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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겁기 음욕보다 더한 것 없고/독하기 분노보다 더한 것 없네. 괴롭기 몸보다 더한 것 없고/ 즐겁기 고요보다 더한 것 없네."

박정자는 나지막한 어조로 한 구절 한 구절 읽어나갔다. 여든 두해 살아도 죽느니 못한 기구한 생을 오히려 담담하게 읽어내려 간 탓인지 정순왕후의 굽이진 사연들은 더욱 쓰리게 다가왔다.
 박정자는 나지막한 어조로 한 구절 한 구절 읽어나갔다. 여든 두해 살아도 죽느니 못한 기구한 생을 오히려 담담하게 읽어내려 간 탓인지 정순왕후의 굽이진 사연들은 더욱 쓰리게 다가왔다.
ⓒ 강동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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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푸른 조명 아래로 희고 단정한 한복차림의 배우 박정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객석은 빈자리 없이 가득 차있었으나, 누구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했다. 이윽고 운을 뗀 박정자가 첫 구절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하자 객석 곳곳에서는 기다렸다는 듯 짧고 깊은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지난 2월 21일 강동아트센터 소극장 드림에서는 특별한 시간이 마련됐다. 박정자의 낭독 연극 '영영이별 영이별'이 바로 그것. <영영이별 영이별>은 <미실>로 제1회 세계문학상을 수상한 김별아의 장편소설로, 조선의 여섯 번째 왕 단종 비인 정순왕후 송씨 혼백이 이승을 떠나기 전 49일 동안 살아서는 미처 말할 수 없었던 뼛속 깊이 새겨진 애달픈 세월을 단종에게 고백하는 형식의 서간문이다.

박정자는 나지막한 어조로 한 구절 한 구절 읽어나갔다. 열다섯의 정략혼사로 왕비가 되었으나 서인에서 걸인, 날품팔이꾼, 뒷방 늙은이로 여든 두해 생을 마감하는 그날까지 살아도 죽느니 못한 기구한 삶을 오히려 담담하게 읽어내려 간 탓인지 정순왕후의 굽이진 사연들은 더욱 아프고 쓰리게 다가왔다.

해금과 기타 두 현의 조화가 빚어낸 선율은 정순왕후의 기쁨과 슬픔, 아픔과 행복을 보다 극적으로 연출했고, 이는 관객들 저마다의 위로로 귀결됐다.
 해금과 기타 두 현의 조화가 빚어낸 선율은 정순왕후의 기쁨과 슬픔, 아픔과 행복을 보다 극적으로 연출했고, 이는 관객들 저마다의 위로로 귀결됐다.
ⓒ 강동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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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묵화폭의 영상을 배경으로 강은일의 해금 연주와 이정엽의 기타 연주가 사연과 사연 사이 적막을 깨고 무대를 가로질렀다. 강은일의 해금 선율은 정순왕후의 눈물이, 때론 비명이 되어 가슴을 에듯 아프게 했다. 이정엽의 기타 선율은 짧았지만 그래서 더욱 소중했던 단종과의 행복한 시간을 그려냈다. 두 현의 조화가 빚어낸 선율은 정순왕후의 기쁨과 슬픔, 아픔과 행복을 보다 극적으로 연출했고, 이는 관객들 저마다의 위로로 귀결됐다.

"당신, 나를 다시 만나면 칭찬해주셔요. 왜 이제야 왔나 탓하지 마시고 그동안 수고했다 애썼다 다독다독 어깨를 두들겨주셔요. 나는 죽지 않았습니다. 죽을 수가 없었습니다. 삶의 아름다움을 칭송할 수는 없을지언정 질기고 모진 목숨을 이어 이만큼이나 오래 살아내고야 만 것이, 결국 내게 허락된 유일한 복수였으니까요."

곧 그리로 갈 터이니 잠시만, 아주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말과 함께 낭독은 마무리 지어졌다. 해금과 기타 선율이 무대를 감싼 가운데, 세찬 바람에 몸을 맡긴 듯 여지없이 흔들리면서도 꺾일 줄 모르는 작은 풀꽃 영상이 흐르고 있었다. 옆자리 중년 관객은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다 지쳤는지 그냥 흐르도록 내버려둔 듯 보였다. 단 2회 공연에 그쳤으나 그 시간을 함께한 필부필부(匹夫匹婦)에게 있어서만은 뜻밖에 마주한 따뜻한 위로가 여간 고마울 수 없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문화공감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정지선의 공연樂서, #문화공감, #박정자, #영영이별 영이별, #낭독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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