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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뚝은 독특한 우리문화의 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굴뚝은 오래된 마을의 가치와 문화,  집주인의 철학, 성품 그리고 그들 간의 상호 관계 속에 전화(轉化)되어 모양과 표정이 달라진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오래된 마을 옛집굴뚝을 찾아 모양과 표정에 함축되어 있는 철학과 이야기를 담아 연재하고자 한다. - 기자말

옛집 굴뚝으로 보기 드물게 크고 화려하다. 연화문, 국화문, 마름모·동그라미 기하문으로 공들여 장식하였다.
▲ 봉정마을 영류재 굴뚝 옛집 굴뚝으로 보기 드물게 크고 화려하다. 연화문, 국화문, 마름모·동그라미 기하문으로 공들여 장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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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곡성의 강은 섬진강과 보성강이다. 진안에서 출발해 임실-순창을 지나 곡성의 옥과와 입면-오곡을 훑고 압록에서 보성강물을 받아들인 뒤 구례-하동-광양으로 나가는 섬진강이 하나요, 보성에서 시작해 순천의 주암-곡성의 석곡과 죽곡을 지나 압록에서 섬진강물과 몸을 섞는 보성강이 또 다른 하나다.

섬진강은 임실에서는 오원천(烏院川), 순창에서는 적성강, 남원은 순자강, 곡성은 압록강, 구례에서는 잔수강, 구례를 지나 하동-광양에 이르러 섬진강이라 불린다. 임실-순창사람들에게 섬진강은 어쩌면 지도에 나오는 하나의 강쯤으로 여겨질지 모른다. 구례 어디쯤 가야 겨우 섬진강의 '섬'자 소리라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보성강도 보성에서는 정자천(강), 죽천이라고도 불리고 곡성에서는 대황천(강)이라 불렸다. 보성강(寶城江)으로 통칭된 것은 일제강점기다. 보성을 지나는 길이가 길어서 보성강이라 했다는 말이 있으나 보성(寶城)과 곡성(谷城)에서 한자씩 따왔다고 생각하면 두 고을 모두 서운해 하지 않을 듯하다.

봉정마을 가는 길

두 강이 만나는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두 강을 암수로 구분하곤 한다. 요천과 섬진강이 만나는 남원 금지에서는 섬진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요천이 숫강이고 섬진강을 암강이라 한다. 보성강과 섬진강이 만나는 압록에서는 보성강이 숫강, 섬진강을 암강으로 여긴다. 숫강 보성강이 다소곳한 섬진강을 옆에서 찝쩍거리며 달려들 때 암강 섬진강은 못이기는 척 받아들여 한 몸이 돼 광양으로 향한다.

보드랍고 야리야리하여 순정을 쏟고 싶어진다.
▲ 보성강 정경 보드랍고 야리야리하여 순정을 쏟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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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곡면 봉정마을 길에 들었다. 보성강을 거슬러 가는 길이다. 말만 거친 숫강인가, 보성강은 여성스런 사내, 보드랍고 훗훗했다. 강섶 버드나무는 하늘대고 혹독한 겨울을 견딘 강기슭 잡풀은 후끈한 봄기운 타올라 새 숨결이 열리고 있었다. 강물에 한번, 바람에 또 한 번 45도로 쓸린 잡초의 새 숨결이 열리는 소리에 보성강 물색은 연초록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태안사에서 태어나 태안사 코앞에 시문학관을 세워 그를 기리고 있다. 사진은 시어(詩語)로 그린 조태일 시인의 모습으로 문학관 안에 있다.
▲ 죽형, 조태일 시인 태안사에서 태어나 태안사 코앞에 시문학관을 세워 그를 기리고 있다. 사진은 시어(詩語)로 그린 조태일 시인의 모습으로 문학관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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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에 조태일시문학관에 들렀다. 태안사(泰安寺) 한발 앞에 있다. 태안사에서 대처승 아들로 태어난 그 연은 질기고 깊어 그리 된 것이다. 고은 시인은 '조국이 낳은 진솔한 시인, 6척 거구 조선대지의 사나이를 기리는 집'이라 했다. 굽은 시대에 독재에 맞서 시로써 저항하고 온몸으로 국토를 노래한 시인, 국토의 새 숨결이 열리려할 무렵, 1999년에 환갑을 못 넘기고 타계했다.

일주문을 앞두고 있는 누각다리. 능파각 풍광에 내 가슴은 ‘붉혔는데’ 그 옆을 지나는 스님은 내 마음을 읽었는지 모르는 척 무심히 그냥 지나가고 있다.
▲ 태안사 능파각 일주문을 앞두고 있는 누각다리. 능파각 풍광에 내 가슴은 ‘붉혔는데’ 그 옆을 지나는 스님은 내 마음을 읽었는지 모르는 척 무심히 그냥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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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땅, 죽곡(竹谷)을 향한 그리움인가, 그의 호는 죽형(竹兄)이다. 문학관에서 만난 그는 뜨거웠다. 곡성까지 휘몰아친 여순사건과 한국전쟁 통에 헤어졌던 혈육, 큰 형을 만난 양 내 몸도 뜨거워지니 어찌된 일인가? 책장 안에 고이 간직한 그의 시집을 다시 꺼내들어야 할지 모르는 싸늘한 세태 탓은 아닌지 모르겠다. 뜨거운 몸은 금세 태안사 능파각 물노래소리에 식어갔다. 비겁만 남기고 혈기는 물노래에 감추었으니 그럴 수밖에.

봉정마을의 '뽐낸 굴뚝'

적잖이 시간은 흘러 봉정(鳳停)마을로 서둘러 갔다. 봉황이 머문 마을이라니, 이름부터 명당마을을 암시한다. 용이 승천하였다는 용지골, 용소(龍沼)를 훑고 지나온 봉정천 냇물이 마을을 휘돌아간다. 세 그루 느티나무에 걸려있는 정자가 그럴싸하다. 300년 묵은 느티나무는 신수(神水)에 목말라 냇물에 목을 빼고 있다.

봉정천가에 심어진 300년 묵은 느티나무에 정자가 걸려있다. 느티나무 가지는 용소를 지나온 냇물에 목을 빼고 있다.
▲ 봉정마을 느티나무와 정자 봉정천가에 심어진 300년 묵은 느티나무에 정자가 걸려있다. 느티나무 가지는 용소를 지나온 냇물에 목을 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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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년 전, 범(范)씨와 박(朴)씨가 살았다고 해 범박(范朴)골로 불린 마을이 봉정마을 이웃에  있었다 하나 마을 역사에 대한 별다른 기록은 없다. 다만 300년 전 함안 조씨가 들어와 마을을 일궈 집성촌을 이뤘다는 말이 그나마 떠도는 정설이다. 애초 이 마을에 살다가 떠난 옥천 조씨가 다시 돌아왔고 심씨, 권씨, 이씨 등이 조금씩 모여 살아 한 동네를 이루고 있다.

예전 마을담은 모두 돌담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마을역사 기록처럼 끊어졌다 이어졌다 깜박대는 까만 돌담이 그렇게 얘기하고 있다. 육목단(六牧丹)은 잘못이라며 때 일러 핀 모란(목단)이 환하게 반기는데 황매화와 영산홍, 개꽃은 수줍어 돌담에 숨어 나오지도 못한다. 까칠한 폐가 굴뚝이든, 반드러운 사람 사는 집 굴뚝이든 키가 지붕 높이만하다. 마을 옛집, 영류재와 단산정사 굴뚝 닮아 그런 거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예전 이 마을담은 돌담이었던 것 같다. 아직 빈집 담을 중심으로 돌담이 많이 남아있다.
▲ 봉정마을 정경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예전 이 마을담은 돌담이었던 것 같다. 아직 빈집 담을 중심으로 돌담이 많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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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류재, 단산정사 굴뚝 닮은 걸까? 마을굴뚝은 유난히 키가 커 보인다.
▲ 봉정마을 폐가 굴뚝 영류재, 단산정사 굴뚝 닮은 걸까? 마을굴뚝은 유난히 키가 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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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옛집으로 봉정마을(봉정1리)에 영류재(永類齋)가 있고 죽성마을(봉정2리) 길목에 단산정사(丹山精舍)가 있으며 덕양마을(봉정3리)에 영사재(永思齋)가 있다. 모두 그리 오래된 집은 아니더라도 고상한 맛매는 나는 집들이다. 제일 오래된 영사재는 1856년에 건립된 함안 조씨 제각으로 봉정마을 건너에 있는 것으로 확인했으나 발길을 주지 못하고 말았다.

맨 처음 발들인 집은 영류재. 봉정마을 중심이 되는 집이다. 1917년에 조원규가 세운 함안 조씨 종회관(宗會館)이다. 종친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휴식을 하는 공간이며 인근 학동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치는 곳으로 활용됐다.

마당 곳곳에 괴석을 두고 한반도 모양의 연못을 꾸며 놓아 여간 정성을 들인 집이 아니다. 두 단의 석축 위에 집채를 올려 몸을 낮춰 올려보면 하늘에 떠 있는 둥지 같아 보인다.

영류재는 1917년에 지어진 함안조씨 종회관이다. 인근 학동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굴뚝을 크게 지어 권위를 드러냈다.
▲ 영류재와 굴뚝 영류재는 1917년에 지어진 함안조씨 종회관이다. 인근 학동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굴뚝을 크게 지어 권위를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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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뒤편 굴뚝은 허세를 부린 듯 크고 화려하다. 함안 조씨의 권위를 밖으로 맘껏 드러냈다. 궁궐에서도 이렇게 큰 굴뚝을 본적 없고, 절집에나 가야 볼 수 있는 집주인 개성이 뚜렷이 담긴 굴뚝이다.

굴뚝은 3단으로, 각 단마다 기와지붕을 얹고 기와조각으로 점선무늬를 놓았다. 암키와와 수키와로 연꽃문(蓮花紋)과 국화문, 전통기하문으로 마름모·동그라미문을 새겨 온갖 정성을 다했다. 1918년에 지어진 함양 허삼둘가옥이 솟을대문으로 외형을 뽐냈다면 이 집은 굴뚝으로 뽐냈다. 이 정도 정성과 기교라면 단순히 허세로만 보이지 않는다.

단산정사는 1919년에 조용준이 건립한 함안 조씨 사우(祠宇)다. 사우라고 소개돼 있으나 이 집은 정신을 수양하거나 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마련한 정사(精舍)가 더 어울린다. 굴뚝은 정사와 어울리지 않게 크고 높다. 궁에서만 쓰는 붉은 색을 마음대로 쓰는 시대라, 붉은 벽돌로 함안 조씨 권위를 맘껏 드러냈다. 오밀조밀한 영류재 굴뚝이 여성적이라면 단조로운 이 굴뚝은 남성적이다.

단산정사는 1919년에 지어진 정사다. 정사라 하기에는 굴뚝이 지나치게 크다.
▲ 단산정사와 굴뚝 단산정사는 1919년에 지어진 정사다. 정사라 하기에는 굴뚝이 지나치게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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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붉은 벽돌만 사용하여 만들었다. 굴뚝 꼭대기 연가(煙家) 부분도 기와를 사용하지 않고 붉은 벽돌로 각도만 달리하여 만들었다.
▲ 단산정사 굴뚝 오로지 붉은 벽돌만 사용하여 만들었다. 굴뚝 꼭대기 연가(煙家) 부분도 기와를 사용하지 않고 붉은 벽돌로 각도만 달리하여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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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곡성 마을이라도 군촌마을 함허정과 군지촌정사 굴뚝과 봉정마을의 영류재와 단산정사 굴뚝은 모양과 크기, 만든 생각과 철학이 너무나 다르다. 크고 화려한 집을 지은 1910~1920년대와 조선중후기 건축 양식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으나 산청 남사마을 사양정사처럼 1920년대에 지어졌어도 굴뚝은 낮고 작게 지은 정사도 있어 건축양식의 차이만은 아니다. 

청송 심씨가 군촌마을에 터 잡을 때 물러나 흔적 없이 살기를 원했다면 함안 조씨 일가는 물러나서 흔적을 남기지 않을 생각은 없어 보인다. 누구의 눈치도 볼 것 없다는 심산이다. 권위를 앞세워 '나 여기 있소' 하며 세상 밖으로 알리기를 원한 것처럼 보인다. 두 굴뚝으로만 보면 그렇게 보였다. 옳고 그름의 문제라기보다는 집주인의 생각, 철학이 다른 것이다.

덧붙이는 글 | 4월 17일~19일에 다녀와 쓴 글입니다.



태그:#봉정마을, #태안사, #조태일시문학관, #영류재, #단산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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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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