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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을 자다가 무심결에 다리를 쭉 폈는데 그만 쥐가 났다. 뻣뻣하게 굳은 장딴지를 어루만지면서 어찌할 줄 모르고 끙끙 앓았다. 아침에 일어나니 어젯밤에 쥐가 났던 장딴지 근육이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그래서 산에 갈 마음을 접고 집에 있기로 했다.

며칠 전에 어떤 분이 초피산에 가자고 제의를 했다. 초피산은 마니산과 이웃하고 있는 작은 산인데, 동네 뒷산이라 한 두 시간이면 오르내릴 수 있다. 그래서 만만한 마음으로 산에 들지만 그래도 얕봤다가는 큰 코를 다칠 수도 있다. 자그마한 산이지만 갖출 것은 다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가파른 바위길을 올라가야 정상에 닿을 수 있으니 가볍게 볼 산은 아니다. 

햇살의 유혹을 따라 길을 나서다

시계를 보니 오전 10시가 다 돼가고 있었다. 오늘 같이 산에 가기로 한 일행들은 오전 9시 40분에 출발하는 차를 타고 온다고 했다. 초피산 등산로의 시작점인 화도면 덕포리까지는 강화읍에서 버스로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니 그들은 지금쯤 불은면을 지나 길상면에 접어들었을 것 같았다. 쥐가 났던 한 쪽 다리가 뻣뻣해서 산에 가지 말까 생각했는데 마당에 환하게 비치는 햇살을 보니 마음은 이미 산에 가 있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채비를 차리고 집을 나섰다.

모내기를 앞둔 들에 물을 가득 잡아 놓았다.
 모내기를 앞둔 들에 물을 가득 잡아 놓았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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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피산이 있는 덕포리는 우리 집에서 약 4km 정도 떨어져 있다. 버스가 다니는 큰 길로 가면 빙 둘러서 가지만 샛길인 논길로 간다면 더 빨리 갈 수도 있다. 그래서 논길로 들어섰다.

모내기를 앞둔 들판에는 물이 가득했고, 물안개가 피어올라 허여스름하게 보였다. 왜가리며 백로들이 한가롭게 논 가운데를 걸어다녔다. 1년 중 이맘때가 가장 한가롭고 또 평화로울 것 같다.

농번기에는 가급적 농로에 들어서지 않는 게 좋다. 차 한 대가 다닐 수 있는 넓이의 들길은 군데군데 차가 서로 피할 수 있는 곳을 만들어 놔서 오가는 차가 서로 양보를 하면서 다니지만 그래도 농사철에는 다니지 않는 게 좋다. 한창 바쁜 일철에는 농부들이 길 한가운데 농기계나 차를 세워두고 일을 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그럴 때 길을 좀 비켜달라고 부탁을 하기가 참 미안하기 때문이다. 

들길에서는 농기계가 우선

논에서 한창 일을 하는 사람에게 길을 지나가야 하니 차를 좀 치워달라고 부탁을 하면 그 분들은 썩 내켜 하지 않는다. 하던 일을 멈춰야 하니 번거로울 것이다. 농로는 농기계들이 우선인 길이니 빨리 비켜주지 않아도 할 말은 없다. 그래서 그 분들이 길을 비켜줄 때까지 차 안에서 대책 없이 기다리기도 한다.

지난해 가을에는 밤에 급하게 어디를 가다가 길의 중간에 세워져 있는 트럭을 미처 보지 못해 곤욕을 치른 적도 있었다. 일이 밀려서 그랬는지 오후 9시가 넘은 시간임에도 불을 환하게 밝히고 벼를 추수하고 있었다. 그런데 탈곡기를 싣고 다니는 트럭을 길 가운데에 세워놓고 일을 하고 있었다. 아마 그 시간에는 들길을 다니는 차가 별로 없을 테니 차를 길 한가운데 세워놨을 것이다.

낮이었다면 길 가운데 세워져있는 트럭을 봤으리라. 그랬다면 그 길에는 들어서지 않았을 텐데 밤이라 미처 보지 못하고 들어섰다가 차를 빼달라는 소리도 못하고 후진으로 돌아서 나오느라 고생을 했다. 그래서 농사철에는 가급적 들길로 들어서지 않는데 초피산에 갈 때는 시간이 촉박해서 들길로 들어섰다.

뾰족한 산봉우리가 붓끝을 닮은 초피산.
 뾰족한 산봉우리가 붓끝을 닮은 초피산.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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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는 예전에 5개의 섬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조선 시대 때부터 바다를 메우는 간척사업을 해서 현재의 모양을 갖췄다고 한다. 바다를 메웠으니 들이 얼마나 넓겠는가.

우리 집 앞의 들판은 '가능들'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길상면 온수리에서 화도면 선수포구까지 들이 펼쳐져 있으니 그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들판에는 종으로 또 횡으로 가로지르는 들길이 잘 닦여져 있다. 모두 시멘트로 포장을 해서 차가 다니기에도 좋은 길이다. 그래서 평소에는 어디를 갈 때 들길로 해서 질러서 가기도 하는데 농사철에는 이처럼 뜻하지 않게 낭패를 보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에 잘 가지 않았다.

통통 튀는 햇살, 민달팽이도 나섰다

들길에 들어서기 전에 가물가물하게 보이는 길 저 끝 쪽까지 살펴봤다. 혹여 뭔가 있는 것 같이 보이면 그 길은 지나치고 다음 길을 또 살폈다. 그렇게 해서 들어선 길인데, 아뿔싸 한참을 달리다 보니 길에 트랙터 한 대가 서 있지 뭔가. 살펴본다고 봤는데도 잘못 본 모양이다. 

트랙터에는 모판이 실려 있었고 자전거가 한 대 길 가에 세워져 있었다. 아마도 지나가던 마을 사람이 모판 내리는 것을 도와주고 있는 듯했다. 한참 일을 하고 있는데 길을 비켜달라고 하기도 뭐 하다. 그렇다고 뒤로 돌아갈 수도 없다. 차를 돌릴 수 있는 곳까지 후진을 해서 가도 되겠지만 후진에 자신이 없는 나는 일이 다 끝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시계를 보니 오전 10시를 훌쩍 지나 있었다. 트랙터에 가득 실려 있는 모판을 다 내리자면 족히 5분 이상은 걸릴 것 같았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나는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기다리기로 했다.

햇살이 나뭇잎 사이를 통통 튀어 다닌다.
 햇살이 나뭇잎 사이를 통통 튀어 다닌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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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에는 강과 계곡이라고 할 만한 게 별로 없다. 하천이라고 이름이 붙어 있는 곳이 더러 있지만 그것은 하천이라기보다 수로에 가깝다. 강은 대개 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물들이 모여 큰 강을 이루는 게 정한 이치인데 강화는 섬이라서 크고 깊은 산이 없다. 계곡 또한 마찬가지리라. 산이 높고 골이 깊어야 물을 많이 품은 계곡이 있을 텐데 강화의 산들은 그만큼의 물을 품고 있지 못한 지 강화에는 이렇다 할 계곡이 없다.

덕포리에는 마니산 자락에서 흘러내려오는 계곡이 있다. 비록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그래도 일 년 내내 깨끗한 물이 흘러내려온다. 물소리를 들으며 동네 길을 따라 올라갔다. 바위에 부딪히며 흘러가는 물소리가 반가웠고, 청량감이 들었다.

초피산은 보는 방향에 따라서 산의 모양이 달리 보인다. 남쪽인 가천의대 쪽에서 보면 꼭 여인의 유방처럼 봉긋한 모양인데 양도면 하일리에서 보면 붓끝을 보는 양 뾰족하다. 또 전등사가 있는 온수리에서는 마치 쇠 종을 엎어놓은 것처럼도 보인다.

우리 집 마당에서도 초피산이 보인다. 역시 붓끝처럼 뾰족하다. 나는 더러 혼자서 문필봉(文筆峰)이라고 불러본다. 산의 모양새를 보고 내가 혼자 붙인 이름인데, 근처에 강화학의 태두인 하곡선생의 묘소도 있으니 문필봉이란 이름도 어울리는 듯하다. 문필봉이란 이름답게 앞으로 큰 학자가 또 나올 것을 빌어보기도 한다.

최고의 치료사, 자연

산에 들어서니 세속을 떠난 듯 고요하고 청정하다. 산길을 따라 올라가자니 나보다 먼저 걸어간 존재가 있었다. 굽이 있는 걸로 봐서 고라니일 것 같다. 똥도 한 무더기 싸놓은 걸 보니 그 걸음이 편하고 좋았나 보다. 5월의 햇살은 통통 튀며 나뭇잎 사이를 건너다닌다. 햇살과 나뭇잎이 소꿉장난을 하는 것 같다.

민달팽이는 바쁜 게 없는가 보다. 땅에 무릎을 대고 엎드려서 한참을 지켜봤다. 내가 저를 지켜보고 있는 걸 아는 건지 민달팽이는 도무지 길을 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참을성의 한계에 도달한 나는 달팽이를 살며시 건드렸다. 그제야 반응을 보이며 몸을 움츠린다. 세상을 향해 뻗었던 더듬이도 황급하게 안으로 들여 버렸다.

초피산 꼭대기에 서면 마니산이 바로 옆에 보인다.
 초피산 꼭대기에 서면 마니산이 바로 옆에 보인다.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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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먼저 간 사람들은 어디쯤 가고 있는 것일까. 귀를 기울여 봐도 사람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산이 깊은 것도 아닌데 사람 소리가 들리지 않다니, 그들보다 내가 먼저 온 모양이다. 이왕 혼자 걷는 걸음이니 즐기기로 했다. 햇살에 뺨을 내밀어주기도 하고 연둣빛 잎새와 손을 잡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노닥거리고 있는데 사람 소리가 들렸다. 오늘 같이 걷기로 한 일행들이다. 나보다 한참 먼저 산에 든 줄 알았는데 이제서야 올라오고 있다. 강화읍에서 버스를 타고 온 그들은 초피산 밑 동네인 덕포리에서 내리지 않고 그 앞 동네에서 내려 걸어왔다고 한다. 산을 오르내리는 시간을 다 합해봐야 1시간 여밖에 걸리지 않는 초피산만 걷기에는 양에 차지 않아서 일부러 그렇게 한 모양이다.

가파른 길을 오르느라 힘들었는지 정상에 오르자 모두 숨을 내쉬며 올라온 길을 내려다본다. 환갑을 넘나들은 분들인데도 생기가 넘치고 발랄해 보인다. 자연을 품에 안은 덕분에 얻은 젊음이리라.

땀을 좀 거둔 다음에 그늘에 자리를 잡고 싸온 점심밥을 펼쳤다. 쌈에 나물에 고기볶음까지, 잔치가 따로 없다. 화기애애하게 밥을 나눠먹었다. 산에서 먹는 밥이 맛있어서 길을 나선다며 우스갯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분들은 내처 마니산에 오르기로 했다. 오월의 유혹을 받아들이기로 한 모양이다. 신록과 햇살을 따라가면 마니산도 금방 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오후 일정이 있는 나는 갈림길에서 그들과 헤어졌다. 산기운을 듬뿍 받고 와서 그런지 일을 해도 힘들지가 않았다. 역시 자연은 최고의 치료사다.


태그:#강화도, #강화나들길, #초피산, #마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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