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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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누리당 박근혜 전 비대위원장이 1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국회의장 및 부의장 후보자 선출을 위한 의원총회에서 의원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
ⓒ 남소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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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를 앞둔 정치권이 사상검증 논란에 휩싸였다. 통합진보당 사태에 대해 '민주적 절차'와 사상문제를 분리해서 대응하던 여권이 박근혜 전 비대위원장의 말 한마디에 일제히 사상공세로 전환한 형국이다.
지난주까지 새누리당·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 혁신비대위측의 고민지점은 같았다. 통합진보당 이석기·김재연 의원이 국회의원직을 수행하지 못하도록 할 좋은 방안이 대체 무엇이냐는 것이다.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은 '국회는 국회의원 자격을 심사할 수 있다'는 헌법규정에 입각한 조치가 가능하다는 공감대까지는 접근했다.
그 때에도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자 등은 의원 자격을 박탈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각에서 제기됐지만, 이한구 원내대표를 비롯한 새누리당 원내지도부는 이석기·김재연 의원 처리 문제가 사상검증 국면으로 번지는 데 대해 부담감을 표시해 왔다.
이 원내대표는 지난달 21일 기자와 만나 "조심스럽다. 사상 갖고 (의원자격을) 제한하려는 건 아니다. 지금 검토하는 부분은 경선 과정에서 부정, 절차적 하자가 있는 경우에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지에 관한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김기현 원내수석부대표도 25일 YTN 라디오에 출연해 민주통합당에 제안한 제명방안에 대해 "사상 검증을 하자는 의미가 아니다. (이석기·김재연) 이 분들이 비례대표 후보의 자격을 취득하는 과정에 부정과 불법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지난 2·3일 주말을 거치며 상황이 급변했다. 통합진보당 부정경선과 관련해 비판성 발언을 잘 내놓지 않았던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는 5일 "과연 대한민국 헌법을 수호하는 국회의원으로서의 자격을 갖추었나 심사하는 데까지 이를 수밖에 없다"고 공세를 폈고, 이한구 원내대표는 7일 "정치권에서는 종북주의자와 심지어는 간첩 출신들까지도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나서고 있다"고 맹비난했다.
사상문제와 경선부정을 분리해 온 새누리당 지도부가 본격적으로 사상검증 필요성을 내세우고 나선 것이다. 지난 1일 임수경 민주통합당 의원이 탈북자에게 막말과 '변절자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진 게 컸다. '변절자'로 매도된 여당 의원과 새터민들의 반발은 거셌고, '경선부정 의원 처리 문제'를 계기로 고개를 들었던 '종북 의원 뿌리뽑기' 주장이 본격적으로 기세를 펴기 시작했다.
박근혜의 '국가관' 발언 뒤 공세의 초점은 사상문제로그러나 임수경 의원의 막말 사건이 없었으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이 사건이 발생하기 하루 전 박근혜 전 비대위원장이 한 발언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지난 1일 박근혜 전 위원장은 이석기·김재연 의원 사퇴 거부 시 대응 방안에 대해 "국회라는 곳이 국가의 안위를 다루는 곳인데, 기본적인 국가관을 의심받고 있고 국민들도 불안하게 느끼는 이런 사람들이 국회의원이 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민주주의 절차 훼손'문제보다는 해당 의원들의 사상문제를 강조한 것. 그런데 새누리당의 가장 유력한 대선주자로 현재 상황에서 여야를 통틀어 가장 대권에 가까이 있다고 평가되는 박 전 위원장의 발언은 한 사람 의원의 의견으로만 간주하기 힘들다. 당 지도부가 친박근혜계 일색으로 꾸려진 상황에서 박 위원장의 이 같은 발언은 일종의 지침으로 역할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서 언급했던 황우여 대표와 이한구 원내대표의 발언 외에도 친박계 의원들이 나선 게 눈에 띈다. 친박계 정우택 새누리당 최고위원은 7일 "임수경 의원이 예전에 북한을 방문하고 전대협 사건과 관련해 어떻게 전향을 했는지, 또 만약 전향을 했다면 지금의 국가관은 어떤지를 국민들한테 명확히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박근혜 측근그룹'으로 분류되는 이들의 발언도 두드러진다. 윤상현 의원은 지난 5일 "대한민국 국회의원인지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인지 분간이 안된다. 충성 대상이 북한의 김정은인 듯한 발언을 한 사람을 그냥 두고 본다는 게 말이 되는가"라고 했고, 이정현 최고위원은 '사상공세는 매카시즘'이라고 반발하는 민주당을 향해 "정신이 나가도 단단히 나간 모양"이라고 받아쳤다. 거기다 이명박 대통령까지 이에 편승, 온 여권이 야당을 향해 사상공세를 펼치는 형국이 됐다.
임수경 막말 문제의 본질은 민주적 자질 부족...민생은 어디 갔나?임 의원이 사회 내 소수자인 새터민에게 "어디서 국회의원에게 개기냐"는 등의 막말을 한 것은 국회의원으로서 자질부족을 드러낸 것이다. 국민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국회의원이 국민에게, 그것도 사회의 소수자인 새터민을 향해 그런 태도를 보인 것은 국회의원의 필수 소양인 민주주의에 대한 기본 인식을 결여하고 있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새누리당은 이석기·김재연 의원 처리 문제에 대해 '사상이 아닌 민주적 정당성을 문제 삼는 것'이라던 당초 방침을 임수경 의원 막말 사건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박근혜 전 위원장의 국가관 발언 뒤 공세의 초점은 민주주의 절차나 자질 문제가 아니라 국가관 혹은 사상문제로 몰렸다.
박근혜 전 비대위원장은 지난 4·11 총선에서 '민생문제 해결에 온 힘을 다하겠다'고 약속했고, 대선 길에선 그동안 이 약속을 어떻게 지켜왔는지 제시하며 자신이 신뢰의 정치인임을 입증할 계획이다. 그러나 민주주의 절차보다 국가관을 중시하는 박 위원장의 한 마디로 온 정치권이 사상 공방에 휩싸이고 말았다.
'총선 날로부터 100일 안에 민생법안들을 통과시키겠다'고 약속한 박근혜 전 위원장과 새누리당에는 귀하디 귀할 하루 하루가 이렇게 덧없이 흘러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