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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의 계정숲에 세워져 있는 비석들. 가장 입구에 경주부윤 이현배의 선정을 기리는 것이 서 있다. 경산 아닌 경주의 수령을 왜 경산시 자인면 사람들이 기리는 것일까?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의 계정숲에 세워져 있는 비석들. 가장 입구에 경주부윤 이현배의 선정을 기리는 것이 서 있다. 경산 아닌 경주의 수령을 왜 경산시 자인면 사람들이 기리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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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의 계정숲(경상북도 기념물 123호)에는 30여 기의 비석들이 줄지어 서 있다. 선정비, 공덕비, 불망비 등 대략 성격이 비슷한 것들로, 모두 조선 시대가 남긴 문화유산들이다. 그중 특히 경주부윤 이현배를 기리는 비석에 눈이 간다.

<통정대부부윤이령공현배인정비(通政大夫府尹李令公玄培仁政妃)>(아래 이공비)가 주목을 받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비석군의 맨 앞에 있기 때문이다. 안내판은 '원래는 신도동 대로 옆에 서 있던 것을 영구 보존하기 위해 계정숲 한장군 묘소 입구로 옮겨 세웠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비석들을 사람들 눈에 잘 띄고 관리하기 좋도록 본래 있던 곳에서 이리로 옮겼는데, 그중 이공비를 가장 눈에 두드러지는 곳에 배치했다는 뜻이다.

경산 사람들이 왜 경주 시장을 못 잊을까?

경주부윤 이현배를 기려 경북 경산시 자인면 계정숲에 세워져 있는 비석
 경주부윤 이현배를 기려 경북 경산시 자인면 계정숲에 세워져 있는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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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인면사무소는 약 430년 전인 1587년(선조 20)에 건립된 이공비를 무엇 때문에 최고의 명당자리에 놓았을까? 제대로 된 안내판이라면 그 까닭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을 리 없다. 해설을 읽어 보니, '이 비석은 자인에서 가장 오래된 비석 가운데 하나'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런데 문득 치밀어오르는 궁금증이 있다. 안내판의 해설을 느긋하게 끝까지 읽기만 해도 저절로 풀리는 의문인데 성격이 급한 탓이다. 경산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경주'부윤 이현배의 '어진 정치를 베풀어주신 공적을 기린 비'를 세운 것일까? 경산 자인 사람들이라면 경산 또는 자인의 수령을 지극정성으로 섬기는 것이 상식적이지 않나?

경산은 흔히 대구의 외곽으로 느껴진다. 대구 수성구 범어네거리에서 자인면 계정숲까지 약 22km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경주는 대구와 생활권이 아주 다르다. 범어네거리에서 경주 황성공원까지는 (22km의 3.3배에 이르는) 72km나 된다. 반면 황성공원에서 포항시청까지는 26km에 불과하다.

안내판은 경산 사람들이 경주시장(부윤)을 오랜 세월 동안 섬기고 있는 까닭에 대해서도 답변해준다. 아주 작지만 제 역할을 충분히 다하고 있는 안내판인 것이다. 안내판은 '자인은 당시 경주에 소속된 고을이었다'라고 말한다. 자인현이 경주부 관할이었으므로 자인 사람들이 경주시장 이현배의 훌륭한 정치를 잊지 못해 공덕비를 건립했다는 뜻이다.

이제, '과연 이현배가 선정을 한 것은 사실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자문자답을 해볼 차례이다. 혹 그가 좋은 정치를 한 것도 아닌데 누군가가 아부를 목적으로 실제와는 정반대가 되는 선정비를 세웠을지도 모른다. 심지어는, 이현배 본인이 백성들을 시켜 강제로 빗돌을 세웠는지 여부도 알아보아야 한다.

전북 고부 군자정(유형문화재 133호) 앞에 세워져 있는 반토막 난 선정비들. 동학혁명농민들이 부수어버린 것들이다.
 전북 고부 군자정(유형문화재 133호) 앞에 세워져 있는 반토막 난 선정비들. 동학혁명농민들이 부수어버린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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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그런 생각이 난 것은 전라북도 고부 군자정(君子亭) 뜰의 선정비들이 떠오른 때문이다. 1673년(현종 14) 처음 세워지고, 1764년(영조 40) 중건되고, 1900년 초 군내 인사들에 의해 다시 고쳐지는 역사를 가진 군자정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133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정작 방문을 했을 때는 정자 건물보다 앞뜰에 줄을 지어 놓여 있는 비석들에 더 눈길이 갔다. 하나같이 반토막이 난 선정비들이었던 까닭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계정숲의 비석들이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형태가 고이 보전된 것은 백성들이 반감을 가지고 선정비를 때려부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이현배의 선정을 사실로 인정하기는 어렵다. 그를 기리는 선정비가 경주 황성공원에도 세워져 있고, 그 비석문의 본문과 역대 경주부윤 등에 관한 19세기 관청 출간물 <경주선생안(慶州先生案)>의 내용이 일치하고 있다는 데에 좀 더 주목을 해야겠다.

조선 시대의 경주는 지금 경주와 다르다

조선 시대의 경주는 지금의 경주와 달랐다. '천년 서울'이었던 신라 시대에 비해서는 많이 위상이 떨어졌지만 그래도 지금 같은 소규모 지방 도시는 아니었다. 당시 경주는 현재의 경산시 자인면, 포항시 신광면과 죽장면, 영천시 동남부 일원 등을 두루 거느린 '경상도에서 가장 큰 도시(府於慶尙一道最鉅, 서거정 <신증동국여지승람>)'이자 '경계가 수백 리나 되는 영남에서 제일 큰 고을(최효식 <경주부의 임란항쟁사>)'이었다.   

그래서 경주에는 경상감영이 있었다. 지금의 부산광역시, 경상남도, 울산광역시, 대구광역시, 경상북도 전체의 행정권과 군사권을 가진 경상도관찰사를 경주부윤이 겸직했다. 경상감영이 상주와 안동 등지에 잠깐 머문 때만 제외하면, 1601년 대구로 완전히 옮겨가기 이전까지 경주는 영원한 신라의 서울이자 경상도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당연히 경주부윤은 아주 고관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경주부 관원조'는 경주부윤이 종2품이었다고 증언한다. 종2품이면 현대 사회의 차관급이다. 이현배는 45세이던 1585년 2월 6일 경주부윤으로 부임한다.

경주 황성공원에 세워져 있는 이현배 선정비. 줄지어 서 있는 빗돌들 중 (경산 자인 계정숲의 경우처럼) 가장 앞에 있는데, 특이한 점은 매우 크다는 것이다.
 경주 황성공원에 세워져 있는 이현배 선정비. 줄지어 서 있는 빗돌들 중 (경산 자인 계정숲의 경우처럼) 가장 앞에 있는데, 특이한 점은 매우 크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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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현배는 부임 1년 뒤인 이듬해 2월 15일 경주부윤을 그만두게 된다. 본인의 뜻에 따른 중도 퇴임이 아니었다. 조철제 국역 <경주선생안>에 따르면, 이현배 전후의 경주부윤 중 임기 만료(瓜滿還朝)로 물러난 사람은 조부(1575.10.1.-1578.1.25.), 강사필(1569.1.3.-1571.6.16.), 한옥(1565.5.4.-1567.11.10.), 구사맹(1586.3.21.-1588.10.15.) 등이다. 이들은 경주부윤의 임기가, <경국대전>에 밝혀져 있는 그대로, 900일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하지만 이현배는 370여 일만에 쫓겨났다. '부언(유언비어)'으로 말미암아 당한 '파직(파면)'이었다.

백성들은 선정비를 세웠는데 조정은 그를 파직시켰다? 저절로 의아심이 일어난다. 경주 황성공원의 <이부윤선정비(李府尹善政碑)>에 새겨져 있는 내용이 더욱 궁금해진다. 그러나 한문인 탓도 있지만 오랜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 너무나 희미해진 현지의 비석 문장을 일반인이 그 자리에서 해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최효식의 <경주부의 임란항쟁사>에 수록되어 있는 원문과 번역문을 읽어본다. (번역문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약간 가다듬은 것이다.)

경주 황성공원의 이현배 선정비. 높이가 2m를 넘는 아주 보기 드문 거대 빗돌이다.
 경주 황성공원의 이현배 선정비. 높이가 2m를 넘는 아주 보기 드문 거대 빗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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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公, 존칭)의 이름은 현배(玄培)요, 자(字, 본명 대신 부른 이름)는 선길(善吉)이며 성산인(星山人, 성주에 거주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성산이씨라는 의미)이다. 만력(萬曆, 1573년부터 1620년까지의 중국 명나라 황제) 을유년(1585년) 봄에 부임지(경주부)에 왔고, 다음해 봄에 부언(浮言, 유언비어)으로 파직(罷職, 벼슬에서 쫓겨남)되어 끝내 그 뜻을 펴지 못하니 애석하도다(以浮言見罷不終厥施惜).

찬(讚, 사람을 칭찬하는 문장)한다. 간사한 무리는 추상(秋霜, 가을의 서리)같이 꺾었고, 추운 겨울에도 사람들을 따뜻하게 하였도다(秋霜挫奸冬日暖人).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주는 것과 같은 덕망과, 맺힌 원한을 풀어주는 어진 정치를 베풀었도다(拯溺之德雪寃之仁). 외모는 옥소리처럼 맑았고 지조 또한 빙설(氷雪)과 같았다(標淸玉聲操潔氷雪). 영원히 잊지 못할 우리의 마음을 여기에 적으며 애통해 하노라(不網千載寄比鳴呼). 만력 15년 정해년(1587년) 10월 일'

백성들이 세운 비석의 내용은 이현배가 훌륭한 목민관이었음을 분명하게 증언해주는 듯하다. 게다가 고려 중기 이후 역대 경주부윤 등에 관한 관청측 공식 기록인 <경주선생안>도 이현배에 대해 비문과 같은 비평을 싣고 있다. '증익설원(拯溺雪寃) 표청조결(標淸操潔) 민사기택입비(民思其澤立碑)'라는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이현배는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내어 따뜻하게 감싸주었고, 한맺힌 억울함을 풀어 주었으며, 외모는 맑았고 지조가 깨끗하였으므로, 백성들이 그의 은혜를 생각하여 비석을 세웠다'는 뜻이다. 비문은 <경주선생안>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서 새겼다. 그렇게 백성들과 후임자의 한결같은 존경을 받은 이현배가 겨우 1년만에 경주부윤에서 쫓겨나는 비운을 맞이한 것이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 따뜻하게 감싸주는 방식의 '이현배표' 정치

1581년(선조 14) 성주목사였던 이현배는 조상들을 기리는 사당 안산영당을 수리했다. 영당(影堂)이라는 당호(집이름)이 말해주듯 안산영당에는 이 집안 조상들의 초상이 보관되어 있다. 사진은 경북 성주 월항면의 안산영당과 이조년 초상(오른쪽). 이조년에 대해서는 <이황이 말한 고려 500년 제1의 인물> 기사 참조.
 1581년(선조 14) 성주목사였던 이현배는 조상들을 기리는 사당 안산영당을 수리했다. 영당(影堂)이라는 당호(집이름)이 말해주듯 안산영당에는 이 집안 조상들의 초상이 보관되어 있다. 사진은 경북 성주 월항면의 안산영당과 이조년 초상(오른쪽). 이조년에 대해서는 <이황이 말한 고려 500년 제1의 인물> 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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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배를 파직시킨 '부언'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리고 그 유언비어는 당시 어떤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었을까? 한국 최초의 야담집인 유몽인(1559∼1623)의 <어우야담>에 실려 있는 이현배 관련 유언비어를 읽고, 이어서 최효식의 평가도 읽어본다.

'이현배가 진주 목사 때, 한 어부가 백어(白魚)를 바쳤는데 고기의 몸체가 완전히 하얀 백색이었다. 이현배의 첩이 이것을 삶아먹고 임신해 아이를 낳았다. 이 아이의 머리가 하얗고 피부도 옥같이 고왔으며, 눈동자는 약간 노랑색을 띤 백색이었다. 이 아이가 10세쯤 되어 독서를 하는데 매우 총명했고, 대낮에는 물체를 잘 보지 못했으며 태양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항상 땅을 내려다보고 행동했다. 그러나 밤에는 어두운 방안에서 작은 글자를 다 읽었다. 이에 뜻 있는 사람들은 이 아이가 '병상(兵象, 전쟁 징조)'이라고 걱정했는데, 13세에 죽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어우야담>)

'득세하고 있던 동인들이 서인의 걸목(장차 의지할 만한 재목)인 이현배를 제거하기 위해 당시 겨우 7세에 불과한 여옥을 빗댄 유언비어를 만들고 회유하려 하였으나 그는 끝내 불의라 생각하고 지조를 지키기 위해 타협하지 않았다.' (<경주부의 임란항쟁사>) 

최효식의 평문은 <경주선생안>과 <이부윤선정비>에 나오는 '(이현배는) 지조가 얼음과 눈  같았다'라는 표현의 의미를 알게 해준다. 동인들은 전쟁을 일으킬 아이를 낳았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이현배를 곤경에 빠뜨린 후 그에게 동인으로 활동할 것을 권유하였지만 '(이현배는 그것을) 불의라 생각하고 타협하지 않았다.' 최효식은 '경주인들은 이현배와 같은 강직하고 청렴한 부윤을 가졌던 까닭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목숨을 초개 같이 바쳐 경주읍성을 탈환하였고, 경주 지방을 고수하는 데 앞장설 수 있었던 것'이라고 평가한다.

1611년 조신통신사 정사의 평상 관복 모습(왼쪽)과 풍신수길 대면시의 복장. (합천의병관 전시물 재촬영)
 1611년 조신통신사 정사의 평상 관복 모습(왼쪽)과 풍신수길 대면시의 복장. (합천의병관 전시물 재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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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발발 당시 경주부윤은 윤인함이었다. 그런데 <경주선생안>을 살펴보면 그 직전 부윤이 황윤길이다. 황윤길이라면? 전쟁 직전 일본에 다녀와 풍신수길이 쳐들어 올 것이라고 보고한 통신사 정사이다. 부사 김성일은 그 반대의 보고를 했다.

황윤길은 서인이었고, 김성일은 동인이었다. 이현배도 서인이었다. 정권을 잡고 있던 동인 세력은 서인을 내치고 동인을 싸고도는 데에만 급급, 이현배를 내쫓은 것은 물론 황윤길의 보고도 묵살했다. 그리고 전쟁이 터졌다.

황윤길은 1588년 11월부터 1589년 10월까지 경주부윤으로 있었다. 일찌감치 파직된 이현배의 후임 구사맹이 경주부윤의 임기 930여 일을 모두 채운 다음인 1588년 11월 부임했다. 특히 황윤길은 1590년 5월 조선통신사 자격으로 경주에 묵었다. 당연히 경주의 유력 선비들은 잘 아는 사이인 황윤길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고, 그 대화는 임진왜란을 대비하는 밑거름이 되었을 터이다.

임진왜란 이전부터 선비들 모여 전쟁 걱정

경주 일원 선비들은 1590년(선조 23년) 8월 1일 처음으로 대규모 회합을 가졌다. 경주 11인, 울산 6인, (경북) 영천 2인, (경북) 안동, (경북 포항) 흥해, (경북 영덕) 영해 각 1인, 모두 22인이 참가한 이날 모임에서 선비들은 어떻게 하면 나라를 잘 경영하고 백성들을 평안하게 할 수 있을지를 두고 '경국안민책(經國安民策, 류정 <사의사실기>)'을 의논했다. 또 '지식인의 고뇌와 포부의 우국(憂國)의 정신이 넘쳐 흐르는(<경주부의 임란항쟁사>)' 시회(詩會)도 열었다. 이응춘, 김응하, 견천지, 이눌, 이계수, 김광복, 최홍국, 김춘룡, 김응생, 이여량, 이태립, 윤홍명, 류정, 서인충, 장희춘, 이경연, 류백춘, 정세아, 조덕기, 금난수, 정삼고, 김인제 등의 '동지(<사의사실기>)'들이 모인 곳은 불국사 범영루였다.

임진왜란 발발 훨씬 이전인 1590년 8월 1일에 경주 일원 선비들이 모여 나라를 걱정하는 논의를 나누었던 불국사 범영루.  선비들은 1591년 1월에도 이곳에 모여 전쟁 발발시 창의를 결의했다.
 임진왜란 발발 훨씬 이전인 1590년 8월 1일에 경주 일원 선비들이 모여 나라를 걱정하는 논의를 나누었던 불국사 범영루. 선비들은 1591년 1월에도 이곳에 모여 전쟁 발발시 창의를 결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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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1월에도 이눌, 이경한, 이백인, 이극복 등의 선비들은 범영루에 모여 전쟁이 일어나면 '함께 의병을 일으키기로 약속(約以同猖義兵)'하였다(이극복 <모석유고>). 또 김석견, 손시, 권사악, 최봉천, 백이소, 이의잠, 이준, 이눌, 김윤복, 황희안 등의 지식인들은 그해 봄 김문옹의 정자에서 시국을 논하였고(이의잠 <동호일고>), 그보다 이른 1591년 3월 3일에는 이눌, 이계수 등 6~7인이 이응벽의 정자 칠송당에 모여 '엄청난 전란의 조짐(大亂之兆)이 엿보이니 어찌 음우비(陰雨備, 전쟁 대비)가 없으리오?' 하며 대책을 논의하였다(이응벽 <칠송당실기>).

1591년 3월 16일에는 (경북 영천 신녕) 불골사(佛骨寺)에 모여 앞날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는 한편 앞으로 고생도 함께 하자는 맹세도 하였다. 김우옹, 이덕홍, 장현광, 조호익, 최동보, 홍한, 문위, 김응하, 이삼한, 이계수, 최인, 권춘란, 채선수, 박영수, 최근, 장응기, 박형, 백상대 등은 이날 굳게 맹세한 동고록(同苦錄)을 써서 그것을 금강문 대들보 위에 넣어두었다. 

이처럼 왜란을 대비하여 많은 사람들이 걱정을 나누고, 이런저런 대비도 한 사정은 견천지가 류정에게 보낸 '與柳汝元(여류여원)'에도 잘 나타나 있다. 견천지의 문집 <송고실기>에 실려 있는 편지의 일부를 읽어본다.

'(전략) 지금 인심들이 흉흉하고 잡다한 말들이 분분하여 남구(南寇, 일본) 왜적의 난리가 조석(朝夕, 빠른 시일 내)으로 다가올 것 같은데 이미 위망(危亡, 위험하고 망함)할 우려가 있을 줄 알고서야 어떻게 속수무책으로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릴 것입니까? (제가) 비록 어리석지만 약간 조도(調度, 정도껏 처리함)하여 둔 것이 만일의 불우(不虞, 뜻밖의)한 일에 대비할 수 있겠는데, 하물며 대군자(류정)께서는 (중략) 병기를 만들고 (중략) 곡식을 감추어 (중략) 여러 해 동안 경영하신 것이 모두 나라를 걱정한 성심(誠心, 지극한 마음)에서 나온 것으로서 (중략) 국토를 보장하기에 믿는 곳이 있어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략)'

1591년 3월 16일 선비들이 모여 앞날의 어려움을 함께 하자며 <동고록>을 작성했던 불골사(지금 명칭은 불굴사)의 봄과 겨울 풍경
 1591년 3월 16일 선비들이 모여 앞날의 어려움을 함께 하자며 <동고록>을 작성했던 불골사(지금 명칭은 불굴사)의 봄과 겨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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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조정의 권력을 가진 고관들은 전쟁 발발에 대한 논의와 준비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은 동서로 나뉘어 당파 싸움에만 골몰했다. 대표적인 것이 1589년(선조 22)에 일어난 소위 '정여립의 반란' 사건이었다. 본래 서인이었던 정여립이 동인으로 넘어간 후 서인들은 그를 몹시 미워했는데, 정여립이 모반을 꾀하고 있다는 고발이 들어오자 선조는 정철을 앞세워 1천여 동인 세력을 죽이는 기축옥사(己丑獄事)를 일으켰다.

정여립 죽은 뒤에도 기축옥사는 3년 동안이나 진행

정여립이 1589년 10월 죽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에도 기축옥사는 약 3년 동안이나 진행되었다. 하지만 1591년 윤삼월 14일,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자는 정철을 내쫓고 정권을 다시 동인에게 쥐어주었다. 그로부터 약 1년 뒤 전쟁이 터졌고, 불과 20일만에 한양까지 함락당하는 치욕을 당했다.

<7차 교육과정 (국정)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왜군에 의해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근과 질병으로 인구가 크게 줄어들었다. 토지 대장과 호적의 대부분이 없어져 국가 재정이 궁핍해지고, 식량도 부족해졌다. 또, 왜군의 약탈과 방화로 불국사, 서적, 실록 등 수많은 문화재가 손실되었고, 수만 명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라고 임진왜란의 피해를 기술하고 있다. 불굴사 <동고록>에는 당시 신분 차별에 시달리던 서자들까지 참여했지만, 전쟁 대비에 무관심 또는 무능했던 임금과 권력자들 때문에 그 피해는 고스란히 민중들이 덮어썼던 것이다.

충북 진천의 정철 신도비. 이 비각 바로 뒤에 정철을 기리는 송강사(사당)와 기념관, 시비 등이 있고, 왼쪽 산비탈의 오솔길로 들어서면 그의 묘소가 있다.
 충북 진천의 정철 신도비. 이 비각 바로 뒤에 정철을 기리는 송강사(사당)와 기념관, 시비 등이 있고, 왼쪽 산비탈의 오솔길로 들어서면 그의 묘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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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이현배, #정철, #기축옥사, #임진왜란, #정여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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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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