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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십 수년 전만 하더라도 경상북도 봉화라 하면 오지로 여겼다. 봉화는 한반도의 허리라 할 백두대간 태백과 거기서 갈비 뼈대처럼 굽이쳐 나온 소백의 틈 양백지간 사이에 자리한 천연의 정토(淨土), 고요한 분지 속의 땅이었다.

바깥으로는 태백산과 청량산, 소백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안으로는 문수산, 구룡산, 선달산과 옥돌봉의 품에 장독의 물처럼 잔잔히 담겨있는 춘양면과 물야면, 서벽리와 오전리, 그 밖의 마을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고장… 나는 그저 무심코 아득하고 멀게만 느껴지던 봉화에 아름다운 길이 이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선 단박에 발동하는 마음을 주저할 겨를이 없었다.
봉화 외씨버선길 약수탕길 구간지도
▲ 봉화 외씨버선길 봉화 외씨버선길 약수탕길 구간지도
ⓒ 출처:외씨버선길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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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찾아오는 지독하고 매서운 추위는 이곳 향민들에게 본능적으로 햇볕을 그리워하게 하는 유전자를 배양시키도록 하는 조건이었던가 보다. 봉화를 지나는 기차역의 이름도 봄볕이 그리워 춘양역(春陽驛), 금강산에서 자라는 붉은 금강송의 씨앗이 백두대간 태백의 준령을 따라 남하하여 그 봉화의 땅에 뿌려지니 그것도 이름 하여 춘양목(春陽木)이 되었다고 한다. 그 봉화의 흙내음을 따라, 숲 속 오솔길 들풀들의 길잡이 안내를 따라 길에서 나를 찾고, 나를 비우며, 나와 관계 맺은 무수히 존재하는 것들의 귀함과 소중한 상호연관의 사랑을 체험하는 길을 나서게 되었다.

오이씨처럼 조붓하고 맵시가 있는 '외씨버선길'

외씨버선길은 경상북도와 강원도로 이어지는 4개 군(청송·영양·봉화·영월)의 마을길·산길을 연결하여 걷는 길이다. 외씨버선길은 4개 군의 연계협력사업단이 3년 계획으로 조성 중인 총길이가 약 170km나 되는 고요한 사색과 치유의 숲길이며, 보부상의 발자국이 오랜 흔적으로 새겨진 민초들의 옛길 탐방로다.

청송과 영양, 봉화와 영월로 길의 꼬리를 물고 물어 연결하니 그렇게 이어진 길의 선(線), 실루엣의 윤곽이 '오이씨처럼 볼이 조붓하고 갸름하여 맵시가 있는 버선' 모양이 된 셈이다. 게다가 경북 영양에 조지훈 시인의 생가가 있고, 그의 시 '승무'에 외씨버선이란 시어가 등장하니 더불어 그런 의미를 애향의 정서로 버무려 어여쁜 이름을 짓게 된 것이리라.

춘양목 산림체험관을 지나 숲으로 향하는 길에서 조뱅이꽃을 만났다.
▲ 길가에 핀 조뱅이꽃 춘양목 산림체험관을 지나 숲으로 향하는 길에서 조뱅이꽃을 만났다.
ⓒ 이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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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 두내 약수터를 출발하여 외씨버선길의 '조붓하고 갸름한 맵시'가 서서히 드러나는 숲길에 접어들자 비로소 그의 순진한 속살을 조금씩 엿볼 수 있었다. 숲 속에는 살아있는 모든 생물적 존재와 비생물적 존재들이 어우러져 평화롭게 살아가는 뭇 생명들의 마을이 있었다.

그 마을에는 영롱하게 지저귀는 산새들의 속삭임과 숲의 허공을 가르며 밀려오는 파도 같은 시원한 바람이 있었다. 조뱅이꽃이 분홍빛으로 웃고 있었고, 노란 씀바귀꽃이 아이처럼 수줍게 피어 있었다. 나는 그 길에 고스란히 몸을 맡기기로 했다. 마음까지도 모두 맡기기로 했다. 걸으며 나를 찾고, 내 스스로의 귀함과 고마움을 체험하고자 했다. 지금까지 나의 육신과 영혼을 아껴주고 빛나게 해주었던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게, 신비로운 우주의 생명성과 포용의 모성에 대해 "사랑합니다"라고 진심으로 말하고 싶었다.

나는 걸으며 내가 미워하고 증오했던 그 모든 존재들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자 했다. 용서를 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생각했고, 떠올리며 겸허하게 상상했다. 고요한 숲에서 온 몸으로 충만하게 체험하는 평화의 명상은 그렇게 나를 점점 가볍게 만들었다.

금강산의 금강송 씨앗이 태백의 준령을 넘어 내려와 봉화의 춘양면에서 자라고 있는 소나무 즉 춘양목이 되었다.
▲ 금강송 춘양목 금강산의 금강송 씨앗이 태백의 준령을 넘어 내려와 봉화의 춘양면에서 자라고 있는 소나무 즉 춘양목이 되었다.
ⓒ 이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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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송 중에서 반듯하고 건실한 나무를 골라 문화재청에서 직접 관리하기 위해 줄기 아랫부분에 노란 색을 칠해 놓았다.
▲ 금강송 춘양목 금강송 중에서 반듯하고 건실한 나무를 골라 문화재청에서 직접 관리하기 위해 줄기 아랫부분에 노란 색을 칠해 놓았다.
ⓒ 이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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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릉 수목원에 이어 국내에서 제2 국립수목원으로 지정되어 조성 중인 아늑한 문수산 자락의 숲에는 곧으며, 단단하고, 늘씬하여 장대한 금강송 소나무들의 군락이 펼쳐 있었다. 고고하고 멋스러운 자태는 한 눈에 보아도 귀해 보였다. 궁궐 건물이나 중요 문화재의 수리와 복원을 위해 숲에서 자라고, 자라서 아낌없이 자신을 내어주는 금강송의 운명은 장렬한 순교적 삶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인간의 역사에서 기둥이 되고, 들보가 되며, 서까래가 되는 나무의 운명… 그들의 숭고한 헌신을 왜 여태 한 번쯤 진심으로 생각하지 못했을까?

풀 향기 가득한 숲을 지나고, 뻐꾸기 울어대는 주실령 고개를 걸었다. 고개에서 바라보는 봉화의 산과 숲은 지상의 낙원이요,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나무와 숲은 따가운 빛을 쉬어갈 그늘이 되어주었고, 길가 지천에 퍼져 있는 빨간 산딸기는 지치고 힘든 자들을 먹이는 안식의 과육이었다. 산뽕나무에 조롱조롱 매달린 까맣게 익은 오디를 따먹었고, 시냇물처럼 소나무 숲을 흐르고 흐르다 이내 돌아온 언덕의 바람을 벌컥벌컥 물대신 마셨다. 눈이 환하게 뜨이는 듯 했다. 마음이 편안하게 열리는 것 같았다. 혼탁했던 내 안의 어지러운 찌꺼기가 말끔하게 배설되는 감동의 느낌이었다.

숲 길가에 지천으로 열려있는 산딸기는 지친 자들을 위한 안식의 과육이었다.
▲ 산딸기 숲 길가에 지천으로 열려있는 산딸기는 지친 자들을 위한 안식의 과육이었다.
ⓒ 이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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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갓져서 조용하고 마음껏 외로울 수 있는 길'

주실령을 넘어 백두대간 지맥의 허리춤을 걸었다. 마치 뱀이 지나간 사행(蛇行)의 흔적처럼 구불구불 이어진 임도였다. 앞서가는 이 아무도 없는 한적한 길 위에서 나는 저만치 나를 앞서있는 길을 보았다. 가만히 나를 지켜봐주는 길을 보았다. 멈추어 서서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한 무리의 나비 떼가 날아다니며 노니는 호젓한 길 위에서 나는 나도 몰래 생각에 잠겼다. 생각하지만, 생각하지 않는 무념의 휴식을 누렸다. 땀에 젖은 꼬질한 정수리에 문득 한 줄의 글이 떠올랐다.

"한갓져서 조용하고 마음껏 외로울 수 있는, 신음 소리를 내면서 마음대로 아플 수도 있고 하염없이 생각에 젖어들어도 누가 뭐라 하지 않는 곳이어서 좋다."

- 권정생 선생님의 유작<빌뱅이 언덕> 중에서

한갖져서 조용하고 마음껏 외로울 수 있는 길...
▲ 외씨버선길 임도 한갖져서 조용하고 마음껏 외로울 수 있는 길...
ⓒ 이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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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상의 천사처럼 순결하게 맑았던 선생님의 독백이 도대체 왜 그 순간 내 머리로, 내 마음으로 강렬하게 찾아들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그건 나의 본성 속에 잠재한 길에 대한 느낌, 내가 가진 길에 대한 선망…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돌이켜 보았다.

박달령에 도착해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태백에서 소백으로 백두대간을 잇는 길목이었다. 사람들이 산신각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간절한 저들의 기도와 염원의 알맹이는 대체 무엇일까? 욕심일까, 집착일까, 평화일까, 아니면 사랑일까…' 어떻든 기도하는 자들의 모습은 겸손하고 경건해 보였다.

외씨버선길 중간 도심리 마을회관 근처를 지키고 선 연초 건조장...현재는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 연초 건조장 외씨버선길 중간 도심리 마을회관 근처를 지키고 선 연초 건조장...현재는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 이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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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숲길에서 누리는 나만의 평화...

박달령에서 '오전약수탕'으로 향하는 내리막을 걸었다. 숲 속에서 보고, 마주치며, 만나는 모든 것들이 다 좋았다. 아무도 없는 숲 속 작은 옛길에서 맛보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잔잔한 평화… 온갖 산새들의 청아한 지저귐은 숲 속의 합창이 되었고, 발밑에 밟히는 부엽토는 푹신한 방석이었으며, 초록의 잎새들이 뿜어내는 자연의 향기는 그윽하고도 황홀했다. 그 아름다운 숲길에서 누리는 나만의 평화, 나만의 행복은 내 혼탁한 혈관을 정화하는 의사였고, 내 어리석은 교만과 격함, 분노를 가라앉히는 포근한 마리아님의 품이었다. 

'오전약수탕'에 도착해서 탄산이 가득한 물 한 모금을 마셨다. 철분이 많아서인지 도시의 속인에게는 혀에서 감지하는 느낌이 달달하진 않았지만, 그저 보약이려니 생각하며 기분 좋게 마셨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나는 속으로 성경의 한 구절을 억지로 떠올리며 스스로 만족하고, 스스로 대견하다 자찬하고 말았다.

숲 길을 걸으며 스스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며, 자신의 순수한 본성을 찾아가는 명상을 했다...그 길에서 꽃편지를 썼다.
▲ 나에게 쓰는 꽃편지 숲 길을 걸으며 스스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며, 자신의 순수한 본성을 찾아가는 명상을 했다...그 길에서 꽃편지를 썼다.
ⓒ 이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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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외씨버선길 걷기여행은 내 몸과 마음으로 만나고 교감했던 모든 것들의 고마움을 되새길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 나의 눈과 마음이 향하는 대로 걸음을 옮겨주었던 다리와 발, 건강한 허파와 심장은 나를 키우고 자라게 하는 에너지가 되어주었다. 길에서 체험하고 느끼며, 감동했던 그 모든 것들은 살아갈 날에 나의 삶을 이끌어 줄 든든한 의지와 유연함으로 거듭날 것이다.

조선의 화원, 신윤복의 '미인도'를 보면 한복 치마 밑으로 살짝 드러난 외씨버선의 묘한 매력을 느낄 수 있다. 마치 미인도의 외씨버선처럼 아름다운 봉화 외씨버선길로 나를 찾아 떠나는 도보여행을 당장 시작해 보시라.

덧붙이는 글 | 지난 6월 16~17일 1박2일 동안 한겨레 휴센터와 경북북부연구원이 공동으로 주최한 봉화 외씨버선길 걷기 답사여행에 다녀와서 쓴 글입니다.
- 첫날 : 춘양면 두내 약수터~주실령~임도~박달령~오전 약수탕까지 9.7km
- 둘째날 : 두내 약수터~춘양목 산림 체험관~금강송(춘양목)숲길~폭포수골~도심3리 마을회관~도심교까지 약 4.5km



태그:#외씨버선길, #봉화 외씨버선길, #춘양면, #춘양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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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시에 걷기 좋은 길을 개척하기 위한 모임으로 다음 카페 <고양올레>를 운영하는 카페지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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