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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면의 글씨는 동학농민혁명 태안군 기념사업회 2대 회장이었던 정동협(전 태안부군수) 선생이 썼고, 후면의 기포지 설명문은 태안의 향토사학자 김영규 선생과 문영식 내포유족회장이 함께 지었다.
▲ 동학농민혁명 태안 기포지 기념비 모습 전면의 글씨는 동학농민혁명 태안군 기념사업회 2대 회장이었던 정동협(전 태안부군수) 선생이 썼고, 후면의 기포지 설명문은 태안의 향토사학자 김영규 선생과 문영식 내포유족회장이 함께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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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군 근흥면 두야리에 300년 뿌리를 두고 있는 나는 토박이로서의 긍지를 어느 정도는 지니고 산다. 이 긍지 속에는 향토애와 사명감 같은 것이 똬리를 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고장 정신문화의 틀거지를 늘 추구하며 산다.

일찍이 우리 고장 태안의 가장 큰 자랑거리로 '동학농민혁명'을 꼽은 바 있다. 많은 이들이 해안국립공원으로 지정될 정도의 빼어난 풍광을 가장 큰 자랑거리로 여기지만, 그것은 정신적인 것이 아니다. 지리적이고 환경적인 것은 늘 가변적이다. '개발귀신'의 위협이 상존하며 노정되기도 한다. 그것의 실례를 천수만 파괴와 상실이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 고장은 120여 년 전의 조상들로부터 자랑스러운 정신적 유산을 물려받았다. '동학정신'의 웅혼한 발현이 120여 년 전 우리 고장에서 있었다. 북접(北接) 동학농민혁명군이 최초 기포를 한 곳이고, 최후까지 항전을 한 곳이며, 수많은 동학농민혁명군이 장렬히 전사하거나 참살을 당한 곳이다.        

120여 년 전 동학농민혁명군이 발현시켰던 옹골찬 기상, 보국안민(輔國安民)·제폭구민(除暴救民)·광제창생(廣濟蒼生)·척양척외(斥洋斥倭) 등으로 제시된 '동학정신'은 역사의 시련 속에서도 연면히 이어져서 오늘의 민주정신과 시민정신의 역사적 토대가 되었다.

그런 동학정신의 발현이 우리 고장에서 있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우리 고장 태안을 역사의 고장, 동학정신이 살아 있는 고장으로 승화시켜 준다. 다시 말해 우리 고장 태안은 운명적으로 민주정신과 시민정신의 선봉적 위치에 서 있는 셈이다.

하지만 우리 고장 태안에서 기포했던 북접 동학농민혁명군은 호남지방의 남접 동학농민혁명군에 비해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다. 동학이라고 하면 우선 호남의 남접이 연상될 정도였다. 게다가 일제와 친일 독재정권의 오랜 계승 속에서 동학농민혁명은 역사교과서에도 '동학란'으로 표현되며 평가절하의 올가미에 묶여 있었다.

한국서부발전주식회사 태안발전본부 본관 앞마당의 중심부에 세워진 동학농민혁명 태안 기포지 기념비 제막식의 한 장면
▲ 기포비 제막식 한국서부발전주식회사 태안발전본부 본관 앞마당의 중심부에 세워진 동학농민혁명 태안 기포지 기념비 제막식의 한 장면
ⓒ 장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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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북접 동학농민혁명군 지도자의 후예이며 증인인 문원덕 선생이 1964년 태안에서 '동학정신선양회'와 '동학농민혁명군 유족회'를 결성하고, 북접 동학농민혁명군의 최후 항전지였던 백화산에 1978년 '갑오동학혁명군 추모탑'을 세움으로써 우리 고장 동학농민혁명의 실체가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1998년에는 '동학농민혁명 태안군 기념사업회'가 출범하여 유족회와 함께 정기적인 추모제를 비롯한 갖가지 사업을 전개함으로써 이제 동학농민혁명은 명실상부한 우리 고장의 자랑스러운 역사로 자리 잡았고, '동학정신'은 '태안정신'으로 계승되었다.

그것을 확인시켜 주는 두 가지 사건이 최근에 있었다. 태안읍 백화산 '교장바위'의 안내판이 바뀐 것이 한 가지 사건이다. '校長바위'라는 이름이 '絞杖바위'로 바뀌고, 校長바위에 대한 안내판이 絞杖바위에 대한 안내판으로 바뀐 것이다.

사실은 바뀐 것이 아니라 원래의 이름을 되찾은 것이다. 絞杖바위가 校長바위로 이름이 바뀌어버린 경위를 규명하며 원래의 이름인 絞杖을 되찾아야 한다는 논설들이 줄기차게 있었다. 필자도 여러 차례 그런 논지를 폈다. 하지만 오랫동안 실효가 없어 암울한 마음이었다.

그러다가 한상기 현 군수가 취임하면서 일시에 고장의 숙제 하나가 풀렸다. 그것은 현 한상기 군수가 일찍부터 '絞杖'의 논지를 깊이 수긍했다는 뜻이고, '동학정신'의 현양에 동참한다는 뜻이며, 오랫동안 지면들에 제시되는 '絞杖바위' 논지들을 관찰해왔다는 사실의 반증일 터이다. 한상기 군수는 오랫동안 '읽고 쓰는' 생활을 해왔으니, 그런 결단이 좀 더 용이했을 것이다. 아무튼 고맙고 존경스러운 마음 크다

동학농민혁명 태안 기포지 기념비 제막식 행사장에서 한상기 태안군수가 김경재 태안발전본부장에게 감사패를 전달하고 있다.
▲ 감사패 전달 동학농민혁명 태안 기포지 기념비 제막식 행사장에서 한상기 태안군수가 김경재 태안발전본부장에게 감사패를 전달하고 있다.
ⓒ 장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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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가지 사건은 원북면 방갈리 태안화력발전소 안에 있는 북접 동학농민혁명군 기포지에 기념비가 세워진 일이다. 태안군에서도 거들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한국서부발전주식회사(사장 조인국)와 한국서부발전 태안발전본부(본부장 김경재)의 적극적인 관심에 이은 냉철한 판단의 결과로 이해된다.

그 일의 의미와 중요성을 깊이 살피고 결단을 내리면서 기념비 제작과 설치, 제막식에 따르는 비용 일체를 도맡아 준 한국서부발전주식회사와 태안발전본부에 고장 주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5월 22일 오전의 기포지 기념비 제막식에 참석했던 사람으로서 깊이 감사한다.

이제 태안발전본부는 북접 동학농민혁명군 최초 기포지의 흔적마저 없애고 그 위에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서 있는 존재가 아니다. 역사의 현장을 깔고 앉아 있는 거대 기간산업 시설이 아니라, 역사의 현장을 알뜰히 보존하며 품에 안고 있는, 너울가지 큰 자세를 견지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태안발전본부는 좀 더 자랑스러운 모습일 수 있다. 태안발전본부 경내에 있는 북접 동학농민혁명군 기포지, 그 역사의 현장을 보존하고 기념하기 위해 비석을 세우고 관리를 도맡는다는 사실은 그대로 태안발전본부의 품위와 풍모를 일신시켜 주는 일이다.

고장의 한 곳을 점유하고 있는 거대 기업이 고장의 역사와 문화 쪽으로도 세심한 관심을 갖고 계승과 유지를 위해 디딤돌의 역할을 해주는 것은 큰 미덕이자 포기할 수 없는 명제일 것이다.

태안발전본부의 뜻 있는 결단을 계기로 다시 한 번 거대 기업과 고장의 바람직한 관계를 많은 고장 주민들이 생각해볼 수 있었다.

동학농민혁명 태안 기포지 기념비 제막식 행사장에서 문영식 내포유족회장이 비석 제작을 맡아준 ‘보령예석’ 김종복 사장에게 감사패를 전달하고 있다.
▲ 감사패 전달 동학농민혁명 태안 기포지 기념비 제막식 행사장에서 문영식 내포유족회장이 비석 제작을 맡아준 ‘보령예석’ 김종복 사장에게 감사패를 전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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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충남 태안의 <태안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동학농민혁명, #북접 동학농민혁명군 기포지, #기포지 기념비, #태안군 원북면 방갈리, #서부발전주식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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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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