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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다오 시내에서 한국인이 많이 사는 아파트와 한국 가게들이 모여 있는 명인광장. 왼쪽에 롯데리아가 보인다.
 칭다오 시내에서 한국인이 많이 사는 아파트와 한국 가게들이 모여 있는 명인광장. 왼쪽에 롯데리아가 보인다.
ⓒ 김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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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은 말이에요, 한국 사람이 아니죠. 그저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중국인이라고 보면 돼요. 차라리 한족이 나아요. 한족은 진짜 중국인이니까. 그거 알아요? 한족도 조선족을 안 좋아한다는 걸. 아무튼 사기꾼도 있으니 조심하세요."

"한국 사람들은 왜 우리를 조선족이라고 불러요? 조선족이란 말은 중국인들이나 쓰는 말인데, 한국인들도 남 부르듯이 맨날 조선족, 조선족... 미국이나 일본에 사는 한국인한테는 교포니 동포니 하면서, 왜 우리한테만 따로 조선족이라고 불러요? 우리는 같은 동포가 아닌가요?"

한국인 K씨와 중국동포 미스 리의 말은 내게 충격이었다. 적나라한 말보다, 말에 숨어 있는 불신과 상처 때문이었다. 국적만 놓고 보면 중국동포는 한국인이 아니다.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그들의 언어와 전통을 지켜왔으니 한국말을 할 줄 안다. K씨의 말대로 중국동포는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중국인이다.

그런데 말의 뉘앙스가 다르다. 깔보고 의심한다. 중국동포를 중국인으로 구분하고 다시 한족과 구별하면서 '이등 중국인'쯤으로 본다. 중국동포는 한국에서도 종종 그런 대접을 받는다. 일부 중국동포가 한국에서 사건사고를 일으키면 모든 중국동포를 싸잡아 욕하며 이렇게 말한다. "너희 나라로 돌아가!"

"역시 조선족은 믿으면 안 돼..."

그 '너희 나라'인 중국에 처음 온 한국인은 대개 중국말도 안 되고 중국 실정도 잘 모른다. 사업이든 장사든 처음에는 중국동포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사업이나 장사를 안 하더라도 한국인의 일상생활은 중국동포와 연결되어 있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휴대폰 가게, 한국식당, 한국마트, 한국 빵집, 한국식 목욕탕의 직원들은 대부분 중국동포들이다. 집을 구하려고 해도 언어문제 때문에 중국동포가 없으면 곤란하다.

칭다오에는 한국인이 많은 만큼 중국동포도 많았다. 익숙한 한국어와 덜 익숙한 연변 말이 교차하는 현장에서 막연한 느낌의 '한민족'이 떠올랐다. 100여 년 전 중국으로 건너온 선조들을 상상해보곤 했다. 그들의 후손들을 눈앞에서 직접 만나 말을 트고 거래를 하는 것이 신기하고 때로는 감동스러웠다.

그런 나에게 중국생활 선배격인 한국인 K씨가 조언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제2, 제3의 K씨가 등장했다. 그들은 한국인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을 들려주었다.

'믿었던 경리가 간밤에 회사 돈을 들고 튀었다더라, 중국인과 합작 사업을 연결시켜주던 사람이 알고 보니 사기꾼이었다더라, 사기꾼에게 돈만 날리고 빈털터리가 된 한국인은 귀국하지도 못하고 중국에서 불법체류자로 떠돌고 있다더라, 그런데 그 경리와 사기꾼이 조선족이라더라, 역시 조선족은 믿으면 안 돼...'

낯선 땅에 와서 가뜩이나 의심 많고 불안한 사람들에게 그런 소문은 붙들고 있어야 할 참고서가 된다. '직접 경험했거나 본 이야기냐'는 나의 질문에 돌아오는 대답은 대개 '똥인지 된장인지, 꼭 먹어봐야 아냐'는 식이었다.

중국동포 미스 리가 구해준 첫 번째 집. 이곳에서 중국어와 중국 실정에 무지한 내가 중국동포의 존재감을 알게 되었다.
 중국동포 미스 리가 구해준 첫 번째 집. 이곳에서 중국어와 중국 실정에 무지한 내가 중국동포의 존재감을 알게 되었다.
ⓒ 김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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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동포 미스 리는 내가 칭다오에 온 첫 해 부동산 중개소에서 만났다. 목청이 크고 발랄한 20대 초반의 미스 리는 그 무렵 부동산 일을 막 시작한 초짜였다. 그래서인지 한국인이 선호하는 집 스타일을 잘 몰랐다. 나는 미스 리가 보여주는 집마다 퇴짜를 놓았다. 그녀가 대놓고 궁시렁거리지는 않았지만 가끔 그녀의 지친 얼굴에서 '저 인간, 참 까다롭다'가 얼핏 보였다.

겨우 집을 구했지만 그곳에서 살기는 더 어려웠다. 당시 나는 중국어를 몰랐던 터라 집에 문제가 생기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때마다 나는 미스 리에게 전화를 했다. 아파트 관리소 직원이나 집주인을 만날 때 미스 리가 와서 통역을 했다. 가전제품이 고장났을 때는 미스 리가 대신 애프터서비스 신청 전화를 해주었다. 심지어 격월로 각각 따로 내는 공과금이나 겨울 난방비를 낼 때도 미스 리를 불러야 했다.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상황과 불편함이 계속되면서 나는 점점 짜증이 났다. 한국인답게 '빨리 빨리'를 재촉하는 나, 갈수록 내 전화를 받지 않는 미스 리, 어쩌다 전화 연결이 되어도 속사포처럼 쏘아대어 알아들을 수 없는 미스 리의 말투... 이 모든 것이 불만스러웠다.

그러던 어느 날 미스 리가 떡을 가지고 왔다. 알고 보니 그녀 가족 모두가 고향을 떠나 칭다오에서 떡집을 하고 있었다. 우리 집 근처 한국마트에 납품하는 길에 내 생각이 나서 들렀단다. 따뜻한 떡 한 뭉치를 받고나니 집 문제로 내가 겪었던 불편함이 나의 문제였지 미스 리의 탓이 아님을 새삼 깨달았다. 간만에 나긋나긋해진 분위기에서 우리는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미스 리는 줄곧 집안 일만 거들다가 부동산 일을 하면 돈을 더 잘 벌 수 있다고 해서 이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 일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닌 것 같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오로지 돈벌이만 생각하고 앞도 뒤도 안 볼 것 같던 사람이... 미스 리가 아니었던가?

그동안 내 눈엔 차돌같이 단단한 중국동포의 생활력만 보였지, 매일 고민하고 갈등하는 20대 청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보다 미스 리가 어리다는 것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누구랄 것도 없이 나도 중국동포에 대한 제한된 이미지를 전제로 미스 리를 봐왔던 것이다. 한국인은 이렇고 중국동포는 저렇다는 생각은 미스 리도 마찬가지였다.

"한국 사람들은 돈을 너무 헤프게 쓰고 돈 자랑이 심해요."
"미스 리, 조선족은 어떻고? 말을 하면 시비를 거는 건지 싸움을 하자는 건지, 듣다보면 불쾌해져. 일하는 태도는 또 어떻고? 시작과 끝이 너무 달라. 돈 받고 나면 땡이야. 서비스는 엉망이구."

하지만 이것도 따지고 보면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미스 리가 상대해온 한국인은 중국에 처음 살러 와서 아직 환율 적응이 안 된 상태, 더구나 초반에는 온통 살 것뿐인 데다 한국에서의 소비습관과 구매기준이 그대로이다. 근검절약이 몸에 밴 중국동포의 눈에는 한국인의 씀씀이가 낭비로 비춰질 수 있다.

대화를 하자는 건지 싸움을 하자는 건지 아리송한 미스 리의 말투도 내 귀에 연변 말이 낯선 탓이지, 그녀의 심성 탓은 아니다. 일하는 태도도 미스 리는 복비를 다 받고 나서 '땡' 하지 않았다. 간간이 통화하기가 힘들었지만 집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해결해 주려고 노력을 했다. 물론 소문에 등장할 만한 이상한 한국인과 중국동포도 있다. 문제는 특수한 사례가 보편적인 인식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참, 궁금한 게 있는데... 한국 사람들은 왜 우리를 조선족이라고 불러요? 그건 중국사람들이 우리한테 하는 말인데... 우리는 같은 동포가 아닌가요?"

"우리는 여러분에게 무엇입니까?"

순간 나는 당황했다. 그때까지 나도 아무 생각 없이, 남들 하는 대로, 조선족 조선족 그랬으니까. 미스 리의 말대로, 미국에 이민 간 한국인을 재미교포라고 부르지, 미국인처럼 한국계 미국인이라고 따로 부르지 않는다. 일제 강점기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시절의 이민자 후손인지, 교포 1세인지 2세인지, 가리지 않고 통상 재미교포라고 부른다.

하지만 재중교포는 좀 다르다. 대개 한중수교 이후 중국에 와서 살고 있는 한국인을 재중교포라고 부른다. 일제강점기에 가난을 피해, 혹은 독립을 위해 중국에 건너온 사람들의 자손은 조선족이라고 부른다. 그것이 과거 서구 선진국에 대한 열등의식과 동경의 잔재 때문인지, 남한과 북한, 미국과 중국으로 편을 갈라온 한국 현대사의 특수성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얼마 전부터 그런 호칭 문제를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들리지만 아직 뚜렷한 변화는 없다.

아무튼 나는 그날부터 그들을 조선족이 아닌 중국동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좀 지나니 의문이 생겼다. 중국동포는 자신의 단체 이름마다 꼭 '조선족'을 넣는다. 그럴 때 '조선족'은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단어이지 숨기고 싶은 이름이 아니다. 중국동포가 스스로를 조선족이라고 말할 때와 한국인이 조선족이라고 부를 때 무슨 차이라도 있는 걸까. 몇 년 후 나는 선전(深圳)에서 만난 중국동포를 통해 그 차이를 확인하게 되었다. 

그는 오랫동안 선전에서 한국인 관광객을 상대해온 가이드였다. 건축전공자들인 우리 일행은 남들 다 가는 코스 대신 '이 건축 보고 싶다, 저 건축 보여 달라'며 수시로 일정을 바꾸었다. 그날 그는 우리가 요구하는 장소를 알아보느라 바빴고 평소 외워온 가이드 정보를 말할 기회도 없었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자 우리는 또 예정된 식당 대신 가이드가 평소 잘 가는 식당으로 가자고 했다. 그가 안내한 곳은 어느 뒷골목에 있는 중국동포 식당이었다.

우리는 찌개와 탕, 꼬치구이를 시켜놓고 고픈 배를 채웠다. 그동안 가이드는 으레 그렇다는 듯이 다른 테이블에서 혼자 식사를 했다. 변덕스런 우리 때문에 무척 피곤해 보였다. 술잔이 돌 무렵 우리가 가이드를 불렀다. 같이 마시자는 말에 그가 머뭇거렸다. 술이 약하다는 그에게, '오늘 수고했고 고맙다'며 소주잔을 건넸다.

아직 자기 일이 다 안 끝났다며 사양하는 그에게, '그럼 지금 다 끝났으니 같이 마시자'며 다시 잔을 내밀었다. 소주잔과 맥주잔이 몇 순배 파도를 타자, 다들 알딸딸해졌다. 대화 주제가 경제특구 선전의 발전과 건축에서 중국동포 사회로 넘어갔다. 그가 화제의 주인공이 되었다.

"어릴 때 우리 할아버지가 제일 싫어하신 게 뭔지 아세요? 밖에서 중국 아이들에게 맞고 들어오는 거였어요. 우리끼리 싸우면 '동포끼리 사이좋게 지내라' 하시던 양반이 중국 애들한테 맞으면 불같이 화를 내며, '나가 죽어라' 하시는 거예요. 공부든 뭐든 조선 사람이 얕보이면 안 된다면서. 개방되기 전까지 우리는 교육열도 높고 부지런해서 잘 사는 민족이었어요. 경제가 바뀌면서 다들 돈 벌러 한국이나 중국 대도시로 뿔뿔이 흩어졌죠. 그런데 질문 하나 해도 됩니까? 솔직히 대답해 주셔야 해요. 우리는 여러분에게 무엇입니까?"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나이 지긋한 교수님이 대답했다.

"뭐긴 뭐야. 같은 동포지."
"저는요. 솔직히, 한국 사람들을 만나면 제가 '서자'가 된 기분이 듭니다. 할아버지가 말씀하시던 조선 사람은 어디에 있는지... 서럽고 외롭고 그렇습니다. 그래도 오늘은 바로 동포라는 말을 들으니까 기분이 좋네요."

그는 붉다 못해 자주색이 된 얼굴로 헤벌레 웃었다. 양쪽 어금니 사이에 까맣게 빈 공간이 보였다. 그 텅 빈 공간이 그의 마음 같았다.

"누님... 통역용으로 나를 쓰지 마세요"

내가 근무하는 이공대에도 중국동포가 있었다. J교수와 교직원 K선생은 모두 연변이 고향이고 연변대학 출신이다. J교수는 한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이공대 교수로 왔다. 한국생활을 오래 했고 중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그런지 서울 말씨였다. 말투는 부드럽고 느릿느릿, 매사 급할 것도 억척을 부릴 것도 없이 순탄하게 살아온 사람 같았다.

K선생은 민족대학 역사학과 출신답게 '조선족'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동시에 공산당원으로서 충성심과 자긍심도 높았다. 그의 연변 말투는 또렷하고 매서웠다. 젊은 나이에 자신의 입지를 다질 만큼 영리하고 정치적인 감각이 있는 야심가로 보였다. K선생을 보면 '모국은 한국, 조국은 중국'이라는 말이 절로 연상되었다.

그래서인지 초반에 K선생과 한국인 교수들 사이에 미묘한 갈등과 오해가 불거지곤 했다. 좀 예민한 사람은 K선생이 원리원칙을 따지며 규율을 강조할 때마다, 같은 민족이면서 한국인에게 되게 빡빡하게 군다, 중국 사람보다 더 독하다, 한국에 뭐 맺힌 거라도 있나, 불평을 했다.

좀 삐딱한 사람은 K선생이 회의 시간에 통역으로 나오면 괜스레 의심부터 했다. 그런 오해와 힘겨루기는 2년 정도 지나자 슬그머니 사라졌다. 중국인과 중국생활에 적응하면서 각자 다른 사회에서 다르게 살아온 차이를 알게 되었고, 어쨌거나 그래도 같은 민족이라며 서로 챙겨주는 부분도 생겼다.

한국 유학파인 J교수는 처음에는 K선생보다 훨씬 편했다. 전공과 업무도 비슷하고 대화하는 동안 이질감도 거의 못 느꼈다. 그런데 이공대에서 한중 심포지엄이 열렸을 때, 나는 J교수의 다른 면을 보게 되었다. 한국 학생들의 콩글리시와 중국 학생들의 칭글리시에도 설계작품과 논문 발표는 논문집과 파워포인트 덕에 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질의응답 시간엔 답답하도록 흐름이 자꾸 뚝뚝 끊기고 산만해졌다. 나는 한국어와 중국어가 다 되는 J교수가 통역자로 나서서 그 분위기를 바꿔 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J교수는 대략 난감한 표정으로 피하려고만 했다. 어수선한 분위기가 계속되자 결국 J교수가 끼어들었지만, 나는 이미 적잖이 실망한 후였다. 그날 밤 회식을 마친 후 합승한 택시 안에서 J교수가 술이 잔뜩 취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누님, 우리는... 같은 사람으로... 만납시다. 통역용으로 나를 쓰지 마시고..."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다. 이쪽저쪽을 오가며 양분을 섭취하고 혜택을 받은 교수 신분의 사람이 옹졸하게 왜 이러나 싶었다. 그러다 퍼뜩 드는 생각이, J교수도 한국에서 중국동포라는 이유로 얕보였을까, 혹시 중국에서도 은밀하게 그러한 시선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두 언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것은 굉장한 장점인데, J교수는 왜 그 장점을 숨기려는 것일까.

한족인 W선생은 중국어와 한국어로 유창하게 통역할 때 자신의 존재감이 드러난다. 그런데 중국동포 J교수는 통역을 할 때 자신이 한국과 중국 어느 쪽에도 온전히 속할 수 없는, 경계선상의 존재임을 절감하는 것일까. 그 이중적인 존재감을 중국 대학교에서도 느끼고 있을까. 더 많이 배웠기에 더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더 민감하게 어쩔 수 없는 운명쯤으로 감지하는 것일까.

한국인과 중국동포 사이 '유리벽'

이래저래 나는 한국인과 중국동포 사이에 있는 유리벽을 보게 되었다. 유리벽 이 편에서 한국인은 중국동포를 얕보고 도무지 믿을 수 없다고 한다. 유리벽 저 편에서 중국동포는 한국인의 색안경과 차별에 억울해 한다. 그런데 내가 중국에서 목격한 유리벽에는 편견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국인과 중국동포의 경쟁관계도 있었다. 개혁개방 30년, 한중수교 20년 동안 중국동포의 의식과 상황도 변했다.

예전에 칭다오 시내에는 한식당, 한국마트, 한국가게 사장이 한국인이었고 중국동포는 종업원이었다. 몇 년 전부터 이 구도가 많이 깨어졌다. 환율이 오르면서 힘에 부친 한국인이 빠져 나간 자리에 중국동포들이 들어왔다.

교직원 K선생이 소개해준 학교 근처 시장에 있는 중국동포의 작은 가게. 김치 외에 냉면과 당면대신 밥알이 들어간 순대를 판다. 시내에서 좀 떨어진 중국인 동네에 있어서 한국인들은 잘 모르고, 손님은 거의 중국동포와 인근에 사는 중국인들이다.
 교직원 K선생이 소개해준 학교 근처 시장에 있는 중국동포의 작은 가게. 김치 외에 냉면과 당면대신 밥알이 들어간 순대를 판다. 시내에서 좀 떨어진 중국인 동네에 있어서 한국인들은 잘 모르고, 손님은 거의 중국동포와 인근에 사는 중국인들이다.
ⓒ 김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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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시내에 있는 웬만한 한식당은 중국동포가 운영한다. 중국인의 입맛에 맞는 한식을 꾸미고 가격도 낮추었다. 과거 한국인이 독점했던 한국마트도 중국동포가 운영한다. 불량식품 파동으로 불안을 느낀 중국 주부들을 끌어들이고 중국마트에서 하지 않는 배달도 해준다.

한류 덕분에 한식당과 한국마트를 찾는 중국인도 갈수록 늘어난다. 주재원이나 유학생도 가게 사장이 한국인인지 중국동포인지보다 맛과 가격, 서비스를 먼저 따진다. 그럴수록 해당 사업의 한국인은 '한국인'임을 내세워 차별화한다. 민박집 홈페이지처럼, '믿을 수 있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이란 광고 글을 볼 때마다 이젠 편견보다 경쟁관계를 더 느끼게 된다.

20년 전만 해도 이런 현상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중국동포의 처지는 한국에서처럼 칭다오에서도 초라했다. 1992년 한중수교 직후 동북 3성에서 칭다오로 온 중국동포는 2천 명에 불과했다. 그들의 목적은 한국기업이나 한국인 가게에 취직해서 돈을 버는 것이었다.

2012년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칭다오의 중국동포는 20만 명이 넘고 그들이 운영하는 기업체는 1천여 개에 이른다. 물론 초기에도 중국동포 기업이 있었지만 대부분 한국기업의 하청업체였다. 이제는 연간 매출액 500만 달러 이상을 올리는 독자기업이 50여 개나 된다. 조선족기업협회에 가입한 기업만 해도 300여개, 그 중 60%가 제조업, 40%는 무역업과 서비스업이다.

그 정도로 중국동포의 경제력이 탄탄해졌고 업종도 다양해졌다. 인구수가 증가하고 경제력이 성장하자 중국동포 내부에도 계층화가 일어났다. 단순 노동자와 종업원 위주에서 기업가, 교육자, 의사, 국유기업 직원, 시정부 간부까지 다양해졌다. 생활이 안정되면서 그들을 묶어주고 권익을 대변할 단체들도 생겨났다. 칭다오조선족기업협회, 칭다오조선족문인회, 칭다오조선족교사협회, 칭다오조선족대학생친목회, 칭다오아리랑예술단... 사실 나는 이렇게 많은 단체들이 있는 줄도 몰랐다.

그 성장과 변화는 분명 한중 수교와 한국인의 중국 진출이 밑거름이 되었다. 한국인과 중국동포는 한 배를 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중국에서 활동하는 한국인이 잘 될수록 중국동포에게 기회가 많아지고, 그럴수록 한국인의 위상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러니 한국인과 중국동포가 눈앞의 이익보다 더 큰 그림을 그리며 '윈윈'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어쩌다 터지는 사건만으로 한국인은 이렇다, 중국동포는 저렇다, 일반화하는 오류보다 문제의 본질부터 먼저 생각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성숙한 연대의식도 필요하다. 우리 앞에는 중국동포가 있고 탈북동포도 있고 다문화 가정도 있다. 통일이 되면 북한동포도 있다. 20년이 넘도록 한국인과 중국동포 사이에 유리벽이 존재한다면, 통일 후에 이 다양한 우리들은 또 어떻게 될까?


태그:#칭다오, #중국동포, #재중교포, #조선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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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이 좋다. 길이 없지만, 내가 걸어가면 길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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