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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화순에 있는 조광조 유배지. 영정각을 중심으로 강당과 초가, 적려유허비가 자리하고 있다.
 전남 화순에 있는 조광조 유배지. 영정각을 중심으로 강당과 초가, 적려유허비가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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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년 같으면 연말 분위기가 서서히 달아오를 때다. 하지만 올해는 정국 탓인지, 그런 분위기를 느낄 수 없다. 정치적으로 큰 소용돌이를 겪고 있다. 헌정질서를 바로 잡고, 낡은 기득권을 청산하는 과정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옛날에도 정치 개혁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선시대 개혁정치의 상징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정암 조광조(1482∼1519)다. 정암이 짧은 유배생활을 하다가 사약을 받았던 곳이 전라남도 화순이다.

정암은 1519년(중종 14년) 발생한 기묘사화로 사형 위기에 처했다. 훈구세력에 의한 사림세력 숙청 사건이었다. 정암은 광화문 앞에 모인 성균관 유생 1000여 명의 호소로 사형 위기를 면했다. 그해 음력 11월 중순 능성현(전남 화순 능주)으로 귀양 보내졌다.

조광조 영정. 영정각 안에 모셔져 있다.
 조광조 영정. 영정각 안에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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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5일 능주에 도착, 25일 동안 귀양생활을 했다. 눈보라 치는 날 금부도사가 가져온 사약을 받고 37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임금 사랑하기를 어버이 사랑하듯 했고(愛君如愛父)/ 나라 걱정을 내 집 걱정하듯 했노라(憂國如憂家)// 밝은 해가 이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으니(白日臨下土)/ 내 충성된 마음을 환히 비추리라(昭昭照丹衷).'

조광조의 절명시다. 유배기간 말동무로 지내던 학포 양팽손(1488∼1545)이 은밀히 시신을 수습해 쌍봉사 앞 골짜기, 조대감골에 장사를 지냈다. 학포는 초라한 집을 한 채 지어 놓고 정암의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정암 조광조는 1510년(중종 5년) 진사에 장원한 이후 34살 때부터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사간원 정언, 홍문관 부제학을 지냈다. 임금 앞에서 학문을 강의했다. 그렇게 신임을 얻으면서 개혁정치인으로 떠올랐다.

사림파였던 정암은 유교를 근본으로 삼아 왕도정치를 실현하려 했다. 이를 위해 도교를 추앙하던 기존 훈구파의 부패와 비리를 공격했다. 1518년(중종 13년) 종2품의 대사헌(지금의 감사원장, 검찰총장)까지 올랐다.

'임금 사랑하기를 어버이 사랑하듯 했고, 나라 걱정을 내 집 걱정하듯 했노라' 정암의 절명시다. 강당에 걸려 있다.
 '임금 사랑하기를 어버이 사랑하듯 했고, 나라 걱정을 내 집 걱정하듯 했노라' 정암의 절명시다. 강당에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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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 조광조 유배지. 옛 강당을 복원해 놓았다. 정암의 절명시가 여기에 걸려 있다.
 정암 조광조 유배지. 옛 강당을 복원해 놓았다. 정암의 절명시가 여기에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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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은 여러 가지 개혁정책을 추진했다. 그 첫 번째가 위훈 삭제다. 중종반정으로 공신의 반열에 오른 103명 가운데 78명, 전체 공신 4분의 3의 거짓 공적을 삭제했다. 성리학 이념을 세우려고 도교 주관 제사였던 소격서도 철폐했다.

사회 실천운동으로 향약을 실시했다. 덕업상권(좋은 행실 서로 권장), 과실상규(나쁜 행실 서로 규제), 예속상교(서로 사귐에 예의 지킴), 환난상휼(걱정거리나 어려운 일 서로 도와줌)을 4대 덕목으로 한 향약이다.

시문과 시가 중심의 기존 과거제 대신, 학행과 덕행, 성리학적 소양을 보는 현량과를 도입해 혁신정치를 담당할 인재를 뽑았다. 일부 토지를 국유화해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균전제를 도입한 것도 그였다.

조광조 영정각. 복원된 초가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조광조 영정각. 복원된 초가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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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 적려유허비각. 정암의 유배 내력이 담긴 유허비를 감싸고 있다.
 조광조 적려유허비각. 정암의 유배 내력이 담긴 유허비를 감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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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앞선 탓일까. 기존 과거제를 무시하고, 성리학을 중요시한 현량과를 도입한 것이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개혁을 빠르고 과격하게 추진하면서, 이에 반대하는 세력을 배척했다. 훈구세력과 반정 공신들의 불만이 급등했다. 결국 세력화에 성공한 이들의 모함이 시작됐다.

주초위왕이 그것이다. 조씨가 역심을 품고 왕이 되려 한다는, 나뭇잎에 꿀을 발라 벌레가 먹도록 했다는 그 사건이다. 정암은 붕당을 지어 요직을 독차지하고 임금을 속여 국정을 어지럽혔다는 죄목으로 투옥됐다.

조광조는 투옥 다음날 중종한테 역모가 아니라는 해명문을 올렸다. 하지만 중종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서 사형의 위기를 맞았다. 성균관 유생들의 호소가 받아들여져 능주 귀양길에 올랐다.

조광조 적려유허비. 비석에 ‘정암 조광조 선생 적려유허비’라고 새겨져 있다.
 조광조 적려유허비. 비석에 ‘정암 조광조 선생 적려유허비’라고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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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 적려유허비 비문. 한글로 풀어 쓴 번역문이 유허비 앞에 세워져 있다.
 조광조 적려유허비 비문. 한글로 풀어 쓴 번역문이 유허비 앞에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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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이 귀양생활을 했던 화순에는 적려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적려란 귀양이나 유배돼 갔던 곳을 가리킨다. 유허비는 한 인물의 자취를 밝혀 후세에 알리려고 세운 비석이다. 정암의 옛 자취를 기록해 둔 비석이다. 1667년(현종 8년) 능주목사 민여로가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석 앞면에 '정암 조광조 선생 적려유허비'라고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선생의 유배 내력이 적혀 있다. 비문을 우암 송시열이 짓고, 글씨는 송준길이 썼다. 정암이 유배 때 생활했던 초가와 강당, 영정이 모셔져 있는 영정각이 복원돼 있다.

화순군 이양면에 있는 학포당. 정암의 유배기간 말동무로 지내던 학포 양팽손을 모시고 있다.
 화순군 이양면에 있는 학포당. 정암의 유배기간 말동무로 지내던 학포 양팽손을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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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봉사 대웅전. 조광조의 정치만큼이나 개혁적인 절집이다.
 쌍봉사 대웅전. 조광조의 정치만큼이나 개혁적인 절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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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 조광조 유배지를 돌아보고 죽수서원으로 간다. 죽수서원은 1570년(선조 3년) 사액서원으로 지어졌다. 정암과 그의 시신을 수습했던 학포를 배향했던 서원이다.

개혁적인 절집, 쌍봉사도 멀지 않다. 논두렁과 이어지는 평지에 자리하고 있다. 쌍봉사는 3층 모양의 대웅전으로 널리 알려진 절집이다. 높은 지붕의 대웅전을 생각해낸 발상도 색다른 절집이다.

극락전도 눈여겨봐야 한다. 조선시대에 조성된 목조상이 보존돼 있다. 지장전의 조각상도 진흙이 아닌, 나무로 만들어져 있다. T자형의 맞배지붕으로 된 호성전도 독특하다.

쌍봉사의 부도와 부도비도 아름답다. 철감선사탑과 철감선사탑비로 이름 붙은 부도와 부도비는 국보 제57호, 보물 제170호로 지정돼 있다. 조각과 장식이 화려해 석조 건조물의 극치로 평가받고 있다.

쌍봉사 철감선사탑. 석조 건축물의 극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쌍봉사 철감선사탑. 석조 건축물의 극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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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봉사 철감선사탑비. 철감선사탑과 함께 쌍봉사를 빛내는 주인공이다.
 쌍봉사 철감선사탑비. 철감선사탑과 함께 쌍봉사를 빛내는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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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정암 조광조, #주초위왕, #기묘사화, #조광조적려유허비, #화순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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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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