인데, 즉시 동등한 게이머로 존중받지 못하고 남성 게이머들이 집단으로 여성 게이머를 성적으로 대상화하고 인신공격하는 상황. 그 스트레스의 강도는 상상 이상인 것이다. 그럼에도 게임 내 성차별은 일상적으로 반복된다. 그래서 일부 여성 게이머들은 솔큐(혼자 다니며 팀게임에 참여하는 행위)보다는 아는 사람들과 다인큐(그룹을 지어 팀게임에 참여하는 행위)를 즐기는 것을 선호하며, 오버워치 관련 커뮤니티들에서 함께 게임 세계로 여행을 떠날 동성 친구를 찾는 글을 올리기도 한다.

다인큐가 보다 안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버워치를 반 년째 즐기고 있는 박현경(가명, 22)씨도 평소 솔큐(팀 내 동료 없이 혼자 플레이)보다 다인큐(친구를 맺은 게이머와 함께 플레이)를 많이 한다. 하지만 다인큐조차 성차별로부터 완벽히 현경씨를 보호하지는 못한다. 가령 여성이라는 이유로 특정 역할을 강요하는 경우가 흔하다. "팀에 루시우(남성 힐러 캐릭터) 등 이미 힐러(지원가)가 충분한데도 제 목소리를 듣고 '여자니까 메르시(여성 힐러 캐릭터)를 하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현경씨 뿐 아니라 오버워치 오픈 베타 때부터 게임을 즐겨온 김하영(가명, 21)씨도 성차별을 트롤로 본다. "아군에게 정서적 타격을 주면 게임에 영향을 주죠. 제가 성차별 발언을 들었을 때 타격이 굉장히 크더라고요. 아예 게임을 나와버린 적도 있어요. 도저히 진행을 못하겠어서요. 아예 게임을 던지게 할 정도라면, 또 의도적인 말이라면 저는 트롤링이 맞다고 생각해요." 물론 하영씨는 애초에 성별 노출을 피하려고 음성채팅에 잘 안 들어간다.

팀게임의 특성상 음성채팅은 게임 내에서 상위 티어로 승급하는데 꽤 많은 도움이 되는 시스템인데도(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므로), 성차별이 벌써부터 제약을 가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영씨도 가끔 음성채팅을 쓰고 싶을 때는 있다. "다들 하는데 나도 하고 싶다. 내가 왜 여자라고 못해야 돼? 나도 하고 싶어, 하고 들어갔죠. 그날이 제가 음성채팅을 한 첫날이었어요."

"인사를 했죠. 저 빼고 팀원들이 다 남자였거든요. 바로 '어 여자네? 여자네?'이런 반응이 나오고 오더를 내릴 때마다 '아 왜 이렇게 설레지'이러면서 자기들끼리 노는 거예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너무 무섭고 소외감이 느껴지더라고요." 하영씨의 말이다. 하영씨가 남성 게이머였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 여성임을 드러내는 순간 성차별조차 피하기 어려운데 성차별적 태도를 교정하게끔 문제 제기하는 것은 더 어렵다.

블리자드사의 다른 게임인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WOW)를 즐겼던 유지영(가명, 35)씨는 "제가 와우에서는 막공장(즉흥적으로 꾸리는 공격대의 대장)도 잡고 했었는데 오버워치에서는 마이크를 아예 안 킨다"고 말했다. "여자는 자기 목소리로 게임을 하려면 잘해야 해요. 기대치를 넘어서야만 인정을 받는 거죠. 마이크를 안 켜면 기대치가 낮아지고요. 오버워치 그랜드 마스터이고 게임을 했는데 여자 목소리가 들린다고 가정해보자고요."

"같은 편에 맥크리도 '그마'(그랜드마스터 등급)라고 하기엔 실력이 좀 그렇긴 한데 일단 여자 목소리가 들리면 얘(맥크리)는 잘 안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마'에 여자가 있으면 다 게구리(여성 프로게이머 김세윤씨) 급으로 잘 하지 않는 이상, 여왕벌 짓 해서 등급 올린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여성 유저가 눈부신 활약을 보이지 못하면 남성 유저 중 누군가가 트롤링을 할 때가 있고요." 지영씨의 말이다.

"결국 여성 유저가 마이크를 켜려면 '저 새끼가 좌절감을 품어도 멘탈을 잡아줄 수 있을 만한 나의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있어야 해요. 제가 마이크를 안 켜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지영씨는 여성에게만 엄격하게 적용되는 이런 잣대가 성차별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일련의 성차별들은 과연 소수의 일부 남성의 일탈 행동에 지나지 않을까. 하영씨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현재 PC방 알바로 일하는 그는 매일 같이 젊은 남성들을 본다.

"다들 평범하신 남성 분들이세요. 물론 저는 알바니까 저를 막 대하는 경우는 거의 없죠. 가끔 나이 어린 분들 중 그런 분들이 있긴 하지만 20대 중반쯤 되면 다들 굉장히 깍듯하셔요. 그런데 게임에 몰입하시면 오히려 그분들이 더 심하게 성차별을 드러내는 모습도 많이 봤어요. 남성에 대한 신뢰가 아주 팍팍 깎입니다."

게임 내 성차별자, '놀이 파괴자'로 간주하고 시스템 정비해야

현재 오버워치의 신고란에는 '성차별/성희롱'이 신고 항목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괴롭힘'이라는 포괄적인 항목이 있다. 그러나 여성 유저 일부는 '성차별/성희롱' 항목을 구체화해서 이것들이 반사회적 행위라는 것을 확실히 해주기를 원했다.
 현재 오버워치의 신고란에는 '성차별/성희롱'이 신고 항목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괴롭힘'이라는 포괄적인 항목이 있다. 그러나 여성 유저 일부는 '성차별/성희롱' 항목을 구체화해서 이것들이 반사회적 행위라는 것을 확실히 해주기를 원했다.
ⓒ 블리자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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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머가 동등한 게이머로 존중받고 있는다는 믿음이 깨지면, 게임 본연의 임무는 실패로 돌아간다. 결국 성차별자는 신뢰를 깨뜨려 게임 공동체에 균열을 내는 '놀이 파괴자'다. 대부분의 여성 인터뷰이들은 이러한 유형의 '놀이 파괴자'에 대한 게임 내 신고 시스템이 잘 정비돼 있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 "신고를 해도 성차별 발언한 사람한테 어떤 영향이 갔는지 알 수가 없죠. 피드백이 전혀 안 오니까요."

"게다가 핵(승부 조작용 프로그램)은 여러 명이 신고하면 핵 사용자의 게임 이용을 정지시켜버린다고 하는데 여성비하 신고는 저 혼자만 할 테니까요. 북미 서버는 게임 내 분위기가 아시아 서버와 다르다는 이야기가 주변 여성 게이머들 사이에서 나와요. 블리자드 본사가 한국 실정을 제대로 알면 가만히 있지는 않겠죠. 고객이니까요." 지연씨가 말했다.

"롤은 요즘 어떻게 처리했는지 피드백을 준다더라고요. 메일로요. 또 오버워치는 신고란에서 신고사항을 선택할 때 별도로 '성차별란'을 확실히 만들어줬면 해요." 하영씨가 덧붙였다. 성차별이 제재 대상이라는 것을 확실히 주지시켜줬으면 좋겠다는 여성 게이머들의 바람이다. 한편 개발사의 조치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견도 나왔다.

"저는 게임 플랫폼은 단지 접근성(accessibility)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플랫폼이든 역사를 만드는 것은 개발진이 통제할 수 없는 유저들이고요. 도덕은 결국 사람들이 만드니까요." 지영씨의 말이다. "초창기 때는 신고를 하면 바로 신고 당한 사람에게 불이익이 있고 하니까 사람들이 신고를 좀 무서워하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사람들이 많아지니까 관리도 어렵고 트롤들의 비율도 높아지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현경씨의 말이다.

청년참여연대가 온라인으로 실시한 '오버워치 내 성차별, 성희롱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많은 여성 게이머들이 게임 내 성차별을 인식하고 또 경험하고 있다. 연대 측은 지난 2월 중 8일간 온라인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으며 총 4478명이 설문에 참여했다. 이중 96.2%가 오버워치 내 성차별, 성희롱이 '있다'고 답했다.
 청년참여연대가 온라인으로 실시한 '오버워치 내 성차별, 성희롱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많은 여성 게이머들이 게임 내 성차별을 인식하고 또 경험하고 있다. 연대 측은 지난 2월 중 8일간 온라인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으며 총 4478명이 설문에 참여했다. 이중 96.2%가 오버워치 내 성차별, 성희롱이 '있다'고 답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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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놀이 너머의 '사회'를 상상해야 할 필요가 있는 이유다. 제재만으로는 성차별적 감정은 억눌릴 뿐 사라지지는 않으며, 억눌린 감정을 다른 때와 장소에서 풀려고 할 수도 있다. 다만 일단 게임은 즐겁고 봐야 한다. 괴로운 현실을 잠시 잊고 '또 다른 나'로 태어나 자기효능감과,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경험을 제공하고자 가상 공동체를 구축하는 것이 게임 본연의 임무다. 임시조치일지라도 개발사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시스템을 최적화해주길 바란다.

물론 인터뷰이 몇 명의 생각이 여성 게이머 전체의 의견을 대변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참여연대 부설 청년참여연대가 온라인으로 실시한 '오버워치 내 성차별, 성희롱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많은 여성 게이머들이 게임 내 성차별을 인식하고 또 경험하고 있다. 연대 측은 지난 2월 중 8일간 온라인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으며 총 4478명이 설문에 참여했다. 이중 96.2%가 오버워치 내 성차별, 성희롱이 '있다'고 답했으며, 이들 중 실제로 피해를 경험했다고 답한 여성은 3078명으로 총 여성 응답자 87%에 달했다.


태그:#오버워치, #성차별, #여성, #게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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