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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가 다시 현장으로 달려갑니다. 기존 지역투어를 발전시킨 '2013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전국투어'가 4월부터 시작됐습니다. 올해 전국투어에서는 '재야의 고수'와 함께 지역 기획기사를 더욱 강화했습니다. 시민-상근기자의 공동 작품은 물론이고, 각 지역에서 오랫동안 삶의 문제를 고민한 시민단체 활동가와 전문가들의 기사도 선보이겠습니다. 6월, 2013년 <오마이뉴스> 전국투어가 찾아가는 지역은 광주전남입니다. [편집자말]
여순사건 유적지인 옛 제14연대(현재 한화여수공장)는 수상비행활주로였다. 일제시대 호남의 곡물을 일본으로 실어 나르던 수탈의 전진기지였던 이곳은 현재 방치돼 훼손이 심각한 상태다.
 여순사건 유적지인 옛 제14연대(현재 한화여수공장)는 수상비행활주로였다. 일제시대 호남의 곡물을 일본으로 실어 나르던 수탈의 전진기지였던 이곳은 현재 방치돼 훼손이 심각한 상태다.
ⓒ 주철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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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서면 다친다, 나서면 죽는다, 나서지 마라."


나서지 말고 중간만 가라는 여수지역 부모들의 가르침은 1948년 일어난 여순(여수·순천)사건에서 살아남은 자의 삶의 지혜였다.

여수는 반도(半島)다. 일제강점기에 반도는 수탈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남도에서 지역적으로 일본과 가까운 여수는 곡창지대였던 호남의 곡물을 일본으로 실어 나르던 수탈의 전진기지였다. 그래서 이곳엔 아직도 일제강점기의 아픈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여순사건 65주년, 아직도 청산되지 않는 아픈 역사

해방 후 여수는 또한 '국가폭력'에 가장 참혹한 피해를 당한 곳이다. 일명 '여순 반란사건' 때문이다. 이승만 정부를 시작으로 군부가 지배하던 시절 여수시민들은 철저히 '빨갱이'로 몰렸다. 이로인해 수많은 선량한 시민들이 처참히 죽었다. 연좌제에 내몰려 제대로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진실규명은 철저히 외면 받고 있다. 도대체 왜 일까?

올해로 65년을 맞는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여수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국군 제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켜 정부 진압군이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양민 등 수천명이 숨진 사건이다. 정부는 그해 벌어진 제주 4·3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여수 제14연대를 급파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14연대 소속 김지회, 홍순석 등의 군인들이 전쟁 결사반대와 미군 즉시 철수를 요구하며 제주도 투입을 거부하고 봉기를 일으켰다.

여순사건의 전모는 이렇다. 1948년 10월 19일 오후 8시경 봉기가 시작되었다. 오후 10시경에는 14연대를 모두 장악했다. 이들은 여수시내로 진격했다. 20일 새벽 여수 경찰서와 시내 주요 기관을 모두 점령한다. 또한 곧바로 순천으로 진격 20일 오후 2시경 순천을 장악한다. 반란은 여수를 시작으로 전남동부지역으로 확산됐다. 하지만 27일 여수를 마지막으로 8일간의 봉기는 막을 내린다.

이승만 정부는 여수와 순천에 계엄령을 선포한다. 10월 22일 진압군을 투입해 23일 해군 LST함이 여수앞바다 선상에서 시내를 향해 무자비한 박격포 공격을 시작했다. 26일 대한민국 국군 육해공 합동작전이 진행됐다. 이로 인해 27일 오후 여수를 탈환했지만 시내는 불바다가 됐고, 사람이 살 수 없는 잿더미로 변하고 만다.

이후 진압군은 대대적인 협력자 색출에 나섰다. 시내 주요 5곳(서초, 동초, 종산초, 진남관, 공설운동장)에 시민들을 집결시켜 놓고 좌익과 우익으로 분류했다. 머리 짧은 사람, 군용팬티를 입은 사람, 손에 기름기 뭍은 사람 등을 협력자로 몰아붙였다. 이때 그 유명한 '손가락 총'은 여수사람들에게 생사를 넘나드는 공포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좌익혐의가 의심돼 손가락 총에 맞으면 즉결심판에 처해졌다. 또 좌익으로 의심되는 아들의 행방을 캐기 위해 시아버지가 며느리의 뺨을 때리고 며느리가 시아버지의 뺨을 때리는 추악한 일이 벌어졌다.

리영희 "멸치를 뿌려놓은 것 같은 시체, 두려웠다"

1948년 10월 23일, 여순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진압군이 투입됐다. 해군 LST함이 여수앞바다 선상에서 시내를 향해 무자비한 박격포 공격을 하자 여수시내가 불타고 있는 모습. 그 모습을 군인들이 지켜보고 있다.
 1948년 10월 23일, 여순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진압군이 투입됐다. 해군 LST함이 여수앞바다 선상에서 시내를 향해 무자비한 박격포 공격을 하자 여수시내가 불타고 있는 모습. 그 모습을 군인들이 지켜보고 있다.
ⓒ 주철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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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여중에 본부를 설치한 백두산 호랑이로 악명 높았던 제5연대 김종원 부대는 종산초(지금의 중앙초)에서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즉석에서 닛본도로 목을 쳐 죽이는 김종원의 악랄함은 극에 달했다. 1948년 10월 하순 한국해양대 학생으로 승선 실습을 하러 여수항에 도착한 리영희 선생은 여순사건의 참혹한 현장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했다.

"운동장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체가 즐비해 있었고 반란군과 진압군 쌍방의 희생자 대부분은 젊은 민간인들이었다. 운동장 울타리를 둘러싸고 많은 사람들이 먼발치에서 통곡하고 있었다. 나는 동료 학생들을 재촉해서 그 자리를 빨리 떠났다. 멸치를 뿌려놓은 것처럼 운동장을 덮고 있는 구부러지고 찢어진 시체들을 목격한 후회와 공포감 때문이지도 했지만 울타리 밖에서 울부짖고 있는 남녀노소의 시선이 두려워서였다." (<불량국민들-여순사건 왜국된 19가지 시선>(주철희 저,북랩)  내용 발췌)

당시 군과 우익진영은 이 반란을 남로당의 지령으로 몰고 갔다. 여순사건에 반공이데올로기를 덧씌워 남로당과 여수시민들이 일으킨 반란으로 몰아세웠다. 여순사건은 당시 이승만 정부에게 가장 큰 아킬레스건이었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는 이를 정치적으로 교묘하게 이용해 위기를 타계했다. 여순사건을 다룬 <불량국민들> 책속에 이 내용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사건은 군인들의 반란에 여수시민들이 합세했다. 그런데 정부의 발표는 여수 민중들의 반란에 일부 군이 합세했다고 왜곡했다. 그 주동 인물로 여수여자중학교장 송욱으로 몰았다. 하지만 그도 정말 억울하게 죽었다. 정부가 송욱을 부각시킨 것을 여수사람은 빨갱이고, 빨갱이가 일으킨 반란에 일부 군인이 합세했다고 왜곡하면서, 국군과 군인은 책임이 없다는 주장을 하기 위한 의도였다. 환상의 여학생부대 사건은 더욱 황당하다. 중학교 여학생이 치마 속에 M1소총을 감추고 있다가 진압군을 쏴 죽였다는데 있을 수 있는 일인가?철저한 역사 왜곡이자 조작이었다." (<불량국민들>에서 발췌)

"여순사건 이제 다른 시각으로 바라봐야"

여순사건을 연구해온 <불량국민들>의 저자 주철희 박사는 "여순사건을 이제 다른 시각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다.

여순사건을 연구해온 <불량 국민들>의 저자 주철희 박사.
 여순사건을 연구해온 <불량 국민들>의 저자 주철희 박사.
ⓒ 심명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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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14연대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나? 왜 전남 동부지역사람들이 동조할 수밖에 없었는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현실을 제대로 봐야한다. 이것은 따지지 않고 반란으로 규정해 버렸기 때문에 아직도 억울하게 죽은 수만은 희생자가 구천을 맴돌고 있다."

여순사건은 2005년부터 2010년까지 진실화해위원회에서 다뤄졌지만, 여순사건으로 인한 민간인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여순사건 여수유족회는 지난 3월 28일 사건 발생 65년 만에 국가를 상대로 피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역사학자이자 여수지역사회연구소장을 역임하면서 여순사건을 추적해온 주철희 박사는 올해 3월 <불량국민들>을 통해 여순사건에 대한 왜곡된 시선을 파헤쳤다. 여수에 살고 있는 필자는 이 책을 접하면서 저자가 제시한 왜곡과 조작의 증거를 확인할 수 있었다. 주 박사를 찾아가 이야기를 듣고 함께 학살지를 찾아가 그 이면에 담긴 이야기를 전해들을 수 있었다. 다음은 <불량국민들>의 저자 주철희 박사와 이달 초 가진 인터뷰 내용이다.

- 왜 <불량국민들>이란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나  
"여순사건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이지만 반란이란 이유로 묻혀 있다. 4·3사건, 5·18민주화운동도 현대사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지만, 여순사건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현대를 살아가는 국민들에게 이 사건을 제대로 알리고 싶었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상당 부분이 왜곡과 조작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여순사건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권력자의 정치적 탐욕과 거기에 국가폭력이 난무했다는 것을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었다. 둘째, 불량 국민으로 멍에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제는 당당한 대한민국의 시민으로서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셋째, 여순사건은 여수와 순천 등의 전남동부지역에 국한된 사건이 아니다. 여순사건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왜곡과 조작, 국가 폭력의 시발점이 된 사건이기 때문에 기록으로 남길 필요를 느꼈다."

- 사료가 방대하다. 몇 년 정도 준비했나?
"7년 정도 걸렸다. 역사적인 사료를 찾아 현장을 발고 뛰고 증언을 중심으로 주변의 곳곳을 돌아다녔다. 서울, 파주, 고창 등 전국 곳곳을 찾아다니며 자료를 준비했고 사건을 객관화시키려고 노력했다."

무능한 지방정부... "전남도가 나서라"

- 여순사건으로 얼마나 죽었나.
"아직까지 정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다. 대략 2-3만 명 정도가 사망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학살의 피해자가 얼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건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당시 이승만은 정치적으로 위기였다. 여순사건을 이용해 돌파구를 찾은 것이다.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 등 독재정부의 경우도 정치적 위기 때마다 간첩사건이 많이 벌어지지 않았나."

<여순사건 왜곡된 19가지 시선 - 불량 국민들>
 <여순사건 왜곡된 19가지 시선 - 불량 국민들>
ⓒ 북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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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제목을 <불량국민들>이라고 한 이유가 궁금하다.
"거창양민사건에서 보듯 양민은 좋은 말이다. 하지만 이쪽 사람들은 양민이 아니었다. 양민의 반대인 불량국민이었다. 그들은 빨갱이로 몰렸다. 국가폭력에 희생당한 선량한 시민들이 불량 국민이 된 거다. 국가폭력에 희생된 사람들이라는 의미다."

- 이 책의 부제에 '여순사건 왜곡된 19가지 시선'이라고 달렸던데. 특별히 19가지 시선을 선택한 이유가 있나.
"일반 독자들에게 여순사건을 보다 쉽게 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다. 여순사건에 대해 많은 부분이 왜곡되고 조작됐는데, 이를 분류하는 방법에서 19가지를 찾게 됐다. 그래서 그 부분에 초점을 맞췄고, 부제에도 그렇게 명시했다."

- 여순사건에 관한 또 다른 책이 나오나.
"여순사건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화, 소설 등의 예술·문학작품이 나와야 한다. 영화 <26년>을 통해 광주민중항쟁을 시민들이 새롭게 인식할 수 있지 않았나? 여순사건도 그러한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독자들이 쉽게 여순사건을 이해할 수 있게 소설책을 준비하고 있다. 또한 <불량국민들>과 같은 여순사건에 왜곡된 부분을 정리한 역사서도 발간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 여수 출신으로 알고 있다. 이 사건과 관련된 아픈 가족사가 있는지 궁금하다.
"특별한 가족사가 있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여수에 태어나 살면서 어려서부터 수없이 '나서지 말라, 중간만큼만 해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 책을 쓰면서 담지 못한 이야기는 혹시 없나? 책을 준비하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이승만의 국가폭력과 통치에 필요한 권모술수는 박정희 시대에 그대로 답습되었다. 이런 내용은 이 책 이후에 <불량국민들> 2탄(다른 제목이 될 수도 있음)에 담을 예정이다. 증언을 듣는 과정에서 고통스러울 때가 많았다. 아직도 말문을 닫은 사람들이 많아 안타깝기도 했다."

- 여순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가장 필요한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4·3사건과 관련 대통령이 2번씩이나 제주도민에게 사과를 했다. 여수지역은 아직까지 이런 사과나 진상규명이 없다. 최근 김성곤 의원이 특별법을 발의했다. 하지만 이는 효용성이 없다고 본다. 4·3사건을 밝히기 위해 제주는 도에서 피해조사를 실시해 중앙정부에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하지만 전라남도와 여수시, 즉 지방정부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다. 결의문 하나 발표하면 그만이다. 유가족들이 행사하면 돈 몇 푼 주고 끝내버린다. 이렇게 지역의 아픈 역사를 지방정부가 외면하고 무조건 중앙 정부에 손만 벌리고 있다. 당장 내일이라도 전라남도가 예산을 만들어 피해조사와 진실규명을 해야 한다. 그런 후 중앙정부에 요구해 특별법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해야 한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일본 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신사참배, 위안부와 독도 문제 등이 터질 때마다 우리 국민들은 분노한다. 태평양 전쟁 당시의 일본군 제복에 욱일승천기를 들고 거리를 활보하는 일본 보수우익들의 행동을 보면서 우리는 일본인들의 올바른 역사 인식을 촉구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왜곡되고 조작된 역사를 얼마나 제대로 청산해 왔는지 역사학자로서 의문스러울 뿐이다."

여수 역사의 '생얼'을 보고 싶다면...
여순사건 관련 400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 여수 둔덕동에 세워진 손양원 목사 기념공원. 손양원 목사를 추모하는 조각과 함께 기독교 신자들의 이름만 확인할 수 있다. 정작 억울하게 죽어간 시민들과 관련된 내용은 한구절도 없다.
 여순사건 관련 400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 여수 둔덕동에 세워진 손양원 목사 기념공원. 손양원 목사를 추모하는 조각과 함께 기독교 신자들의 이름만 확인할 수 있다. 정작 억울하게 죽어간 시민들과 관련된 내용은 한구절도 없다.
ⓒ 심명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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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역사의 감춰진 '생얼'을 보고 싶다면 꼭 찾아볼 곳이 있다. 베일에 쌓여있는 여순사건 유적지가 바로 그 곳. '제14연대(현재 한화여수공장) – 수상비행활주로 – 진남관 – 중앙동 인민대회장 – 중앙초등학교 – 만성리 학살지 – 둔덕동 손양원 목사 순교지'를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오동도의 경우 유명 관광지로 알려져 있지만 집단 학살지였던 사실을 아는 이는 별로 없다. 억울하게 죽은 이들을 기억하는 비문조차 하나 없다.  여순사건과 관련됐다고 조성된 고 손양원 목사의 기념공원에는 400억 원의 예산이 배정됐다. 한센병 환자들을 도왔던 손양원 목사는 여순사건으로 인해 공산주의자들에게 두 아들을 잃고, 1950년 북한군에 의해 죽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여수 둔덕동 손양원 목사 순교지에는 민간인 학살과 무관한 기독교 신자들의 이름은 새겨져 있고, 정작 억울하게 죽어간 150여명의 시민들의 학살에 관한 내용은 한구절도 없다.

우리나라 최초의 금지곡 '여수야화'

여순사건은 또 많은 노래를 남겼다. 우리나라 최초의 금지곡인 '여수야화'도 여순사건과 관련이 있다. '여수야화'는 당대 최고의 가수 남인수가 불렀다. 폐허가 된 여수의 참혹한 현실을 노래했다. 정부는 "가사가 불순할 뿐만 아니라 민심에 악영향을 초래할 우려가 있어 불온레코드로 판매금지했다"고 밝힌 바 있다. 



태그:#여순사건, #주철희, #불량국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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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하고 싶은 일을 남에게 말해도 좋다. 단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라!" 어릴적 몰래 본 형님의 일기장, 늘 그맘 변치않고 살렵니다. <3월 뉴스게릴라상> <아버지 우수상> <2012 총선.대선 특별취재팀> <찜!e시민기자> <2월 22일상> <세월호 보도 - 6.4지방선거 보도 특별상> 거북선 보도 <특종상> 명예의 전당 으뜸상 ☞「납북어부의 아들」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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