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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톡 톡 톡 톡….'

이 경쾌한 발톱 소리의 주인공은 지금 무척 속이 불편하다. 눈을 떠야 한다!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키니 역시 가을이가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되는 대로 옷을 걸치고 현관문을 연다. 가을이 쏜살같이 나가다가 멈칫, 뒤를 돌아 내 눈치를 본다. "가~." 명령이 떨어지자 길모퉁이 흙더미 위로 달려가 자세를 잡는다.

푸덱덱.

묽은 응가가 물총 쏘듯 나온다. 급한 일을 끝낸 가을이는 앞장서서 집으로 들어간다. 시계를 보니 오전 4시 반. 그 뒤 같은 과정을 오전 7시 반에도, 9시 반에도 반복했다. 하염없이 쏟아낸 가을이는 힘이 없어서 계단을 한 칸 한 칸 겨우 올랐다. 내 속도 덩달아 무척 상했다.

황태채에 물을 붓고 한소끔 끓여냈다. 국물을 식혀서 두 국자 정도 먹였다. 탈수 증세가 오면 큰일이라 이렇게라도 속을 채워야 한다. 이불을 덮어주고 외출했다.

배탈의 원인, 대체 무엇이더냐

몽땅 쏟아낸 육신의 상태를 표정으로 알리고 있다.
▲ 지친 가을이 몽땅 쏟아낸 육신의 상태를 표정으로 알리고 있다.
ⓒ 박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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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와 문을 여니 심상치 않은 냄새가 코를 훅 찌른다. 발수건 아래에 뭔가 느껴졌다. 내가 올 때까지 참지 못하고 큰일을 본 후 발수건으로 뒤처리를 해놓은 것이다. 하…. 이런 가을이의 속 깊은 모습에서 나는 한 번 더 감격을 한다. 처음 집안에 실례를 했을 때도 설사병이 화근이었다.

그때는 양탄자 위에 누고 책으로 얌전히 덮어놨더랬다. 퇴근한 나와 눈이 마주치곤 귀를 접고 부끄러워했다. 양탄자 박박 닦던 장면을 기억해서일까? 이번엔 발수건이라니. 아픈 와중에 어쩜 이런 생각까지 다 했을까. 덕분에 수월하게 치웠다. 후, 이제 배탈의 원인을 골몰해 보자.

① 사료 : 소화불량을 일으킨 개도 간혹 있지만 비교적 유명 브랜드이고 가을도 그간 잘 먹어왔다.
② 통조림 : 몇 주 전 탈이 났던 제품을 모두 보호소 개들에게 기부하고 새로 구입했다. 예전에도 잘 먹었던 것이다.
③ 간식 : 황태채와 고구마를 줬다. 개의 건강에 좋은 식품이다.
④ 눈 : 그래! 생애 첫눈을 본 기념으로 가을은 연신 눈을 핥아댔다. 그런데 눈이 이 정도의 설사를 일으킬 정도인가?
⑤ 과식 : 빨리 많은 음식을 삼키면 소장이 약한 경우 설사가 발생할 수 있다. 현재로서는 이쪽에 혐의를 둔다.

가을이는 나이에 비해(현재 10살 추정) 건강한 편이다. 심장사상충에 감염됐던 것 외엔 눈·귀·이빨·간·신장 등에 큰 이상 없이 지내오고 있었다. 하지만, 딱 한 가지 문제는 장에 있었다. 가을이는 '장 트러블 여인'. 과민성대장증후군이라던가. 조금만 입에 안 맞아도 먹지를 않고, 먹는다 해도 잘 소화 시키지 못한다.

일전에 설사를 일으킨 통조림만 해도, 다른 개들은 없어서 못 먹는 제품이었는데 가을이만 소화를 못했다. 냄새에 혹해 먹긴 했지만 바로 신호가 와서 쫓아나갔다. 설사를 일으키면 하루에서 이틀은 속을 비우는 게 좋은데, 새벽에 노란 물을 토했다. 위액이다. 부드러운 황탯살을 잘게 잘라줬다. 배가 무지 고팠는지 잘 먹었다. 설마 이것도 문제가 되진 않겠지? 걱정이 끊이질 않는다.

사람마다 성격 다르듯, 개도 천차만별이랍니다

옷도 좋고 개도 좋은데 둘의 궁합은 맞지 않다.
▲ 니키 옷도 좋고 개도 좋은데 둘의 궁합은 맞지 않다.
ⓒ 박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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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먹는 존재'는 배설하기 마련이다. 제 아무리 선녀보다 곱고 요정보다 앙증맞은 그녀일지라도 무언가 삼켰다면 무언가를 배출하는 법. 우리 서로 부끄러워하지는 말자.

나는 가을이의 보호자로 어쩌면 이 애의 '응가'에 가장 많은 관심을 두는 것 같다. 처음 데려왔을 때부터 '응가를 왜 참니' '왜 네 응가는 초록빛이니' '왜 응가가 어제보다 더 묽어졌니' 걱정의 연속이었다.

하루 중 가장 기다려지는 산책 시간. 최소 20분은 걷는다. 가을이는 동네 친구를 만나고 세상 구경을 하고 무엇보다 응가를 눈다. 30분을 넘게 가을이의 뒷모습만 보며 걸을 때도 있다. 색과 냄새와 형태를 통해 가을이의 건강을 확인해야 하기 때문. 경험이 없는 사람은 그 무슨 변태 같은 짓이냐 할 수도 있지만, 어리고 약한 누군가를 보살피는 사람들과는 이 대목에서 매우 잘 통한다. 특히, 며칠을 거르다 적당히 익은(?) 응가를 보기라도 하면 "아이고 예뻐!" 소리가 절로 나오기도 한다.

나의 아버지는 강원도 횡성에서 개 네 마리, 오리 네 마리, 토끼 여러 마리와 살고 계신다. 그중 한 녀석이 유난히 바들바들 떨며 여윈 갈비뼈를 자랑하기에 당장 헌옷과 방석을 개집에 깔아주며 아버지께 잔소리를 했다. 이렇게 추운데 너무하신 거 아니냐며. 그리고 아버지 간식으로 사다놓은 소시지를 마구 먹였다. 허겁지겁 달려드는 녀석에게 손도 물려가면서.

그 길로 서울에 올라와 대형견용 패딩을 사러 갔다. 소재가 좋고 크기가 클수록 가격은 만 원씩 불어났다. 다 골라 놓고 보니 아버지를 위해 산 패딩 조끼보다 이 녀석의 옷이 더 비쌌다. 목덜미엔 무려 토끼털이 희생돼 있고 버클도 네 개나 달려 있다. 아무튼 평생 한 벌이니 눈 딱 감고 해주자 싶어 택배를 보냈다. 다음 날, 이놈이 옷이며 이불이며를 거적처럼 내팽개쳤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버지는 나를 비웃으며 강조하셨다.

"야생이야. 야생이라고. 집개랑 달라."

시려운 줄도 모르고 온 동네에 발자국을 남겼다.
▲ 가을의 첫눈 시려운 줄도 모르고 온 동네에 발자국을 남겼다.
ⓒ 박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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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는 3일을 꼬박 앓고 겨우 내장을 진정시켰다. 원인도 찾아냈다. 눈을 핥아 먹다 닭 뼈 한 조각을 낼름 삼켰던 것. 달려가서 입에 손을 넣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처음 맡는 치킨의 향기에 신이 나서 냠냠 꿀꺽! 길냥이들 먹으라는 밥상에 무엄하게 혀를 댄 죗값이다.

시골의 야생개나 길고양이들에게 작은 뼈 한 조각은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그래도 이왕이면 닭뼈는 피하자). 하지만 우리 개는 달랐다. 오늘의 교훈이자 올해의 교훈이다. 모든 개는 다르다. 성격도 성향도 체질도. 보호자가 더 바지런해져야 하겠다.


태그:#가을이, #설사병, #예민녀, #황태채, #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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