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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설이 녹아 내려온 물은 정말 맑았지만 견딜 수 없이 차가웠다.
 만년설이 녹아 내려온 물은 정말 맑았지만 견딜 수 없이 차가웠다.
ⓒ 김산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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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우리랑 수영하러 갈래?"
"뭐? 라다크에서 수영을 한다고?"
"당연하지. 저 산 위의 만년설이 녹아서 만들어진 호수가 하나 있어. 여기 사는 사람들만 알고 있지, 여행자들은 몰라."

라다크의 수도 레에서 만난 친구들 중 하나인 크리스가 일반 여행자들은 모르는 곳들을 보여주겠다며 우리를 소풍에 초대했다.

해발 3500미터의 고지대에서 수영이라니,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여행을 떠나오면서 배낭 한구석에 수영복을 챙겼던 게 천만 다행이었다. 수건과 수영복을 가방에 챙겨 넣으면서도 크리스가 말한 그 호수의 모습이 조금도 그려지지가 않는다. 상상조차 불가능한 그 모습이 어떨지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히말라야에서 비키니를 꺼내들다

외부인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곳에는 한 무리의 소년들 뿐이었다.
 외부인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곳에는 한 무리의 소년들 뿐이었다.
ⓒ 김산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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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는 다음 날 아침 숙소 앞까지 우리를 데리러 와줬다. 우리는 그의 차를 타고 '여행자들의 레'를 벗어나 상점 하나 보이지 않는 길 위를 달렸다. 그곳은 넓은 들판이었다. 눈앞에 있어 왠지 금세 닿을 듯 가까워 보이는 저 만년설에서부터 쉼 없이 달려왔을 물방울들이 모여 꽤나 거센 물살로 흘렀다.

이곳이 일 년 중 8개월이 꽁꽁 얼어붙은 겨울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푸른 생명들이 땅을 뒤덮고 있었다. 호수로 가기 위해서 계곡을 건너는데 어찌나 물이 차가운지 머릿속이 얼얼하다.

그리고 눈앞에 보인 건 한눈에 아담하게 들어오는, 연못이라 해도 괜찮을 사이즈의 웅덩이와 우리의 등장에 얼음이 되어버린 한 무리의 소년들이었다. 재주를 넘고 저들끼리 물장구를 치던 그들은 일제히 하던 것도 멈추고 우리를 쳐다보았다.

낯선 이들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여행자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몇 안 되는 장소들까지 들이닥친 외부인에 대한 경계의 눈빛이었다. 애초에 둘이서만 이곳에 올 수도 없었을 테지만 크리스와 주마가 없었다면 우리는 그대로 돌아가야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라다크 사람들에게만 허용된 비밀스러운 아지트를 방문한 기분이랄까.

언제 챙겨왔는지 크리스는 물가에다 종류별로 음료수를 담가놓았다.
 언제 챙겨왔는지 크리스는 물가에다 종류별로 음료수를 담가놓았다.
ⓒ 김산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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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에 걸린 크리스는 자신은 짐도 지킬 겸 그늘에 앉아 쉬겠다 했다. 그리고 언제 챙겨왔는지 종류별로 챙겨온 마실 것들을 꺼내들고서는 물가에 가지런히 담가놓는다. 여전히 소년들은 우리를 흘끔흘끔 쳐다보느라 바쁘고 우리는 물가에 서서 선뜻 내딛지 못하고 주저했다.

발가락 끝에 닿은 물은 그 옆에 흐르는 계곡물만큼이나 차가운 걸 보니 따가운 라다크의 햇살조차 만년설로 만들어진 호수는 덥히지 못했나 보다. 용기를 내어 물 안으로 걸어들어갔지만 오 분도 채 못되어 나와 버렸다. 수건으로 꽁꽁 싸매고 떨고 있는 우리의 모습에 옆에서 지켜보던 소년들이 낄낄거린다.

그러더니 갑자기 자기네들끼리 무언가를 속닥거리더니 이내 둘이 모여 커다란 원 하나를 만들었다. 그리고 다른 소년이 저 뒤로 물러나더니 보란 듯이 힘차게 뛰어와 소년들이 만든 원 안을 통과해 멋지게 물속으로 다이빙을 했다. 멋진 장면을 놓칠 새라 셔터를 눌러대던 나도 힘차게 박수를 쳐주었다.

"매년 이곳에 온 지도 십 년이 넘었어...  고향이나 다름없지"

물 밖으로 나와 덜덜 떠는 우리에게 소년들은 보란듯이 저 뒤로 물러나더니 힘차게 뛰어와 원 안을 통과해 멋지게 물속으로 다이빙을 했다.
 물 밖으로 나와 덜덜 떠는 우리에게 소년들은 보란듯이 저 뒤로 물러나더니 힘차게 뛰어와 원 안을 통과해 멋지게 물속으로 다이빙을 했다.
ⓒ 김산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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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와 앉아 맥주를 마시며 바라보는 풍경은 맥주보다 나를 더 빨리 취하게 했다. 물속에 있는 주인이 빠진 줄만 알고 안절부절못하는 개와 그 모습을 낄낄거리며 바라보는 소년들, 한국의 씨름과 아주 많이 비슷한 놀이를 하는 소년들과 뿌옇게 일어난 흙먼지. 그리고 그 옆으로 쉼 없이 흐르는 물 소리까지.

"아름다운 풍경이야. 그렇지?"

크리스가 침묵을 깬다.

"내가 매년 이곳을 온 지도 이제는 십 년이 훌쩍 넘었어. 지금도 충분히 아름답지만 오, 십여 년 전 라다크는 정말로 아름다웠지. 요즘은 가끔 시끄러운 오토바이 소리에 잠이 깰 때면 여기가 정말 라다크가 맞는지 놀라기도 해.

이젠 여기 나의 집이 있고 친구가 있지. 이제 여긴 내 고향이나 마찬가지야. 다만 다른 점이라면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고향이라는 거지. 사십 년 동안 50개가 넘는 나라들을 돌아다녔고 정말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풍경들도 많이 보았지만 여전히 라다크만한 곳은 본 적이 없어."

"맞아요. 분명 라다크에는 뭔가 특별한 게 있어요. 단지 스쳐 지나가는 곳으로 남기에는 정말 중요한 무언가가 우리를 붙잡죠. 다시 오고, 또 오고, 또 오고 싶은 곳이에요. 한 계절만이라도 좋으니 라다크의 시간에 맞춰서 천천히 천천히 살면서 온전히 이곳을 누려보고 싶게 만든다고 해야 할까요."

"장담하건대, 둘 다 다시 돌아오게 될 거야. 매년 기다릴게. 집에 돌아오듯이 편한 마음으로 돌아오면 돼."

흙 먼지를 일으키며 엎치락 뒤치락 하던 소년들. 처음에는 싸우는 줄만 알았는데 우리의 씨름 같은 스포츠인 듯했다.
 흙 먼지를 일으키며 엎치락 뒤치락 하던 소년들. 처음에는 싸우는 줄만 알았는데 우리의 씨름 같은 스포츠인 듯했다.
ⓒ 김산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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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름을 구경하는 관중들. 나이를 불문하고 모두 흥미진진한 표정이다.
 씨름을 구경하는 관중들. 나이를 불문하고 모두 흥미진진한 표정이다.
ⓒ 김산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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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은 언제나 나누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곧 헤어질 것을 알면서도 마음을 나누고, 주는 만큼 되받을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가진 것을 기꺼이 베푼다. 그렇게 길 위에 선 이들은 서로를 활짝 열고 상대를 껴안았다.

헤어짐의 상실감보다 만남의 기쁨이 더 크고, 지금 내가 베푸는 이 친절은 지난날 내가 낯선 이에게서 조건없이 받았던 그것을 다시 세상으로 돌려주는 것 뿐임을 알기 때문이다. 세상은 언제나 이렇게 베풂과 받음이 엮여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물론 주는 것과 받는 것이 같을 수는 없지만 내가 넘어질 때면 항상 누군가는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고 그 힘이 그때마다 나를 일어서게 했다. 그래서 여행을 떠나본 이들의 가슴은 그렇지 않은 이들의 것보다 더 뜨겁고 넓다. 세상은 결코 혼자 서서 걸어갈 수 없음을 경험을 통해 배우고 또 배우는 까닭이다.

언젠가는 다시 이 곳에 돌아오게 될 것 같은 기분

일 년 중 팔 개월이 겨울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선명하게 푸른 풍경이었다.
 일 년 중 팔 개월이 겨울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선명하게 푸른 풍경이었다.
ⓒ 김산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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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중 일방적으로 자꾸 받기만 할 때 나는 가진 거라곤 배낭과 빠듯한 통잔 잔고가 전부인 여행자로서 언제나 제대로 보답할 수 없는 속상함과 미안함에 쩔쩔매곤 했다. 그때부터 나는 매번 여행을 할 때마다 실 뭉치를 들고 다니며 실과 함께 우정을 엮어 상대에게 선물하기 시작했다. 짧았지만 진심을 나누었던 길 위의 우정에 대한 기념으로, 고마움의 표시로써 말이다. 언젠가 다시 꼭 만나자는 약속과 함께.

이곳 라다크에서의 2주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도움의 손길로 이루어졌다. 고산병으로 부푼 다리를 밤새 주물러주시던 '라다크 엄마' 메헤룬과 가족들, 나를 병원까지 데리고 가 잠든 내 얼굴을 물수건으로 닦아주던 파야즈, 우리를 손녀처럼 여겨주시던 파루끄 할아버지, 식당 운영으로 바쁜 와중에도 언제나 우리를 챙겨주던 주마와 수지 부부, 그리고 정 많은 친구 텐진과 용해, 그리고 크리스까지.

이렇게 한 줄 한 줄 고마움과 우정을 실과 함께 엮었다.
▲ 라헬라에게 선물한 팔찌 이렇게 한 줄 한 줄 고마움과 우정을 실과 함께 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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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는 라다크를 떠나기 전날까지 열심히 팔찌를 엮었다. 지난 모든 여행을 통틀어 가장 많은 팔찌를 만들었다. 한 곳에서 이리도 많은 팔찌를 엮어 본 적이 없었건만 쌓여가는 팔찌 수 만큼의 인연들을 생각하니 언젠가는 다시 이 곳에 돌아오게 될 거란 생각이 든다.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쓴 엽서들까지 가방에 넣은 뒤 소중한 사람들과의 라다크에서의 마지막 저녁 식사를 위해 집을 나섰다. 비록 팔찌와 엽서 몇 장이지만 그들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음에 가는 내내 마음이 설렌다.


태그:#라다크, #레, #인도, #히말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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