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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설 명절을 맞아 광주의 큰형님 댁에서 부모님(정홍면(82), 송경자(73))을 뵈었다. 이 기회에 한국전쟁 전후 두 분이 직접 겪으신 민간인 학살 증언을 채록하고자 약 한 시간가량 인터뷰하였다. 아버님은 전남 장성 북하면 원골(원동), 어머님은 전남 북하면 대악리가 고향이시고 거기 살던 무렵 한국전쟁을 겪으셨다.

김득중, 한홍구 등 여러 현대사 연구자들은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희생자가 100만 명 이상이라 말한다. 하지만 민간인 학살에 대한 철저한 조사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거창과 노근리, 경산 코발트 광산 학살 등 극히 일부 지역의 학살 사건이 조명됐을 뿐 아직 밝혀지지 않은 사건이 너무도 많은 실정이다.

이 인터뷰는 발생한 지 60년도 더 지난 사건들에 대한 두 분의 흐릿하고 단편적인 기억을 담았다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이런 기억과 증언이 모이고 또 모여 까맣게 잊혔던 민간인 학살사건들이 언젠가는 재조명될 수 있을 것이다. 장성 지역의 민간인 학살 사건을 재구성하는 데 작은 도움이나마 되길 바라는 뜻에서 이 인터뷰를 여기에 소개한다(가독성을 높이고자 사투리는 표준어로 바꾸었다). - 기자의 말

"반란군 밥 해줬다고 처형"

- 아버지 열네 살 때(1949년), ○○네 조부, ○○ 조부가 죽어 소달구지에 실려 원골 마을로 들어오는 장면을 보셨다고 하셨는데. 그분들이 왜 돌아가셨어요?
"반란군들 밥해줬다고. 반란군들이 산에 다니다가 배고프니까 동네로 들어와서 구장 집(오늘날 마을 이장의 집)을 찾곤 했어. 다른 집에서는 밥을 안 해주니까. 구장네 집을 찾아가 거기서 밥을 시켜먹곤 했지. 그것이 들통 났어. 반란군 밥해줬다고. 그 죄로 군인들이 데려다가 죽인 것이여."

- 반란군들이 원골에 자주 찾아왔어요? 원골만 찾아온 것이 아니었을 텐데요.
"그렇지. 사방에 산봉우리에다가 봉홧불 피우고 삐라 붙이고."

- 전쟁 전에 그런 일이 많이 있었네요? 근데 원골에선 아무튼 ○○ 조부, ○○ 조부가 걸렸군요. 그분들이 붙잡혀서 어디에서 죽었어요?
"장성읍 야은리에서 죽었어. 군인들이 총살했지."

- 재판도 없이요?
"재판이 다 뭐여. 무법천지였는데."

- 그냥 반란군 동조했다고 죽인 거예요?
"그렇지. 너희 외할아버지도 구장 하시다가 그런 식으로 똑같이 죽었어."

원골의 암고랑 가는 길. 중앙의 정자나무 있는 곳에서 대량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
▲ 원골의 암고랑 원골의 암고랑 가는 길. 중앙의 정자나무 있는 곳에서 대량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
ⓒ 정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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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장이던 외할아버지의 죽음

- 외할아버지는 어떻게 돌아가셨어요? 어머니가 얘기 좀 해보셔요.
"우리 아버지는... 나는 그때 다섯 살 때여. 돌아가신 지도 몰랐지. 할머니를 통해서 이야기를 계속 들었어. 반란군이 우리 동네에 많이 살았단다. 어느 날 반란군 연락병이 찾아오자 마을 사람들이 대학리 대방의 우리 집다가 데려다줬어. 우리 집에서 잠자리도 마련하고 밥을 해주라고 데려다줬지.

너희 외할아버지가 구장이라 별수 없이 밥을 해줬어. 요즘으로 말하자면 '서재'에서 자라고 했어. 근데 그 사람이 우리 아버지를 꾀어 데려오라는 지령을 받았던지 며칠 뒤 '이제 그만 가라'고 해도 안 가더란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가 '여기에 있으면 안 되니 가라'고 겨우 설득해 보냈는데 길마재를 넘어가며 한없이 뒤를 돌아보더래. 그래서 우리 아버지가 '저놈이 가다가 필시 뭔 일을 내고야 말 놈인가 보다' 하고 걱정을 했어. 그렇게 마지못해 재를 넘어가는 데까지 봤대. 근데 그 사람이 가다가 북이면 사거리에서 잡혔단다.

지서에서 조사하자 반란군 연락병인 게 드러났지. 그리고 '너 어디서 자고 오느냐?'고 묻자 그가 우리 아버지 집에서 자고 온다고 이야기를 한 거야. 당장 군인들이 차를 몰고 와 우리 아버지 서재의 책들을 마당에다 다 던져 놓고는 뒤적거렸어. 혹시 무슨 비밀문서나 있는 줄 알고. 근데 비밀문서는 아무것도 없고 책 속에서 우리 아버지 사진이 나오니 그 사진을 들고 나갔대.

그때 우리 아버지가 청년들 훈련대장이라 약수리에서 훈련을 시키고 그 청년들과 함께 돌아오던 중 북하 단전리 가는 길 서낭당 모퉁이에서 군인들을 만났지. 군인들이 '이 사진 주인 나오라'며 사진을 보였는데 그 사진이 우리 아버지인 거야. 대번 우리 아버지 얼굴이 흙빛이 되더란다.

그래서 군인들이 차에 싣고 가버렸어. 끌고 가 갖은 고문을 하였나 봐. 그러면서 거기에 반란군이 누구누구냐고 계속 캐물었나 보더라. 누구누구 할 것이 아니라 마을 주민이 다 반란군이여. 산간지역이다 보니 그 안동네까지 다 반란군들이 장악했거든. 어렸지만 나도 기억이 난다. 깃대골이라는 데서 처녀 총각들 데려다가 노래도 가르치고 그랬어. 그 언니들 노래 배우는 데서 나도 구경하고 그랬어."

- 그 노래 기억이 나요?
"몰라. 그건 기억이 안 나. 아무튼 그 안마을 전체가 따지고 보면 다 반란군이지."

- 시골 마을마다 반란군에 많이 동조했군요.
"살려고 그랬지. 밤에 갑자기 나타나 총 들고 설치고 그러면 어쩌겠냐. 살라면 어쩔 수 없지. 우리 아버지는 구장이고 그러니 데려다가 써먹으려는데 안 따라가니 연락병을 보내 잠을 재운 거여. 그래서 우리 아버지를 잡아다가 고문을 하면서 거기서 제일 우두머리가 누군지 불라고 했나 봐. 근데 우리 아버지가 고문을 당하면서도 불지 않으셨대. 불지 않고 하도 고문이 심하니 혀를 깨 물으셨단다. 그러자 악질이라면서 장성 동암면으로 끌고 가 죽였다더라."

- 고문은 어디서 당했어요?
"장성읍 어느 경찰서에서 당했어. 누군가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줬어. 시체도 맘대로 못 가져가는 때였어. 소달구지를 빌려 가지고 거적을 깔고 그 위에 마초를 깔고 데려왔대. 그대로 우리 동네를 못 들어오고 풍기라는 동네 앞에 놓고 우리 동네 청년들한테 부탁해서 풍기 뒷산에 묻었어. 그날 갑자기 우리 어머니가 집에서 옷을 챙겨갖고 막 울면서 나가셨어. 그러자 우리 할머니가 눈치를 채고 '뭔 일이 났는가 보다' 하고 통곡하셨고 동네 아주머니들이 마루에서 '뭔 일 없을 거'라며 할머니를 위로하던 기억이 난다.

그러고 나는 아무 철딱서니가 없어 그 동네 전○○씨 집에 놀러 갔어. 그 집이 동네에서 제일 크고 서당방도 있고 그랬거든. 그 집 마당에서 많은 아이와 뛰면서 놀고 있는데 마당의 샘에서 닭을 잡더라. 그래서 동네 아이들이랑 빙 둘러서 닭 잡는 것을 구경했어. 근데 닭 피가 아저씨 손에 묻는 걸 보고 내가 '오매, 더럽다. 손에 피가 묻는다'고 하자 그 아저씨가 '뭣이 더럽기는 더러워야. 니 아버지 줄라고 잡는다.' 그 말을 한 것이 기억이 난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는 눈에 안 보인 지가 오래됐고 집에 안 계신데 뭔 소릴까' 하며 내가 집에 돌아왔어. 할머니한테 '저기 ○○이네 집에서 닭을 잡는데 어떤 아저씨가 '니 아버지 줄라고 잡는다'고 했다'고 하니까 할머니가 '뭔 일이 났는가 보다'고 막 우시더라. 그걸 보고 이웃집 사람들이 '떼끼놈!' 하면서 '잘 알지도 못하는 소리 한다'고 나를 나무라더라.

나중에 커서 할머니와 이웃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총을 귀 있는데 대고 쏘아서 뇌가 다 흘러나왔대. 동네 사람들이 보는데 고모는 울고만 있고 어머니는 흘러나온 것을 막 밀어 넣더란다. 피를 수건으로 닦으면서. 그리고 새 옷을 입히더래. 그걸 보고 ○○댁이라는 분이 '그래도 부부간이 제일인가 보더라'고 말하더라.

우리 아버지 입던 옷을 벗기고 새 옷을 입히는데 몸이 부어 옷이 안 들어가더래. 그래서 우리 아버지 친구 ○○이라는 사람이 이빨로 옷을 찢어 벗기고 자기 러닝셔츠로 피를 닦았다더라. 그 이야기를 듣고 항상 명절 돌아오면 그 집에 쌀을 갖다 주곤 했어. 그 은혜를 못 잊어서."

- 그때 외할아버지 연세가 어떻게 되셨어요?
"스물여섯 살."

"부자지간 줄 뺨을 때리게 했다"

원골 암고랑 정나나무들 밑의 신우대가 보인다
▲ 암고랑 정자나무들 원골 암고랑 정나나무들 밑의 신우대가 보인다
ⓒ 정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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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조부, ○○ 조부가 돌아가시고 그다음에 뭔 일이 있었어요? 아버지가 보신 것만 이야기 좀 해보셔요.
"학교 갔다가 돌아오는데 북상 지서 앞에 논배미에 동네 사람들을 모두 데려다가 부자지간에 '줄뺨' 때리고 그러더라. 그때 너희 할아버지는 어떻게 잘못 맞았는지 이마에서 피가 많이 나서 더 이상 안 두들겨 맞았어. 누가 때렸는지 좌우간 이마에서 피가 많이 났어. 그 장면만 알아. 서로 때리게도 했고 경찰이 때리기도 했어. '야, 새꺄. 요렇게 때리라니까' 하면서."

- 때리는 시간이 얼마나 됐어요?
"시간을 내가 어떻게 알겠냐. 학교 갔다 오니 그러고 있는데. 몇 시부터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암튼 하루 종일 그랬을 거다. 지서 앞에 논배미가 있어. 그 논배미에 세워 놓고 그랬어."

- 아버지는 그거 보면서 어땠어요?
"아, 치가 떨리지. 그때부터 원골 사람들은 빨갱이 마을 취급당했다. 일정시대 때 아버지는 1학년이었고 김○○라는 사람이 6학년 급장이었어. 그 사람하고 양○○ 씨가 원골서는 경비대 출신이야. 경비대 시절에 군대에 가서 계급이 높아. 그 두 사람 빽(뒷배경)으로 원골이 그나마 유지했어. 김○○라는 사람은 군사정부 때 황룡 면장까지 했어. 중령 계급 달고."

- 그 당시 원골이 65호 살았고 그때는 자식도 많이 낳고 그랬으니 적어도 200명 넘게 잡아다 그랬겠네요?
"몇 명인지는 몰라. 아무튼 논배미에 꽉 찼어."

- 전쟁 이후에 또 민간인 학살 사건을 목격하셨거나 들으셨던 거 있으면 이야기해 보세요. 원골 암고랑에서도 사람이 많이 죽었다면서요.
"그건 반란군들이 죽인 것이지. 우리 큰 밭 있지? 그 앞에 신우대(조릿대) 난 자리 있더냐. 거기다가 한 백여 명 죽였어. 내가 알기로."

- 죽이는 장면을 직접 보셨어요?
"직접 보지는 못하고 총소리만 들었고, 그 앞에 묻어 놓은 걸 봤지."

- 어디 사람들을 죽였어요?
"주로 덕재 사람들이지. 경찰이나 군경 가족. 지주들... 또 비석거리 앞 우리 밭 있지? 거기다도 얼마나 사람들을 많이 갖다 죽였는지 아버지가 무서워서 한동안 그 밭을 짓지 않았다. 한 세 구루마 정도는 사람들을 죽였을 거다."

- 그건 누가 죽였어요?
"거기는 국군이 죽인 거 같아. 화룡 가자면 도중에 자투리 밭이 있어. 새가장 보(장성댐 생기기 전에 있던 보) 있는데 6.25 당시에 화룡에 이○○ 라는 분이 그 밭을 5~6년 벌었어."

- 낮에는 국군, 밤에는 인민군 그랬군요.
"그땐 베트남하고 똑같아."

- 어머니, 혹시 반란군이 죽인 사람들은 누군지 아세요?
"반란군한테 죽은 사람들은 밤에 산에 끌고 가서 죽이니까 누군지도 몰라. 우리 친구들 아버지가 하룻저녁에 스물다섯 명이 없어졌단다. 한동네에서 뻔히 위아래 집에 살면서도 원수사지 않으려고 쉬쉬하고 그러니까 몰라."

동네 친구 권○○의 실종

- 전에 아버지 친구 권○○씨도 죽었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죽었지요?
"원동 사람이고 아버지하고 동갑이다. 화룡 앞에 초소에서 잡혀서 죽었지. 그때는 호적등본이 증명이여. 그걸 들고 다녀야 했어. 호적등본을 보니 그의 형이 있잖으냐. 경비병이 '너희 형은 어디 갔냐?' 하고 묻자 '반란군 따라갔어요'라고 답했지. 그러자 두말할 것 없이 데리고 가서 죽여버린 거여."

- 반란군 가족이라는 이유로요?
"그랬겠지."

- 그건 직접 보신 거예요?
"나하고 둘이 걸어갈 때 있었던 일이야. '너희 형은 어디 갔냐?' 하니 '반란군 따라갔어요' 그랬어. 6.25 터진 뒤 군인들이 진주했을 때였어. 죽이는 건 못 봤지만 그때 끌려가서 돌아오지 않았으니 죽은 줄 아는 거지. 시신도 못 찾았어. ○○는 달음박질 하면 날다시피 했어. 그렇게 달음박질을 잘했어. 근데 그렇게 죽었다. 나는 초소 통과해서 용두리로 갔지. 피란을 용두리로 갔으니 늘 원골로 왔다 갔다 했지. 먹을 것을 가지러. 동네 친구 하나가 그날로 없어졌어."


태그:#민간인 학살, #반란군, #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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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솔샘교회(solsam.zio.to) 목사입니다. '정의와 평화가 입맞추는 세상' 함께 꿈꾸며 이루어 가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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