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션에게 1집 앨범이란 음악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다. 한정된 기회에 모든 것을 어필해야 하는 신인의 특성상, 해당 뮤지션의 모든 역량을 진하게 압축한 경우가 많다. 데뷔 앨범에서 제 길을 찾지 못하다 3, 4집에서 빛을 발하는 대기만성형 뮤지션도 이 점에선 다르지 않다. 음악을 대하는 초심, 추구하는 스타일과 한계점, 포부가 한 데 담겨있기에 그것은 곧 뮤지션의 정체성 그 자체다.

그렇게 본다면 싸이의 데뷔 앨범인 <싸이 프롬 더 사이코 월드>(Psy From The Psycho World)역시 그의 정체성을 한 데 담은 결정체라 할 수 있겠다. 허술한 앨범 화보, 저렴한 가사, 거친 편곡과 쫄깃한 라임 운용은 강남스타일의 성공 이후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한 싸이 만의 'B급 정서'를 진하게 드러낸다. 오히려 북미 산업전선의 개척자를 자처하는 지금보다 더 저렴하고 공격적이다.

싸이식 정공법과 한계. 역사는 반복된다.

새삼스럽게 눈이 가는 것은 싸이의 음악적 영민함이다. 그는 이 앨범의 모든 곡을 쓴 작곡가이자 그것을 하나의 앨범으로 다듬은 프로듀서였다. 단순히 곡을 쓰는 수준을 넘어 가지런히 정리된 일련의 트랙들을 통해 자기만의 'B급' 캐릭터를 단단하게 구축했다. 더불어 자신을 대중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어필할 수 있는지 그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신인인 싸이에게 있어 가장 든든한 지원군은 싸이 자신이었던 셈이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기 위한 방법으로 정공법을 선택했다. '얼굴 없는 가수'라는 우회로를 포기하고 막춤과 뱃살로 무장한 채 무대에 올랐다. 도박에 가까운 작전이었지만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의 무대 앞에서 겁에 질렸던 여고생들은 어느새 싸이의 편이 돼 있었다. 그리고 단숨에 차지한 가요순위프로 1위. 단언컨대, 싸이의 데뷔 무대는 가요계 역사상 최고의 기습 작전으로 남을 만했다.

그러나 선택에는 항상 대가가 따른다. 충격적인 데뷔 무대를 통해 인지도를 높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음악가로서의 싸이는 이후에도 오랜 시간 주목받지 못했다. 대중들은 그저 그의 엽기적인 모습을 즐기기 바빴다. 사람들에게 그는 이상한 옷차림에 이상한 얼굴로 이상한 춤을 추는 이상한 가수였을 따름이었다. 이름은 알려졌지만 실속은 없었다.

그는 여기서 물러서지 않고 다시 한번 정공법을 선택한다. 전작보다 직설적인 가사로 무장한 2집 앨범 <싸2>를 통해 더욱 힙합에 가까운 음악을 들려주고자 했다. 그러나 대마초 흡연으로 인한 형사입건과 함께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2집 앨범은 그대로 수면 아래로 묻혀버렸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회심의 재기작인 <챔피언>의 성공을 제대로 느껴볼 새도 없이 들어간 군대, 그리고 또 들어간 군대. 그 두 번의 신교대 생활을 마치고 애국과 공익을 말하고 나서야 '날라리' 싸이는 자신의 정체성과 한국에서 생존 가능한 이미지 사이에서 가까스로 접점을 마련할 수 있었다. 모두 알다시피 그 과정에서 가장 큰 빛이 돼준 건 다들 알다시피 '독도 지킴이' 김장훈이었다.

그러나 강렬한 빛 옆에서 어둠은 힘을 쓰지 못하는 법. '기부천사'와의 연이은 조인트 공연으로 인해 양아치 이미지는 그만큼 퇴색할 수밖에 없었고, 또한 그만큼 빛의 자식으로서 살아야만 했다. 분명 그에게는 걸맞지 않는 삶이었다. 사자가 배추를 뜯어먹는 나날의 연속이랄까. 

싸이 최고의 히트작인 <강남스타일>은 이렇게 건강해진(?) 자신에 대한 반성에서 나왔다. LMFAO나 데이빗 게타(David Guetta)가 주도한 하우스 스타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여기에 말 춤과 '똘끼' 넘치는 뮤직비디오를 장착했다. 20대 초반의 날선 모습은 아니지만, 여전히 놀고만 싶은 철없는 서른다섯 살 아저씨의 날라리 근성을 표현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것이 전 지구적 흥행을 끌어냈다.

자, 이 지점에서 관점을 바꿔볼 여지가 생긴다. <강남스타일>과 <젠틀맨>은 분명 1집의 B급 정서를 계승한다. 그렇다면 13년 전, 우리가 싸이를 처음 봤을 때의 충격과 해외팬들이 싸이를 처음 접했을 때의 충격은 모르긴 몰라도 겹치는 맥락들이 있지 않을까. 실제로 흥행 요소에서 <새>와 <젠틀맨>은 근본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 13년 전 자기 몸을 더듬고 막춤을 추던 싸이의 퍼포먼스는 뮤직비디오로, 당시 주류였던 거친 편곡의 힙합은 하우스 뮤직으로 이동했다.

이 얘기는 지금의 성공 이후 찾아올 한계와 난관도 비슷한 성격의 것일 수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싸이 자신에게 불행이자 행운일 수 있다. 자신이 가진 코믹한 요소와 비주얼 쇼크가 가진 한계가 반복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불행이다. 동시에 이미 같은 유형의 난관을 한 번 거쳐봤다는 점에서 그것은 행운이다.

싸이에게 남은 마지막 관문. 슈퍼스타로 가는 길.

지금 미국의 대세는 '상 돌아이' 스타일의 뮤지션이다. 스스로 '돌아이'가 되거나 반대로 대중들을 '돌아이'로 만드는 뮤지션들이 사랑받고 있다. 맥클모어 앤 루이스는 역사상 유일무이한 중고품 스웨거(Swager)를 자처하는 '똘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바우어는 자기 대신 나머지 사람들을 전부 '돌아이'로 만들며 빌보드 정상에 올랐다. 급격히 커진 유투브의 영향력과 그에 따라 재편되는 뮤직비디오 중심의 음악시장이 만들어낸 흐름이다.

싸이 역시 미국 음악 시장의 쟁쟁한 '돌아이' 중 하나다. 트렌드의 첨단을 자랑하는 곳에서 한국 가수가 선두를 달리는 건 분명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2,3년 단위로 짧아져 가는 트렌드의 교체 주기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레퍼토리가 필요한 건 그래서다. 다행히도 싸이는 여타의 '돌아이'들 보다 꽤나 유리한 위치에 있다. 13년간 국내에서 쌓아온 음악적 자산들을 새롭게 다듬어 내놓으면 된다.

싸이의 인생역정과 감수성을 두고 'B급 정서'라고 하지만 사실 그가 만든 곡의 수준까지 B급은 아니다. 그는 <라잇 나우>나 <위 아더 원>같이 음절과 음절을 딱딱 끊는 특유의 바운스에 록의 공격적인 전개를 절묘하게 버무릴 줄 안다. 2006년에는 인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 메인 무대에서 올라이브 무대를 선보인 적도 있었다. 괜찮은 편곡이었고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모두 힙합과 록에 대한 높은 이해도가 바탕이 됐기에 가능한 결과물이었다. 동시에 그는 박정현이나 성시경 같은 쟁쟁한 보컬리스트들을 적재적소에 부릴 줄 아는 능력 있는 프로듀서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중요한 건 해외에서의 싸이와 국내에서의 싸이, 그 간극을 줄이는 일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트렌드가 가진 생명력은 소진될 것이고, 지금처럼 이전 히트곡을 답습하는 영악한 접근도 쉽게 먹히지 않을 날이 올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선 데뷔 당시의 코믹한 이미지를 살리는 것 외에도 다른 포석들이 필요하다. 소비가 아닌 재생산이 가능한 이미지 구축을 생각해야 한다. '돌아이'를 넘어선 '뮤지션 싸이'는 지금의 한계를 보완할 유일한 해답이다.

그게 아니라면? 그가 오랜 시간 생존성을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다. <젠틀맨>이 <강남스타일>을 배 이상 능가해 '넘사벽'의 위치에 오르면 된다. 초기 싱글앨범이 대박나 평생 좋은 시절 추억을 팔며 살아가는 팝스타가 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게는 될 수 있을까. 모를 일이다. <강남스타일>이 그랬듯, 그가 이후에 또 다른 사고를 치지 말란 보장은 없으니까.

이렇든 저렇든 새 싱글인 <젠틀맨>의 흥행이 기정사실화된 지금. 앞으로 어떤 시나리오가 전개되든 간에 '월드스타' 싸이에게는 이제 마지막 관문만이 남은 듯 보인다. 트렌드의 흐름과 관계없이 팝 시장에서 지금같이 오랜 시간 사랑받는 것. 그렇게 시대를 초월해 살아남은 소수의 승자들을 우리는 슈퍼스타라 부른다.

싸이 젠틀맨 강남스타일 슈퍼스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