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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30평 아파트를 50평으로 늘리고 싶나요?"
"대리에서 과장, 혹은 과장에서 부장으로 승진하고 싶나요?"
"2000cc 이하 소형자동차를 3000cc 이상 큰 차로 바꾸고 싶나요?"

그러면 행복하고, 어깨가 올라가고, 신 나게 살 것 같나요?

그 소원이 이루어지는 방법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 병원봉사 투어를 해 보세요. 아는 분이나 친구 친척, 혹은 자원해서라도 24시간만 환자나 보호자와 같이 지내보십시오. 같이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며 치료 받으러 갈 때 동행도 해 주세요. 아마도 잘 때는 휴게실 의자에서 새우잠을 자야 할지도 모릅니다. 어느 병원도 보호자가 2명이나 잘 수 있는 보조침대는 주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진짜로 30평이 50평으로 바뀌고, 과장에서 부장으로, 2000cc가 3000cc 차로 바뀌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 소원이 이루어졌을 때 누릴 만족한 결과와 비슷한 행복을 분명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더이상 그 이루어지지 않은 소원 때문에, 혹은 부족한 상황 때문에 불행하다거나 위축되어 살지는 않게 될 거라고 확신합니다.

만약 그래도 그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아 불행하다고 삶이 투덜거린다면 미안하지만, 포기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 분은 설사 그 소원이 이루어져도 절대 행복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또 다른 수치가 그 자리를 차고앉아 괴롭힐 것이고 다른 소원을 찾을 것이니...

좀 더 행복한 삶을 바란다면 병원봉사 투어를...

주사대의 중간쯤에 아내의 이름 스티커가 붙어 있다. 침대번호는  50-1번, 10명 가까이 들어가는 이런 방이 10개나 있다. 아픈 사람들이 참 많다.
▲ 지금 주사실 주사대의 중간쯤에 아내의 이름 스티커가 붙어 있다. 침대번호는 50-1번, 10명 가까이 들어가는 이런 방이 10개나 있다. 아픈 사람들이 참 많다.
ⓒ 김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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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자녀들이 일류 대학에 진학하기를 참 많이 바랐습니다. 또 그다음에 닥칠 사회 진출에서도 일류 대기업에 취직해서 자랑스러운 자녀가 되어 부모의 꿈을 실현해 주길 바랐습니다.

그러나 최근 세월호 침몰로 사랑스러운 자녀, 가족들을 잃고 그리고도 끝나지 않은 수습으로 긴 고통 속에 울부짖는 분들을 보면서 좀 달라졌습니다. 살아만 있고, 건강하기만 하다면 날마다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소중하게 대하게 되었습니다. 어찌 안 그럴까요.

실감하지 않는 분에게는 진도 팽목항이나 광화문 세월호 유가족들과 24시간을 같이 지내보시기를 권합니다. 그 고통스러운 이별의 부재로 오는 슬픔과 절망적으로 무너진 삶의 의욕을 곁에서 같이 느껴보면 분명 많은 소원이 다시 생각될 겁니다. 그렇다고 남의 불행으로 내 행복을 확인하거나 안주하라는 그런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내는 7년 전부터 희귀난치병이 걸려서 목도 가누지 못할 정도의 사지마비가 되었다가, 지루하고 고단한 재활치료로 조금씩 회복하는 중입니다. 여전히 난치병은 그대로 진행 중이고, 막혀 버린 대·소변 장기와 닫힌 한쪽 폐, 실명된 후 말라가는 한쪽 눈 등 지독한 후유증을 안고 살아가는 중입니다. 저는 그 곁을 지킨 지 7년째입니다. 미치든지 웃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면서...

"또? 어떤 미친 사람이 이러는 거야!"

급하게 들어간 병실 복도 화장실 좌변기 안에 둘둘 말아진 화장지가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도대체 한두 번도 아니고 정말 정신 나간 사람같이 느껴져 화가 치솟았지요. 또 어떤 사람은 그걸 억지로 내리려고 물을 자꾸 내려서 물이 넘쳐 바닥에 흐르게 하기도 합니다. 때론 대변이 섞인 채로...

또 여러 사람이 있는 다인실 병실에 있다 보니 하루 종일 텔레비전 소리에 고문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 텔레비전 바로 아래에서 지내는 나는 정말 괴롭습니다. 그런데 3시간마다 아내의 소변을 빼는 일로 창가에 있어야만 합니다. 커튼을 수시로 쳐야 하니 가운데 있을 수가 없습니다.

"TV 확 때려 부셔 버리고 싶다! 으으윽..."

종종 내가 지르는 소리에 아내도 깜짝 놀라고, 화가 난 나를 말리느라고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정말 지겹습니다. 보통은 그냥 모른 척 만성이 되어 넘어갑니다. 그러다가도 밥을 먹을 때 징그러운 걸 틀어 놓거나, 막장 드라마를 보며 상스러운 욕을 해대거나,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소리 때문에 안 들린다며 볼륨을 키울 때면 정말 돌아버릴 것 같습니다.

"잠깐만요!"

얼른 일어나 우리 휠체어를 당겨 주었습니다. 새로 들어온 환자는 휠체어를 뒤로 나오면서 우리 휠체어를 밀거나 '쿵!'하고 치는 일이 잦아 휠체어가 성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돌리시면 안 부딪히고 나와요"라고 알려줘도 둔한지, 아님 무시하는지 여전히 또 치고 나옵니다. 갑자기 '욱!'하고 분노가 치솟아 오릅니다. 휠체어를 바닥에 밟아 버리고 텔레비전도 노트북도 집어 던져 버리고 침대도 부숴 버리고! 머릿속에서는 벌써 수십 번도 더 다 때려 부숴 버렸습니다. 씩씩대면서...

'미치든지 아니면 웃든지...'

그해 나는 착한 사람 흉내(?)를 내다가 결국 탈이 나서 정신과 치료와 약 복용을 3개월이나 했습니다. 솟는 분노를 계속 삭이고 삭이다가 감당이 안 되면서 폭발을 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 사람 파편에 다칩니다. 당연히 당사자인 나도 다칠 것이고, 아내는 천성이 착해서 더 심하게 다칩니다. 그래서 제가 늘 참는 이유가 됩니다.

그런데 꾹꾹 누르면서는 내 속이 다 썩습니다. 미쳐가고 병이 납니다. 저는 결코 느긋하고 너그럽고 착한 성품의 사람이 아닙니다. 급하고 지기 싫어하고 자존심만 칼끝처럼 예민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참고 참으려니 병이 듭니다. 신앙인이라는 옷을 입어서 더 그렇고, 방송이나 책 때문에 좋은 사람이라는 멍에가 덧씌워져 더 조입니다. 함부로 감정을 표현해 내기도 힘들게.

저는 살고 싶습니다. 자주 아픈 사람, 상식 밖의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아님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낯선 세상으로 뛰쳐 나가고 싶습니다. 이걸 억누르다가 또 정신과로 달려가서 상담하고 약을 받아먹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 어떡하지요? 안 좋은 소식을 전하게 되어서..."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습니다. 국립암센터에서, 괜찮은 결과가 나올 때는 보통은 문자로 알려주었지요. '그럼 혹시...'하는 마음으로 전화를 해보니 역시 그랬습니다. 우려하고 불안하던 검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다시 항암주사를 맞아야만 할 수치라고...

여기 저기 통증과 저림 현상이 오고, 자꾸 쉬이 지치고 빨리 회복이 안 되는 등 예상은 했었습니다. 지난 번 맞은 이후 시간상 간격도 되었고, 그리고 몇백만 원이 되는 비보험 항암 주사비를 채 준비 못 해 외상을 해야 할 상황입니다. (병원은 외상이 안 되니 할부로 카드를 써야 합니다.)

아내는 몸이 아픈데 마음도 아파합니다. 이럴 때마다 자기 때문에 살림을 어렵게 한다고 죄인같이 미안해 합니다. 그러면 나는 아내를 죄인 만든 죄로 또 미안해집니다. 내가 아내가 아프기 전 좀 더 넉넉하게 많이 벌어 놓거나 집안이 부자였더라면 아내가 죄인 안 되어도 되는데...

이 약이 500미리가 160만 원이다. 이 용량에 100미리 하나 더, 거의 200만 원대를 평균 6개월 안팎으로 맞고 있다. 비보험 전액 현금으로 부담하면서, 치료약이 개발 안되면 살아있는 동안은 계속 맞을지 모른다. 허리가 휜다.
▲ 이 비싼 약을 수시로... 이 약이 500미리가 160만 원이다. 이 용량에 100미리 하나 더, 거의 200만 원대를 평균 6개월 안팎으로 맞고 있다. 비보험 전액 현금으로 부담하면서, 치료약이 개발 안되면 살아있는 동안은 계속 맞을지 모른다. 허리가 휜다.
ⓒ 김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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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희귀난치병 환자들과 가족들이 대부분 겪는 이중, 삼중고입니다. 이러고 평생을 살아야 합니다. 죽기 전날까지 주기적으로 검사하고 주사 맞고, 다시 헤헤거리다가도 문득 하루씩 날짜가 가는 것이 두려워지기도 합니다. 시간은 또 우리를 반복해서 이 상황 앞에 끌고 갈 것이기에 수백만 원을 하는 비보험 주사비 마련도 무거운 고민이지만, 왕복 다녀오고 뒤로 며칠은 끙끙거릴 후유증도 정말 지겨운 행사입니다. 그것도 평균 6개월 정도마다 한다는 게.

8월 첫 주는 여름휴가 시즌인가 봅니다. 새벽부터 움직였는데 도로가 꽉 찼습니다. 오전 11시부터 맞기 시작한 항암주사가 오후 5시가 다 되어서 끝났습니다. 그 사이에 한 번도 만난 적도 없던 페이스북 한 친구분이 일부러 서울에서 일산까지 와 주었습니다. 우리 속에 꼭꼭 숨기고 이를 악물고 버티던 외로움을 이해하면서 위로해 주는 바람에 아내와 저는 여럿 있는 주사실에 있음에도 둘 다 울고야 말았습니다.

기어이 제게 점심까지 사 주고 다시 돌아간 그 분은 나중에 병으로 고생하는 많은 분을 위해 더 마음 쓰고 기도해야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를 아는 분들만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심한 고생을 하고, 심지어 생사를 걸고 투병하는 분들을 만나고 돌아가는 분들이 다 그럽니다.

"에휴... 살다 생기는 내 불편은 불편도 아니여, 고생도 고생이 아니고..."

왜 안 그럴까요? 자기 스스로 움직이는 건 고사하고 소변도 못 보고 대변도 안 나와서 남의 도움으로 하루하루 사는 아내 같은 사람에 비하면, 뭐가 죽고 못 살 불행이고 억울함이라고 비탄하겠어요. 그래서 심지어는 잘 사는 자기가 미안하다고 말하고 돌아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잘 잊지요. 그래서 3개월 정도에 하루씩, 일 년에 딱 4일만 투자하면 일 년 내내 불평은 아마도 상당히 줄어들겠죠. 어쩌면 마치 아파트를 늘린 사람보다 더 웃으며, 승진한 윗사람보다 더 힘차게, 작은 승용차도 고급 승용차보다 더 아끼며 차를 타게 될 것입니다.

"아니, 벌써? 예정보다 일찍 도착했네. 좀 기다려줄래? 여기서 50분 정도면 갈 수 있으니 데리러 갈게!"

7월 마지막 주에 아프리카로 무료급식센터 봉사하러 떠난 딸이 무사히 마치고 인천공항에 도착했다는 전화였습니다. 원래 예정은 혼자 공항버스를 타고 청주로 오기로 했지요. 하지만 갑작스러운 아내의 항암주사 치료로 일산까지 와 있고, 시간도 거의 비슷해서 인천공항에 가서 딸을 데려와 청주로 가기로 했습니다.

떠날 때는 에볼라 바이러스 때문에 잠시 긴장이 되기도 했지만, 돌아온 아이 말에 따르면 집단으로 발생한 서아프리카는 딸이 갔던 탄자니아 우간다와는 하늘땅만큼 멀리 있고, 서로 간의 이동이 그리 쉽지 않아서 큰 위험지역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아무 탈 없이 돌아온 기특한 아이를 빨리 만나고 싶어서 빗길 속을 4시간이나 운전해 아이와 함께 돌아왔습니다.

딸이 도착한 탄자니아 채석장의 아이들과 식사를 나누면서 환영을 받고 있는 막내딸아이. 의사가 되어 아프리카로 봉사를 가겠다고 늘 말해왔던 아이가 어떤 결심을 하게 될까.
▲ 탄자니아에서 만난 아이들 딸이 도착한 탄자니아 채석장의 아이들과 식사를 나누면서 환영을 받고 있는 막내딸아이. 의사가 되어 아프리카로 봉사를 가겠다고 늘 말해왔던 아이가 어떤 결심을 하게 될까.
ⓒ 김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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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을 나누어주고, 밥을 배식하고 같이 어울리는 아이의 사진에 마음이 참 '찡'했습니다. 잘못되었다면 우리 가정의 이산가족 환경으로 남의 도움만 받다가 허덕거렸을 아이가 오히려 더 어려운 아이들을 돕겠다고 마음먹는 것이 대견했습니다. 작년에는 여성가족부 선발 청소년 해외봉사단에 지원해서 <사랑의 집짓기>로 베트남을 10일이나 다녀왔지요. 올해는 또 유난히 짧아진 여름방학을 친구들과 놀지도 못하고 아프리카를 다녀왔습니다.

가족들이 각자 자기 몫을 해내면서 7년이라는 길고 긴 희귀난치병 투병과 간병의 세월을 버텼지요. 그 이야기가 지난 7월 19일 <한겨레신문> 토요판 가족란에 실렸습니다. 세상의 여러 가지 종류의 많은 질곡을 안고 살아가는 가족에게 힘내는 위로가 되었으면 합니다. 가족이 없으면 이웃이, 이웃도 없다면 사회가 그런 가족의 역할을 해주는 세상이 참 복지국가가 아닐까요?

한겨레신문에 나온 우리 가족의 기사. 아픈 질병을 통해 오히려 더 단단해진 부부인 아내와 나, 또 그 시련속에서도 자기 자리를 잘 지킨 아이들의 이야기가 실렸다. <가족, 아프면서 더 자라는 나무로! >
▲ 한겨레신문 토요가족판(2014.7.19) 한겨레신문에 나온 우리 가족의 기사. 아픈 질병을 통해 오히려 더 단단해진 부부인 아내와 나, 또 그 시련속에서도 자기 자리를 잘 지킨 아이들의 이야기가 실렸다. <가족, 아프면서 더 자라는 나무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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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동안 온종일 비가 내렸습니다. 아픈 사람을 더 외롭게 하는 비가 되지 않기를, 힘들게 먹고 사는 분들이 더 궁지로 몰리는 비가 되지 않기를, 도시의 콘크리트 바닥에서 날을 지새우고 계시는 분들이 외면과 버림을 받지 않는 위로의 비가 되기를 비를 주시는 하늘에 빌고 또 빕니다.

비가 한참 내렸을 쯤 / 서늘해진 공기가 창문을 넘어들어왔다 / 아내가 아프다고 끙끙거린다 / 다리가 멀쩡해 보여도 / 속으로 죽을 수도 있구나 싶었다.

그렇게 괴로워하는 아내의 다리를 주무르다 / 기억자로 몸을 꺾고 잠이 들었다 /그 좁은 병원의 1인 침대 아내 누운 곁에서 / 따뜻하다 / 서럽던 7년의 간병 고생 잊을 만큼 / 아내의 냄새가 살포시 나는 몸 곁이

두렵고 고단하던 날들이 녹고 / 억울하고 다 끝내고 싶던 결심이 밀려났다 / 아내 곁에서 잠이 든 비 오는 날 오후에

덧붙이는 글 | 2014년 7월 중순부터 8월초 순까지 한달간의 간병일기입니다.



태그:#간병, #희귀난치병, #그러니 그대 쓰러지지 말아, #다발성경화증, #강연100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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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내 인생의 핸들이 내 손을 떠났다. 아내의 희귀난치병으로, 아하, 이게 가족이구나. 그저 주어지는 길을 따라간다. 그럼에도 내 꿈은 사람사는세상을 보고 싶은 것, 희망, 나눔, 정의, 뭐 그런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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