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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서울 시청광장에서 퀴어(성소수자)문화축제가 개막을 알렸다. 28일로 예정된 퍼레이드는 변경된 집회신고 절차로 인해 혼선을 겪기도 했다. 한달 전이던 신고 날짜가 일주일 앞당겨지면서 주최측과 반대측이 차례로 줄서서 대기한 것이다. 지난해 성소수자 축제 당시 퍼레이드 행렬 앞에 드러눕던 사람들에 이어, 올해는 더욱 조직적인 방해가 계속되는 중이다.

앞서 지난 7일에는 SBS 다큐스페셜 <우리 결혼했어요>가 방영된 바 있다. 이날의 방송분은 국내외 동성 결혼의 사례를 다루면서 성소수자의 인권을 소재로 삼았다(관련기사 : 동성 결혼 무조건 반대? 이 커플들을 보라!). 방송 이후 시청자 게시판에는 '동성애를 미화했다'는 내용의 항의 글이 쏟아졌다.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기보다 "보고 싶지 않은 내용을 방영했다"며 "실망했다"고 적은 경우가 많았다.

"동성애자는 지옥 간다" 등 성소수자를 향한 막말은 지난달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 행사, 지난해 12월 서울시민인권헌장 제정 공청회 현장에서도 있었다. 당초 '성소수자 차별 금지 조항'을 담았던 서울시민인권헌장은 동성애 혐오를 주장하는 보수·종교단체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혀 결국 서울특별시측에서 폐기를 선언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엿보이는 혐오의 사례들

페이스북 '김치녀' 페이지 메인 화면. 여성 비하의 내용이 주로 담겼다.
 페이스북 '김치녀' 페이지 메인 화면. 여성 비하의 내용이 주로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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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한 동성애 혐오와 더불어 최근 화제가 된 '여성 혐오' 이슈도 한국에서 엿보이는 혐오의 사례들 중 하나다. '김치녀'나 '된장녀' 등 각종 여성비하로 쌓인 울분이 터져나온 계기 중 하나는 지난 2월 논란이 된 김태훈씨의 칼럼이었다. 패션지 <그라치아> 48호에 그는 'IS보다 무뇌아 페미니즘이 더 위험하다'는 제목의 글을 게재했다.

"페미니스트들이 도대체 김군에게 뭘 어쨌기에 '차라리' 그 무시무시한 IS를 제 발로 찾아가는 선택을 했을까? (중략) 현재의 페미니즘은 뭔가 이상하다. 무뇌아적인 남성보다 더 무뇌아적이다." (칼럼 'IS보다 무뇌아 페미니즘이 더 위험하다' 중 일부분)

이에 "페미니스트가 싫다"는 글을 남기고 IS에 가담한 청년에게 김태훈씨가 감정을 이입하면서 페미니즘을 왜곡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여성 혐오를 드러냈다는 지적에 김태훈씨가 출연하는 프로그램과 강연을 향한 보이콧 운동이 온라인에서 벌어졌고, 결국 그는 자신의 글에 대해서 사과해야만 했다.

4월에는 장동민씨가 화두로 떠올랐다. 팟캐스트 '옹달샘과 꿈꾸는 라디오'의 작년 방송분에서 "여성은 멍청하다"나 "개같은 X" 등의 발언을 했다는 이유였다. 이후 삼풍백화점 참사 피해자를 조롱한 발언까지 드러나면서 당사자로부터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현재는 취하된 상태다). 결국 방송을 함께 제작한 유세윤, 유상무씨와 함께 사과를 위한 기자회견을 했지만 사과내용과 대상을 뚜렷하게 언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판은 계속됐다.

이후 장동민씨가 JTBC <마녀사냥>에서 여성 진행자에게 외친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고. 내가 싫어하는 모든 것을 갖췄다"는 발언도 문제로 지적됐다. 프로그램에 함께 출연한 사람에게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침묵을 강요하는 태도라는 것이었다.

'혐오의 투명성'과 정당화 도구로의 활용

지난해 방송된 21부작 다큐멘터리 <EBS 포커스> '혐오'편 중 일부. 소위 '개념녀'가 남성들이 비하하는 '김치녀'에 대비되는 개념에 불과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지난해 방송된 21부작 다큐멘터리 <EBS 포커스> '혐오'편 중 일부. 소위 '개념녀'가 남성들이 비하하는 '김치녀'에 대비되는 개념에 불과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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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여성과 성소수자, 장애인과 같이 상대적으로 약한 계층을 겨냥한 혐오 발언이 만연한 상태라는 분석도 늘어나고 있다. 특정 집단을 비하하는 유명인의 발언들이 연이어 문제로 제기되면서, 이런 태도가 그저 '일베'(일간베스트 저장소)같은 커뮤니티에만 해당하지 않는다는 말도 나왔다. 여태까지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던 말들이 사실 편견에 바탕을 두었다는 사실에서 '혐오의 투명성'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이는 혐오 발언의 맥락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동조하는 사람도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일상에서도 '투명화된 혐오'의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온라인에서 한국 여성 전반을 비하하는 의미로 쓰이는 '김치녀'는 이제 '일베' 바깥에서도 얼마든지 쓰이는 단어가 됐다. "나는 일베에 접속하지 않는다"는 남자들마저도, 정치적 성향을 떠나서 여성을 비난하는 경우가 빈번해졌다. 실제로 인터넷에서는 이와 유사한 내용의 글이 곳곳에서 발견되는 사례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인기 소셜네트워크 서비스인 페이스북에서는 '김치녀'라는 이름의 페이지가 다수 생겨났다. 가장 사람들의 관심이 많이 모인 곳은 10만 명이 '좋아요'를 누른 상태다. 여기서는 여성에 대해 "데이트 비용은 무조건 남자가 내도록 만드는" 얄미운 이미지를 담은 글이 게시·공유된다. 해당 페이지에서 유통되는 비난의 공통점을 추려보면 '여자들은 의무를 포기하고 권리만 챙기려는 나쁜 존재들이다'라는 정도로 압축할 수 있다. 유사한 이름의 페이지는 페이스북에서만 20개 이상 검색된다.

다양한 집단을 향한 비하 발언에서 의도를 찾아보면 공통분모가 보인다. 나와 내가 속한 집단이 추구하는 가치에 부합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도무지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인정할 수 없다는 심리적 반발심이다. 남자의 의무를 덜어주고 권리를 포기한 '개념녀'가 아니면 모두 파렴치한 '김치녀'로, 남녀간의 사랑을 나누는 '이성애자'가 아니면 퇴폐적인 '동성애자'로 구분하는 식이다.

주로 '전라도 출신'을 모욕하는 뜻으로 쓰이지만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사람'을 '홍어'라는 단어로 부르는 것 역시 '애국보수'와 대비된다. 결국 혐오 발언의 활용은 '상대방을 깎아내리는 의도'로 사용되는 경우와 이를 통해서 '발화 주체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정리된다. 나와 대립하는 인물이나 집단을 '비정상(비윤리적)'으로 매도하면 자연스럽게 나는 '정상인'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다.

한국이 혐오사회의 수렁에서 벗어나려면

지난해 방송된 21부작 다큐멘터리 <EBS 포커스> '혐오'편 중 일부. 중앙대 사회학과 이나영 교수는 '딱지 붙이기'라는 개념으로 약자를 타자화하고 혐오가 이루어지는 현상을 설명했다.
 지난해 방송된 21부작 다큐멘터리 <EBS 포커스> '혐오'편 중 일부. 중앙대 사회학과 이나영 교수는 '딱지 붙이기'라는 개념으로 약자를 타자화하고 혐오가 이루어지는 현상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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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박권일씨는 이와 같은 현상을 '약자의 약자에 대한 혐오'라고 표현한 바 있다. 지난해 방송된 21부작 다큐멘터리 <EBS 포커스> 5회 '혐오'편에 출연한 박권일씨는 혐오 발언의 주체들이 "사회 전체적으로 봤을 때 10대90의 사회라고 본다면 대부분 90에 속하는 사람들"이라고 언급했다. 개인들의 분노가 권위를 가진 집단으로 향하지 않고 수평화된 상태라는 의미다. 해당 방송분에서는 작년 광화문 광장에서 노숙 중이던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쏟아진 비난도 유사한 원인의 문제로 분석했다.

같은 프로그램에서 중앙대 사회학과 이나영 교수는 약자를 타자화하고 혐오하는 현상을 '딱지 붙이기' 개념으로 설명했다. 이 교수는 "주체들은 스스로 딱지를 붙이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분류체계가 많다는 것은 그 사람(집단)이 사회적 약자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남성이 돈을 내도록 하면 '김치녀', 본인의 돈을 쓰면 '된장녀' 등으로 끊임없이 불명예스러운 이름이 덧붙여지는 여성의 사례가 언급된 경우에 속한다. 과학적 근거없이 '에이즈의 주범'이나 '동성애를 전염시키는 숙주'로 불리는 성소수자도 비슷한 처지다.

결국 차별의 근거가 되는 편견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미국과 독일 등의 국가는 혐오 발언도 범죄의 영역으로 규정하고 '혐오금지법'을 제정하여 억제하고 있다. 일본 오사카 시의회도 지난 5일 전국 최초로 '차별적 증오표현' 금지 조례안을 제출하고 심의에 들어간 상태다. 한국도 '차별금지법'을 토대로 사람들의 인식에 앞서 법을 통한 규제로 나서야 할까? 서울시민인권헌장의 사례를 보면 이마저도 쉽지 않겠지만, 최소한 논의의 장을 더 크게 마련해야 할 필요성은 분명할 것 같다.

세대, 성별, 성적 지향, 인종과 정치적 견해를 두고 벌어지는 각종 차별과 편견에 어떤 방식으로 대응해야 할지 답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할 시기다. 점차 짙어지는 혐오 발언들이 다양한 계층의 증오를 서서히 확대·재생산하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EBS 다큐가 지적한 것처럼, 도처에서 혐오가 터져나오는 사회 안에서는 누구든지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극혐('극단적 혐오'의 줄임말)한다"는 말이 신조어로 등장하는 2015년의 상황에서, 지금이라도 한국이 혐오 사회의 수렁에서 벗어나려면 대중적인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보편적 인권의 교육과 함께 "정체성을 이유로 한 혐오는 안된다"는 사회적 합의가 새삼 절실한 오늘날이다.


태그:#혐오 발언, #차별금지법, #성소수자, #여성 혐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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