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은 한 생각에서 시작된다. 그 생각이 올바를 때, 역사의 흐름은 퇴보하지 않는다. 미래를 약속하는 언어들이 출렁이는 2012년, 온 지구를 가로질러 30여 개국에 선거가 있다. 변화의 시기, 한 생각은 더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다. 힘의 논리로 억압하지 않는 생명의 순환을 이어가고자 <오마이뉴스>는 세계의 지성들을 만난다. 그들의 통찰력을 빌어 우리가 서 있는 현실을 직시하고 내면의 지혜를 깨우려 한다. 한 생명이 밝아지면 세상은 그만큼 희망을 얻기 때문이다. '깨어나자 2012' 인터뷰 시리즈는 그 노력의 하나다. [편집자말] |
선생은 책상 위에 한 권의 책을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표지에 거울이 붙어 있는 독일 책이다. 번역하면 "난 그 일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는 제목이다. 어린 소녀가 억울한 듯 거울을 독자에게 들이대며 무표정하게 서 있다. 그 속에 나온 이야기를 선생이 들려주었다. 소녀가 자기 할아버지에게 물었다고 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둔 거야?" 제목은 바로 할아버지의 변명이었다. 한국은 자살을 권하는 사회가 되었다. 그 많은 죽음이 이어진 다음에도 우리 역시 '잘 알지 못했다'고 답하고 있다. 그 우울함을 안고, 여러 나라에 행복의 조건을 컨설팅해주는 칙센트미하이 선생과 이야기 나눴다.
창의적인 환경이 창의력을 부른다
- 곧 러시아로 떠나신다면서요? 재선된 푸틴 대통령과의 만남이 있다고 하셨는데, 국가 경영에 대해 조언을 하실 건지요? "제 책 두 권이 러시아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다고 합니다. 푸틴 대통령이 만나고 싶다고 해요. 물론 구성원이 행복하도록 민주적 동기를 부여하라는 제 생각을 전할 겁니다. 충분히 이해시키기 쉽지는 않겠지만, 의미는 있을 겁니다."
- 그동안 스웨덴, 오스트리아, 일본, 핀란드, 헝가리 등 많은 나라의 지도자에게 조언해 오셨습니다. 더불어 한국에서도 큰 제안을 받으셨고요. 2년 전 밴쿠버에서 인터뷰했을 때, 선생님은 제게 서울시와 한국 정부에 대해서 물으셨습니다. "그때 한국 정부로부터 국가적인 창의력센터를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엄청난 자금 지원과 협조였어요. 하지만 맡지 않았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내가 한국어를 모른다는 거였고, 그 일에 대해 확신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베이징도 '다오 마스터'가 되달라고 초청했어요. '베이징대 다오 마스터 아카데미(Beijing De Tao Masters Academy)'에서 세계적인 석학과 예술, IT 등 각 분야의 최고를 초청하는데, 국제적인 거장들이 참여합니다. 정부에 있는 사람들이 함께 대화하며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나가는 자리죠. 창의적인 프로그램이지만,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창의력은 대부분 사람이 다 갖고 있습니다. 그런 가능성이 사회 속에서 표출되지 않는 것은 사람들이 창의력을 쓸 마음이 안 생긴다는 겁니다. 사회가 개인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죠. 공급 부족이 아니라, 수요가 부족한 겁니다."
-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생산하는 센터를 만들기에 앞서 사회 리더들의 열린 자세가 있어야겠군요. 당시 선생님의 질문에 한국 정부의 눈에 보이는 개발 위주 행정과 신자유주의에 휘둘리는 모습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서도 한국 인문학이 새로운 기운을 받을 기회였는데 괜한 말씀을 드렸나 하는 자책도 조금은 있었고요. 물론 여러 경로로 의견을 수렴하셨을 거라 여깁니다. "창의적인 환경은 창의력을 불러주는 '뮤즈'입니다. 역사를 보면, 어느 시기 한 도시에 느닷없이 창의성이 번성합니다. 그리스의 아테네, 이탈리아의 플로렌스, 프랑스의 파리 등이 그랬죠. 갑자기 수많은 창의적 기운이 과학, 예술, 철학, 인문 등에서 일어났어요.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시절도 단지 25년 사이에 플로렌스에서 불었던 기운입니다. 이는 사람들이 알약을 먹고 갑자기 창의적이 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그 이전에나 이후에나 똑같습니다. 다만 그 시기에 도시 전체가 뭔가 창조적인 결과물을 원했을 뿐이죠.
우리가 더 염두에 둬야 하는 건 '창의성을 무엇에 적용하도록 할 것인가'입니다. 활개를 펼 여건만 되면, 사람들은 너도나도 나설 거에요. 창의적인 사고가 퍼져 나가게 됩니다. 흔히들 선입견에 아시아 문화는 너무 고답적이라고 합니다. 참신한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요. 우리가 과거의 틀에 심하게 메어 있다면 창의적인 생각이 나와도 그 가치를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창의력으로 향하는 첫걸음은 세상에 옳은 답은 오직 하나라고 더는 주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 창의성이 요구되는 사회는 분명 좀 더 밝고 활기차리라 여겨집니다. 아쉽게도 요즘 한국은 우울합니다. 자살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가운데 가장 높고, 20년 전과 비교해 5배나 늘었습니다. "자살 증가에 대해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이 1880년대에 글을 썼어요. 19세기 말 당시 프랑스도 자살이 급증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일찍부터 통계를 내고 있었는데, 그래프를 뒤르켐이 분석했습니다. 자살은 경제 상황이 갑자기 좋아져서 나라가 부자가 될 때나 또는 갑자기 가난하게 될 때, 급격히 증가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도덕적 규범이 붕괴될 때, 자살을 결심한다는 이론을 발표했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전부터 믿고 의지했던 규범들이 무너질 때 휘청댄다는 겁니다. 내 생각에 한국도 이와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물건을 아끼고, 잘 건사해서 오래 쓰는 것이 미덕인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럴 경우, 물건을 잘 깨뜨리는 옆집 사람보다 잘살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을 겁니다. 자녀에게도 절약을 가르치며 존경을 받고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릇이 깨지면 오히려 새 물건을 소비함으로써 경제에 활력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더 이상 절약은 미덕이 아니라 구차해지는 겁니다."
사회적 가치가 무너질 때 삶을 포기한다
- 물질이 풍요로워지면서 상대적인 빈곤감이나 박탈감은 더 심해졌습니다. 거기에 경쟁이 심해지니까, 과거의 미덕이던 우직함이나 정직함은 무능함으로 빛을 바랬고요. 결국 도덕성을 잃은 사회가 개인의 재앙을 만들게 됐다고 봅니다. 자살율 증가와 더불어 가슴 아픈 현실은 해고 노동자들의 이어지는 죽음입니다.
"일자리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거죠. 가치 있던 존재가 하루아침에 쓸모없는 존재로 되면서 삶 자체의 의미가 사라지게 됩니다. 바로 그것이 문제예요."
- 무엇으로 이 가치의 몰락을 채워 나가야 할까요? "일본에서 쓰나미 지진에다 방사능 피폭이 있는 다음, 신문에 나갈 격려의 말을 요청해 왔습니다. 그때 그들에게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일본은 그동안 성공은 이뤘지만, 아쉽게도 많은 문화적인 가치들을 잃었다고요. 기술적인 힘이나 부유함보다 더 중요한 것인데 말이죠. 우리에게 가치를 지켜줄 수 있는 힘은 물질이 아닙니다. 경쟁하기보다 함께 있고자 하는 그 순간이 훨씬 값집니다.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의 귀한 문화를 현대 사회로 전환해야 합니다.
홀로 시간을 갖고 내면을 보며 명상하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물론 가치가 무너진 상황에서 그렇게 해 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노력이 스스로 중심을 잃지 않는 역할을 해 줍니다. 모든 사람이 부자가 되는 것은 수학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최고가 되고, 성공하는 것도 수학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최고의 자리를 마련해 줄 수는 있습니다. 남과 경쟁하는 것을 멈추고,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지 않으면 됩니다.
대신 어떻게 하면 내가 이 우주와 사회 속에서 한 부분으로 함께 할 수 있을까, 최선을 다해 기여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겁니다. 이는 우리 모두를 위하는 겁니다. 사실 우리는 그저 이 세상을 소비만 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안 남기고 다 해치울 겁니다. 산업 황무지가 됩니다. 사람이 사람을 두려워하는 세상을 바꾸는데 내가 먼저 나서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도 제가 앞서 몬테소리 교육을 예로 들었던 겁니다. 그 학교는 어려서부터 서로 돌보고 함께 책임지며 사는 법을 최우선으로 익히게 합니다."
빈부의 격차가 커지면 90% 국민이 우울해진다 - 선생님의 이론인 '몰입(Flow)'에서는 물질과 행복의 관계가 성립되는 지점이 아주 낮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연소득 1만 불까지 물질을 소유함으로써 행복감을 갖지만, 1만 불이 넘어가면 그 상승 곡선이 완만해 집니다. 또, 5만 불이나 5백만 불이나 별로 다른 점이 없다고요. 사회의 행복 역시 같다고 봅니다.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불이 넘은 지 12년 입니다. 그러면서 물질적 성장은 계속 외쳤습니다. 이제는 국가 경쟁력이 아닌 국민 개개인의 행복을 살피는 시대로 넘어 가야 할 텐데요. 이 시대가 요구하는 리더의 자격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제가 지도자들에게 바라는 것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같습니다. 나라의 웰빙이 군사적 힘, 산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 달라는 겁니다. 국가의 성장은 국민이 느끼는 감성에서 나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이 의미 있다고 여기고, 미래에 희망이 있다고 여기면 자신이 처한 사회적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합니다.
그런데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격차가 늘어난다는 것은 국민의 90%가 희망을 잃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럼, 사람들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고 자문해요. 그 감성의 원인을 살피는 정책으로 나가야 합니다. 대통령은 국민의 요구에 항상 열린 자세를 가져야 하고, 과학이 새로워질수록 그 지식에도 열려있고, 창의력을 발휘하려는 주장에도 열려있어야 합니다.
창의력은 새롭고 실용적인 것이 나올 거라는 희망적인 환경을 만들어 줍니다. 미래에 대한 신뢰를 생산시키고, 경제를 도울 수 있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세상을 좀 더 재밌고, 더 괜찮고, 인간미 있게 만든다는 겁니다. 개인이 우울하면 국가 역시 위태로워집니다. 그러니까 진정한 지도자라면 국민이 힘이 나도록 정책으로 북돋워 줘야 합니다."
인터뷰를 마칠 즈음, 선생은 미리 인쇄해 놓은 이메일을 보여줬다. 베를린에 있는 친구가이 보내왔다 한다. '플로우 데이터'라고 불리는데, 시시각각 도시의 기분을 알려주는 표정이다. 베를린 전역에 설치된 카메라가 그 장소를 지나가는 시민을 촬영한다. 프로그램은 시민의 표정을 데이터로 만들어 중앙에 전송한다. 그 시각 비디오에 담긴 시민이 모두 웃으면, 도시의 커다란 전광판은 스마일이 되고, 슬픈 얼굴이 나오면 전광판은 울상이 된다.
그러니 한 사람의 우울함을 씻지 않고, 도시는 웃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도 곳곳에 카메라를 달아보면 어떨까. 학교 앞, 공장 앞, 시장 앞, 광장 앞에. 도시가 울어버리기 전, 누군가 목숨을 버리기 전, 때늦지 않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국민의 감성을 살피는 지도자, 위태로운 시기이기에 더 간절히 그런 조절자를 바라본다.
[인터뷰이(interviewee)]
미하이 칙센트미하이(Mihaly Csikszentmihalyi, 1934년~, 헝가리) 교수는 '긍정 심리학(Positive Psychology)'을 이끌어온 세계적 석학이다. 미국 연방 교육 아카데미와 연방 여가 과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행복과 삶의 질을 높이는 정책을 조언한다.
행복과 창의력 연구 권위자이며 <몰입>으로 국내에 소개된 그의 'FLOW' 이론은 인간의 행복이 물질을 소유함으로써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자아 성취에서 나오며, 창의력 또한 타고난 것이 아닌 자발적 노력에서 만들어지는 것을 보여준다. 그의 이론은 .덴마크, 핀란드, 일본, 등 세계 교육계에서 적극 수용되고 있다. 또한 여러 국가와 기업들이 경쟁력를 높이고자 그에게 컨설팅을 요청하고 있고, 그는 구성원이 행복하도록 민주적 동기를 부여하라고 조언한다. 클레어몬트 대학 피터 드러커 경영대학원 심리학 교수이자 삶의 질 연구소 소장이다.
저서로는 <몰입(Flow)><몰입의 즐거움><몰입의 경영(Good Business)><창의성의 즐거움(Creativity)><칙센트미하이의 어른이 된다는 것은(Becoming Adult)><자아의 진화(The Evolving)><청소년(Being Adolescent)> 등이 있다.
[인터뷰어(interviewer)] 안희경 작가는 성신여자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에서 불교미술 석사 학위를 받았다. 불교방송 PD로 활동할 당시, 1998년과 2000년에 한국방송대상을 수상했다. 2002년 미국 이주후 여러 매체에 미국의 시사 문화와 명상 트랜드를 다양하게 소개해왔다. 또한, 세계의 석학 및 현대미술 거장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예술을 뒷받침하는 근원적 삶의 자세를 드러내 진한 감동을 전달하고 있다. 틱낫한 스님의 환경을 지키는 책 <우리가 머무는 세상> 등을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