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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중희 선생 미국 보내기 마지막 보고 기사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이 말은 서울 광화문 네거리 교보문고 어귀 돌에 새겨져 있다. 사람과 책의 관계를 한 마디로 요약해 주는 명언이다. 그런데 한 권의 책을 만드는 일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저자와 출판사(편집자), 디자이너 그리고 인쇄소, 제본소의 여러 분들의 노고로 비로소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진다. 또 저자는 한 권의 책을 집필하고자 자료 수집을 위해 온갖 정성을 쏟기 마련이고, 언저리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기 마련이다.

지난 4월 17일 수요일, 오후 1시 교보문고 옆 한 한식집에서 다섯 사람이 모여 내가 최근에 펴낸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의 매우 간소한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내가 애초 초대하려는 손님은 안두희를 저승으로 보낸 부천에서 택시기사를 하시는 박기서 선생, 암살범 안두희를 10여 년 끈질기게 추적한 권중희 선생을 대신한 부인 김영자씨 두 분이었다.

이 소식을 듣고 이번 책을 펴낸 준 눈빛출판사 이규상 대표 그리고 서평을 써 주신 고상만 시민기자가 당신도 박기서 선생과 구연도 있을 뿐더러 꼭 두 분을 꼭 뵙고 싶다고 하여 동참을 원해 그래서 나까지 모두 다섯 사람이 되었다.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출판기념회를 갖고자 만난 다섯 사람들(오른쪽부터 안두희를 저 세상으로 보낸 박기서 선생, 권중희 선생 부인 김영자 씨, 필자, 고상만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눈빛출판사 이규상 대표).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출판기념회를 갖고자 만난 다섯 사람들(오른쪽부터 안두희를 저 세상으로 보낸 박기서 선생, 권중희 선생 부인 김영자 씨, 필자, 고상만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눈빛출판사 이규상 대표).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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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그동안 30여 권의 책을 펴냈다. 내가 1989년 첫 작품집 <비어 있는 자리>를 펴내자 그때 제자들이 주관하여 이대교수 식당에서 출판기념회를 가졌던 바 있었다. 이후에도 몇 제자들이 출판기념회를 열어주겠다고 하였지만 늘 사양해 왔다. 언저리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이후에는 단 한 번도 출판기념회를 갖지 않은 채 매번 조용히 보냈다.

어쩌면 하찮은 이 이야기를 내가 굳이 쓰는 까닭은 이 글이 '권중희 선생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보내기' 성금을 모아주신 오마이뉴스 올드 팬에게 드리는 나의 마지막 보고 기사이기 때문이다.

NARA(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전경
 NARA(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전경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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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판에 넘어지다

지난해 봄(2012, 2), 나는 조상 산소를 수목장으로 이장하기 위해 월정사 뒤 지장암 전나무 숲에서 나무를 고르다가 그만 빙판에 미끄러졌다. 그때 오른 손을 땅에 짚었는데 통증이 심해 병원에 가보니 엄지손가락에 금이 가서 한동안 그 부분을 깁스하고 지냈다. 의사는 나에게 오른 손 사용을 당분간 금했고, 실제로 사용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 보니 나는 컴퓨터 자판을 두들길 수가 없었다.

지난날 나는 내 영혼이 담긴 박도체 육필로, 그것고 만년필만으로 원고를 쓴다고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는 글쓰기를 거부해 왔다. 그런  내가 그 언제부턴가는 자판으로 두들기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도록 별 수 없이 문명의 노예가 돼 버렸다. 그런데 그즈음 오른 손목 깁스로 자판을 두들길 수 없으니 보통 좀이 쑤시는 게 아니었다.

늘그막에 나는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하고, 생활자세와 태도도 그렇게 익히도록 노력하고 있다.

'그래, 당분간은 내 머릿속의 글을 우려내지 말고, 이 참에 재충전, 곧 내 골 빈 머리를 알차게 메우자.'

그래서 날마다 원주시립도서관을 다니면서 독서로 지냈다. 그런 가운데 어느 날 도서관 서가에서 선우진 회고록 <백범 선생과 함께 한 나날들>이라 책을 발견한 뒤 대출받아 날개에 있는 저자의 소개를 보고 깜짝 놀랐다.

'2009년 5월 별세'

나는 순간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말을 실감함과 동시에 그 몇 해 전 선우 선생님과 인사를 나눈 뒤, 언제 조용한 자리를 마련하여 백범 선생님 마지막 행장 이야기를 듣기고 언약했는데 이럴 수가. 다행히 책 속에는 선우 선생이 나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고스란히 담아 두셨다. 

나는 그 책을 밤새우다시피 읽으면서 문득 나도 어느 날 갑자기 이 세상을 떠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백범 선생 암살자 안두희를 추적한 김용희, 곽태영, 권중희, 박기서 등 네 분 가운데 김용희 선생을 제외한 세 분은 내가 직접 만났고, 특히 권중희 선생은 2003년 10월에 만나 이듬해 3월까지 5개월 동안 거의 매일, 미국에 가서는 한 방에서 47일 동안, 가족 외 가장 여러 날 한 방에서 동침한 사이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권 선생에게 별 별 이야기를 다 들었고, 또 NARA(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드나든 이야기, 미주 동포들의 백범 선생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정성 그리고 암살자의 최후 숨통을 끊게 한 박기서 선생의 이야기 등도 하나의 역사이기에 한 권의 책으로 써서, 먼저 권중희 선생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준 누리꾼들에게 바쳐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정말 그때 그분들은 너무 고마웠다.
 
NARA에서 찾은 문서 목록과 문서 및 백범 김구 배후 관련 기록물 목록과 자료를 묶은 서류철 5권
 NARA에서 찾은 문서 목록과 문서 및 백범 김구 배후 관련 기록물 목록과 자료를 묶은 서류철 5권
ⓒ 이선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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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삿짐 보관소에 맡긴 유품

내 오른 손에 깁스를 한 지 한 달이 지나자 엄지손가락이 거의 원상으로 회복되었다. 나는 곧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를 집필하기로 기획하면서 자료수집에 들어갔다. 마침 오마이뉴스에 보낸 내 기사는 이미 출력하여 '감동과 좌절 150일간의 기록'이라는 제목으로 서류 봉투에 보관 중이던 것을 찾아 다시 읽어가면서 이 책에 담을 내용을 추려 뽑았다.

백범 선생에 대한 자료와 암살자 안두희의 자료는 백범기념관을 찾아가 홍소연 자료실장에게 부탁드리자 기념관 서고에 비치 중인 자료를 알려줘 쉽게 해결되었다. 그런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나와 권중희 선생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을 찾아가 활동한 기록물을 입수치 못해 난감했다.

그 문서기록철은 모두 5권으로 미국 현지 'Kim Koo Research Team' 장 재미 유학생 이선옥 씨가 애써 만든 것으로 귀국 후 권중희 선생이 보관하고 있었다. 그런데 권중희 선생이 2007년에 작고하여 부인 김영자씨에게 그 서류의 보관 여부를 전화로 문의했다. 김영자씨는 권 선생이 돌아가신 뒤 집을 줄여 이사를 다니는 바람에 권 선생의 유품들은 도저히 주체할 수가 없어 어느 이삿짐 보관센터에 맡겼다고 하면서 아직도 그들이 권 선생 유품을 보관하고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 답변을 듣고 캄캄했다.

그러나 부인에게 이삿짐 보관센터에 가서 찾아봐 달라고 부탁하는 말이 도저히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마침 내 메일함 주소록에 남아 있는 미국 유학생 이선옥씨에게 부탁하자 며칠 후 답장이 왔다.

백범 선생이 중매선 부부 이야기

박도 선생님!
안녕하세요. 이선옥입니다. 건강은 괜찮으신지요? 지난 2주 동안 출장에, 집안일에, 양육에, 공부까지 정신없이 살았습니다. 늘 바쁘지만, 그럼에도 마음의 평정과 중심 잡힌 삶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따금 NARA에서 박유종 선생님(박은식 선생 손자로 나를 줄곧 도와주신 분)을 뵙습니다. 그때마다 박도 선생님 안부도 듣고 또 전합니다. 나의 남편(주태상 씨)은 지금 작은 비즈니스를 운영하고 있고, 저는 얼마 전 과거사진실위원회에서 일하다가 지금은 행정안전부소속 대한민국 국가기록원 해외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박도 선생님이 요청하신 작업 보고서 및  주요 문서를 번역해 놓은 것과, 보고서 뒤에 별첨 형태로 첨부된 김구 관련 직, 간접 문서와 관련 문서 가운데 CIA에서 수거해 찾아볼 수 없었던 문서 목록까지 보내드립니다. 참조 하세요. 다행히도 예전 컴퓨터에 잘 저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다행입니다. 지금 보니, 그때 참 열심히 일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마이뉴스 누리꾼 여러 분들의 염원이 담긴 성금으로 작업을 하다 보니, 사명감과 책임감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저와 남편은 김구 암살배후 진상규명을 위한 자원봉사자로 만난 인연 때문에 서로 알게 되어, 2005년 5월에 남편과 아내로 굳게 서약하고 지금까지 두 아이의 아빠와 엄마로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큰딸 이름은 주민지로 다섯 살입니다. 둘째 아들은 주승민으로 세 살이고요. 저희 가족사진 보냅니다. 예쁘게 봐 주세요. 추워지는 가을, 선생님 건강에 유의하세요.

2012. 10. 13.  미국 메릴랜드에서 이선옥 올림.

백범 김구 암살 배후 관련문서를 찾는 일을 함께 하다가 부부가 된 이선옥 주태상 가족
 백범 김구 암살 배후 관련문서를 찾는 일을 함께 하다가 부부가 된 이선옥 주태상 가족
ⓒ 이선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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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A 구내 식당에서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토론하는 '김구 리서치 팀'. 오른쪽 부터 권중희, 이도영, 박유종, 정희수, 이선옥, 주태상, 김봉렬 ebs pd. 이때부터 이선옥 주태상 두 사람은 서로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때부터 서로  전류가 통한 모양이다.
 NARA 구내 식당에서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토론하는 '김구 리서치 팀'. 오른쪽 부터 권중희, 이도영, 박유종, 정희수, 이선옥, 주태상, 김봉렬 ebs pd. 이때부터 이선옥 주태상 두 사람은 서로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때부터 서로 전류가 통한 모양이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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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우리가 미국 NARA를 찾아갔을 때 이선옥씨는 유학생 신분으로 김구 관련 문서를 찾는 일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했는데, 그때 동참한 재미 동포 주태상씨와 만난 인연으로 부부 사이로 발전했다. 그들 부부의 중매는 결국 백범 선생이 서신 셈이다. 이선옥씨가 보내준 가족사진을 보니 놀랍고도 반가웠으며 엄청 기뻤다. 아마 하늘에 계신 백범 선생님도, 권중희 선생님도 두 분의 앞날을 축복해 주실 것이다.

그런데 이선옥씨가 보내준 자료는 나의 갈증을 해소치 못했다. 나는 다시 우리가 NARA(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찾은 중요 문서를 수고롭지만 다시 NARA에 찾아가서 스캔하여 메일로 보내달라고 부탁하였다.

나의 무리한 부탁인데도 이선옥씨는 조금도 싫어하는 내색을 하지 않고 시간 나는 대로 메릴랜드 주 칼리지파크에 NARA로 가서 문서를 다시 찾아 스캔하여 보내주겠다는 답신을 보내왔고, 부탁한 지 40여일 만에 그 서류 복사본이 내 메일함에 도착했다.

NARA에서 찾은 김구 관련 문서
 NARA에서 찾은 김구 관련 문서
ⓒ NARA(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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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도 선생님!
안녕하세요. 전문 398은 문서가 총 7장입니다. 그 가운데 해당문서는 한 장이구요. 전문 427은 총 27장입니다. 그 중 해당문서는 세 장입니다. ……

일단, 작업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마이크로필름 실에서 필름형태로 찾아야 했고… 순서대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서요.

예상보다 문서가 많아서 혹시 몰라, 필름 형태의 문서를 카피하여 왔습니다.

전문 427의 경우, 제가 일단 보관하겠습니다. 박 선생님께서 전문 전체가 필요하시면, 스캔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제가 보낸 자료가 집필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박도 선생님, 건강하세요. 도움 더 필요하시면 말씀하시구요.

박 선생님을 미국에서 꼬옥 뵈었으면 합니다. 저는 당분간 한국에 나가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민족정기를 되살리시려는 선생님의 뜨거운 애국심과 노고에 감사드리며….
2012년 11월 29일 미국 메릴랜드에서 이선옥 올림.

백범 김구 선생님
 백범 김구 선생님
ⓒ 백범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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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와 저자의 현실

나는 이 모든 자료들을 들춰보면서 미친듯이 자판을 두들겨 갔다. 나는 집필하는 가운데 어려울 때마다 <백범일지>를 펼치거나 백범 선생 만년의 사진을 바라보면, 마치 백범 선생님이 내 등을 두드려 주신 듯 힘이 솟았고, 또 어려운 일들이 이상하게 술술 풀려갔다.

나는 이 책을 집필하는 기간 참으로 행복했다. 멋진 분과 영혼을 교감하기 때문이었다. 왜 우리는 이런 위대한 분을 지도자로 모시지 못하고 동족이 쏜 총탄으로 저 세상으로 보내야 했을까. 나는 생각할수록 분하고 원통했다. 그 결과 지금도 남북 휴전선 일대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2012년 9월 30일 한가위 날, 나는 보름달을 바라보며 이 책의 원고를 집필하기 시작하여 2013년 1월 20일에 탈고했다. 가장 염려스러웠던 출판사 문제는 그동안 내 책을 11권이나 내 준 눈빛출판사 이규상 대표가 이번에도 팔을 걷어주었다. 아무튼 그분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나는 2008년에 호남의병전적답사기인 <누가 이 나라를 지켰을까>를 눈빛출판사에서 펴냈는데 초판 1000부 가운데 아직도 절반 정도가 재고로 남아 있기에 여간 미안치 않았다. 이상하게도 독립운동 이야기는 생각보다 책이 팔리지 않았다. 그 원인을 내가 잘못 쓴 내 탓이라고 돌리지만 뭔가 우리 사회는 '의(義)'와는 거리가 먼 느낌이다. 해방 후 우리나라의 각계각층 윗자리는 거의 대부분 '의(義)'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 차지하고 있었다. 내가 30여년간 근무했던 교육계도 예외가 아니었다.

출판계 현실을 잘 모르는 사람은 내가 책을 30여 권 펴냈다면 인세로 꽤 돈을 모은 줄 아는데 사실 내가 쓴 책은 대부분 독립운동 유적지 답사거나 근현대사 자료 발굴에 관한 책들이라 어떤 책(항일유적답사기)은 답사비는커녕 사진 값(그때는 필름 카메라였기에)도 뽑지 못했다. 한국전쟁 사진집인 <지울 수 없는 이미지>는 자료 수집 차 내 개인돈으로 두 차례나 더 NARA에 가서 스캔해 와 출판했으나 여비의 절반도 건지지 못했는데 메이저 신문에서조차 아무런 사전 양해도 없이 내가 애써 수집해온 사진을 자기들 마음대로 게재했다.

그런데도 책이 나오면 여기저기서(심지어 도서관조차도) 무료로 기증해 달라 하고, 어떤 친구는 사인해서 우송해 달라고 하여 아주 난처하게 만들곤 했다. 아마도 우리나라는 정치지망생들이 선거 때마다 책을 공짜로 마구 뿌려 출판계에 아주 나쁜 선례를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2004년 3월에 눈빛출판사 이규상 대표를 처음 만났는데, 그 무렵 그 출판사 직원은 대여섯 명으로 내가 찾아가면 직원들이 일제히 일어나 제비처럼 "어서 오세요"라고 합창하였다. 그런데 이즈음에는 직원이 한 사람뿐으로 출판사 편집실에 가면 썰렁하기 짝이 없고, 나도 이태 전 평생 처음 원주에서 33평 짜리 미분양 아파트를 한 채 사서 지내고 있는데, 아내가 지난해부터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를 줄여 더 좁은 곳으로 이사 가자고 간청하는 걸 미루어오다가 며칠 전에 하는 수 없이 부동산에 내놓았다.

이것이 지금 우리나라 출판사와 저자의 현실이다. 그래도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그동안 30여 권의 책을 냈고, 앞으로도 더 내주겠다고 선약한 출판사도 있다. 많은 작가 가운데는 원고를 쌓아두고도 책을 내지 못한 분도 숱하다. 어느 하루 서울나들이 길에 지하철을 타고 가며 주위 열 사람을 무작위로 골라 무엇을 하는가 보았더니 그 가운데 여덟 사람이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그래서 인문이 죽어버린 대한민국은 민족반역자 후손들이 나라를 흔들고, 온통 부정부패 비리로 얼룩진 이들이 의사당에서 큰소리를 치고 있다. 돈에 환장한 일부 백성들은 아파트 값만 올려준다면, 내 손에 단돈 몇 푼만 집어준다면 친일파 후손은 물론이요, 온갖 사기꾼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잡범 투기꾼도 상관치 않고 지도자로 뽑아주는 오늘의 대한민국이다. 그게 이 나라를 망치는 길인 줄도 모른 채….

대한 독립만세!

나는 10여 년 독립운동 관련 책을 쓰고자 국내외를 답사하거나 자료를 뒤적이면서 왜 그분들이 "맞아죽거나 굶어죽거나 추위에 얼어 죽는 고통 속에서도 독립운동을 하였는가"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그것은 그분들은 대의(大義)를 위해 자신의 안일을 버렸기 때문이다.

일찍이 시인 이육사는 감옥에서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고 극한의 상황에서도 희망과 기쁨을 누렸다. 내가 의병전적지에서 만난 기산도 의사, 백낙구 맹인 의병장, 김태원·김율, 김원국·김원범 형제 의병장 등, 여러 순국선열들은 일제의 사냥개가 되고 권력의 하수인이 된 자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그분들은 일제강점기에 감옥 바깥세상보다 오히려 감옥 안이 더 마음이 편안하다는 그런 자세로 독립운동을 했다. 사실 그런 기쁨과 마음가짐이 아니고서는 독립운동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진짜 독립운동가들은 형장에서 교수형을 당하면서도 "대한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불렀다.

다음은 1948년 4월, 백범 선생이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고자 북으로 떠나기 전에 기자들에게 남기신 말씀이다.

"나는 남조선에서 가만히 있으면 안락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도 잘 안다. 그러나 일생을 바쳐서 오로지 자기 동족을 구하고 국가를 사랑한다는 내가, 몇 해 남지 않은 여생을 안락하게 보내기 위하여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동포의 지옥행을 앉아서 보고만 있겠는가."

그리고 또 북행 날 아침 백범 선생의 앞길을 막는 이들에게 말씀하신 대목이다.

"내가 가면 공산당에 붙들려서 오지 못할까 염려해서인 줄 안다. 그러나 내가 살면 얼마를 사느냐. 제발 나의 길을 막지 말라."

나는 이 책을 쓰면서 백범 선생의 이런 말씀들을 문헌에서 찾아 옮길 때 너무 감동하여 밤잠을 설치곤 했다. 바로 이런 기쁨에 나는 늘 밑지는 독립운동 이야기를 바보처럼 쓰며 살고 있다. 사람 같은 사람, 아름다운 사람을 존경하고 바라보는 일이 가장 즐겁고 보람되기 때문이다.

'민족혼은 살아있다' 권중희 선생이 손수 쓴 휘호다. 오른쪽은 권중희 선생이고 왼쪽은 필자다.
 '민족혼은 살아있다' 권중희 선생이 손수 쓴 휘호다. 오른쪽은 권중희 선생이고 왼쪽은 필자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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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혼은 살아있다

2004년 1월 31일, 권중희 선생은 미국으로 가면서 인천공항 쓰레기통에 태우던 담배와 라이터를 모두 버렸다. 그런 뒤 어느 날 밤 권 선생은 숙소에서 고국에 있는 부인으로부터 집주인이 집을 비워달라는 전화를 받고, 곧 구내매점으로 가서 담배를 사와 소파에 앉아  불에 붙였다.

"박 선생, 내가 사내자식으로 일구이언을 해 볼 참으로 낯이 없소."
"아닙니다. 태우세요. 저도 집사람한테 그런 전화를 받았으면 끊었던 담배를 입에 물 겁니다."
"안두희를 추적 응징한 나에게 대한민국은 가난과 징역살이를 시켰소. 내 인생은 안두희로 삐끗했지만 진짜로 민족정기와 정의, 양심이 펄펄 살아 있는 나라에 단 하루라도 살고 싶소."

그분은 다시 담배를 물고는 나에게 간청했다.

"두 전직 대통령 머리에 정의봉을 한 방만 내리치면 아마도 그들 베갯잇 속에 꼬불쳐놓은 돈까지 다 꺼내놓을 겁니다. 또, 영부인들 엉덩이에다 안두희에게 놓은 대침 한 방씩만 꽂으면 사돈팔촌까지 장롱 속 깊이 꼬불쳐 감춰놓은 돈은 물론이고, 그들 고쟁이 속에 숨겨둔 퀴퀴한 돈까지 다 게워내며 제발 살려달라고 싹싹 빌 겁니다. 이 일이 성공하면 비로소 대한민국에 부정부패가 사라지기 시작하는 첫 날이 될 겁니다.

보세요, 그들이 거들먹거리며 잘 살아가니까 그 다음 후임자들이나 그 친인척들이 죄다 그대로 답습치 않습니까. 그들이 먹은 돈을 게워내지 않는 한 대한민국의 정의는 살아나지 않습니다. 공권력이 아무리 설쳐도 도둑들을 절대로 근절시키지 못합니다. 박 선생, 우리 귀국하면 그 일을 나와 같이 합시다."

다음은 2005년 6월 17일, 박기서 선생이 백범 묘소에서 나에게 한 말이다.

"백범 선생님을 시해한 안두희 그 자는 인간쓰레기입니다. 배운 게 부족한 제가 이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런 인간쓰레기를 치우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진작부터 청소부 심정으로 그를 처치할 날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만고역적 안두희, 그런 자가 호의호식하면서 천수를 다 누린다면 이 땅에서는 교육이 안 되지요. 우리 후손을 볼 낯도 없어지고요. 사실은 그런 자와 같은 하늘 아래서 공기를 마시는 것조차 부끄러운 일이기도 하고요.

저는 천주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십계명에도 살인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저도 왜 종교적으로나 인간적으로 갈등이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사회의 도덕성이랄까, 대의랄까, 국가 정의를 위해 그를 처단하는 게 옳다는 신념에서 모든 벌을 받을 각오하고 그를 단죄하였습니다."

나는 그분 앞에 대학을 나온 내가 부끄러웠다. 또 한편으로는 그런 분을 만나 그런 말씀을 듣고 글로 옮겨 쓰는 일이 행복했다. 그러면서 이 책이 나와 출판사로부터 인세를 받으면 가장 먼저 권중희 선생을 대신하여 부인 김영자씨와 박기서 선생을 모시고 밥 한 끼 나누고 싶었다.

후원자 유무상통마을의 방구들장 신부님('영웅 안중근'에 이어 이번에도 작가와 출판사를 위해 후원해 주셨다.)
 후원자 유무상통마을의 방구들장 신부님('영웅 안중근'에 이어 이번에도 작가와 출판사를 위해 후원해 주셨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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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20일, 눈빛출판사에서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초판 1000부가 나왔다. 이 소식을 듣고 미리네 유무상통마을의 방구들장 신부님이 선뜻 300부를 구입해 주셨다.

시민기자 고상만씨가 "'안두희 뒤의 검은 손' 백범을 죽인 진짜 범인"이라는 서평을 써준 덕분으로 책이 출판된 사실이 오마이뉴스 누리꾼들에게 알려져 그분들의 도움으로 한 달 만에 2쇄를 찍게 되고, 지난 15일 내 통장으로 1쇄 인세 전액 128만 7천원이 입금되었다.

나는 즉시 지금도 부천에서 택시기사로 일하시는 박기서 선생에게 쉬는 날을 문의하자 수요일과 일요일이라 하여, 우리 다섯 사람은 지난 주 수요일인 4월 17일, 서울에서 가장 찾기 좋은 광화문 네 거리 비각 앞에서 만나 출판기념회를 가진 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라는 돌비석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끝으로 우리 다섯 사람이 즐겁게 만날 수 있게 도와주신 오마이뉴스 누리꾼 여러분과 오마이뉴스 편집부 여러분에게 충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지난날 나는 의롭게 살지 못했지만, 앞으로 남은 날 의롭게 사신 분의 이야기와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올곧고 쉽게 써서 다음 세대에게 남기는 일을 죽는 날까지 하겠다는 약속을 드리며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출판에 얽힌 뒷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강원도 원주에서 박도 올림"

덧붙이는 글 | 2013. 4. 19.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에서 집중인터뷰를 하였습니다. 다시듣기로 들을 수 있습니다.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박도 지음, 눈빛(2013)


태그:#백범 ,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권중희, #박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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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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