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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향수를 자극하는 영화 <건축학개론>이 개봉한 후 우리 사회에 '90년대' 열풍이 일었다. 삐삐가 유일한 사랑의 메신저 역할을 하고, 드라마 <질투>와 <모래시계>가 감성을 자극하던 그 시절 말이다. 잠시 잊고 지내왔으나 언제라도 꺼내보면 아릿하게 저며오는 추억의 그때. 이 기사들과 함께 그때를 떠올려 보시라. 비단 설레게 했던 첫사랑 뿐 아니라 당시의 추억이 '뭉게뭉게' 피어오를테니까. [편집자말]
A가 자동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사고가 났다. 지나가던 B가 이 상황을 목격했다. B는 구급차를 불러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했다. B는 이렇게 생각했다. 'A는 살든지 죽든지 둘 중 하나다. 어차피 A가 죽을 거라면 구급차를 불러도 죽을 것이다. 반대로 A가 산다면 어차피 구급차를 부르지 않아도 살 것이다.' B는 구급차를 부르지 않았다. 다음 중 B가 빠진 오류는 무엇인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난생 처음 본 수학능력시험 '언어영역'에 위 문제가 출제됐다. 정확한 문장은 전부 기억할 수 없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위 문제를 받아들고 황당했다. 나만 그런가 싶어, 다른 애들 얼굴을 보았다.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떤 애들은 한숨을 푹푹 쉬었고, 어떤 애들은 엎드려 잠을 잤다.

내가 이 문제를 아직도 기억하는 이유는 이때 처음 접한 '오류'라는 말이 너무나 생경했기 때문이었다. 그랬다. 내게 '수능=오류'였다. 김소월 시인의 시 <진달래꽃> 중 '영변의 약산'의 '영변'은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가? 라는 식의 문제에 푹 절어 있던 나에게 어느 날 갑자기 다가온 수능시험 속 '오류'라는 단어는 그야말로 오류였다.

수능시험이 최초로 실험평가된 해는 1990년 12월이다. 1991년에 전국 일부 고등학교 2학년을 대상으로 두 차례 실험평가가 있었지만, 당시 이 시험을 봤던 학생들은 마지막 학력고사 세대였다. 한마디로 수능과 직접 관련이 없는 세대란 말이다. 수능시험의 첫번째 수험생은 당시 고2, 94학번이다. 그러니까 내가 처음으로 수능을 만난 날은 1992년 5월 27일이다.

그해 8월, 11월에 모의시험을 두 번 더 치렀다. 당시 시험은 전국 35~40만 명의 고2를 대상으로 실시했다. 1992년 5월, 대학입시를 겨우 1년 반 앞두고 말이다.

불시착 우주선처럼 갑작스럽게 다가온 '수능'  

야간자율학습을 하며 수학능력시험을 준비하고 있다(자료사진)
 야간자율학습을 하며 수학능력시험을 준비하고 있다(자료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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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무슨 시험이 이러냐?"
"그거 혹시 아이큐 테스트같은 거 아닐까?"
"너 지문 읽었니? 난 세 개 밖에 못 읽었는데 10분 남았더라."

수능모의시험이 끝난 후 고2 교실에서는 이런 대화가 오갔다. 우리들은 어이없다는 듯이 깔깔대며 웃었다. 공부잘하는 애나, 못하는 애나 함께 웃어댔다. '긴장'과 '경쟁'이라는 게 없었다. 시험이 시험같지 않았다. 그런데 더 황당한 사실은 '듣보잡'이었던 이 '수능'으로 우리는 대학시험을 치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더욱 황당한 사실은 시험결과가 발표된 후에 발생했다. 반에서 1,2등을 다투던 애가  15~20등이라는 '경이로운' 성적을 기록했다. 반에서 40등 언저리에 있던 '좀 노는 애'가 5등을 했다. 그냥 '혼돈' 그 자체였다. 선생님들도 갈피를 못잡았다.

수능이 교실 분위기도 바꿔놓았다. 친구에 대한 인식도 바뀌었다. 한 번의 수능으로 5등을 했던 '좀 노는 애'는 알고보니 책도 많이 읽고, 머리도 좋고, 평소 상식이 많아서 시험을 잘 치렀다는 평을 듣기 시작했다. 졸지에 반 15등으로 추락한 '왕년 1등짜리'는 책도 안 읽고, 신문도 안 보고, 오로지 교과서만 달달 외워서 그 덕에 공부잘했던 것에 불과했던 것이라며 '신비함'을 벗기도 했다.

어쨌든 그후로 모든 수업이 수학능력시험에 맞춰서 진행됐다. 선생님들은 교과서 외에도 신문의 사설이나 기사를 많이 읽을 것을 권했고, 시사분야나 일반상식을 넓히기 위해 뉴스를 관심있게 보라고 했다.

하지만 10여 년 동안 교과서 위주의 반복 암기학습에 맞춰진 공부습관을 바꾸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수능과 엎치락뒤치락하다 마침내 고3 수험생이 됐을 때는, 수학능력시험의 문제출제방식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1년에 대입시험 2번 봤다... 좋았겠다고?

수능을 본 후 가채점을 하고 있다(자료사진).
▲ 가채점 수능을 본 후 가채점을 하고 있다(자료사진).
ⓒ 소광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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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학번, 수능 1세대인 우리는 지금껏 유일하게 1년에 대입을 두 번 치렀다. 수능이라는 낯선 시험제도를 도입한다는 점을 감안해 여름과 겨울, 두 번 시험을 보게 한 것이다. 남들은 대입시험 두 번 치렀다고 하면 '와~ 좋았겠다'고 한다. 하지만 그건 지금 생각해도 결코 좋지 못한 제도였다.

당시 우린 여름과 겨울 두 번 치른 시험 중 높게 받은 점수로 대학에 지원할 수 있었다. 난 여름에 치른 성적으로 대학에 지원했는데 나뿐 아니라 주변 친구들도 대부분 여름 성적으로 지원한 것으로 기억한다. 시험을 두 번 치르다 보니 여름 이후에는 긴장감이 떨어진 게 이유였던 것 같다.

수능시험을 치르고 대입원서를 써야 할 때가 왔다. 하지만 수능시험에 아무런 정보가 없기는 '커트라인' 역시 마찬가지. 학력고사 커트라인 자료는 많지만 당시 200점 만점 수능점수 중 140점을 맞으면 어느 대학에 합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정보는 '제로' 였다.

그야말로 소신지원 내지는 '감'을 믿을 뿐이었다. 처음으로 복수지원이 가능했기 때문에 눈치작전도 극심했다. 당시는 휴대폰도 삐삐도 없던 터라 어떤 애들은 무전기를 들고 원서 접수현황을 생중계하기도 했다.

비교적 낮은 점수대의 학과에 대한 경쟁이 치열해졌다. 조금 센 과에서는 미달상태가 발생하는 기현상이 발생했다. 친구 중에 '교대'를 목표로 열심히 공부했던 친구 둘이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교대'는 여학생들에게 인기도 많고, 커트라인이 높은 편이다. 당시 110점 대를 받은 이 친구 둘은 일찌감치 교대를 포기하고 전혀 마음에도 없던 독문과와 고고인류학과를 지원했다. 둘 생각으로는 교대에 합격하려면 최소 140점은 받아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들도 뭐라고 딱히 충고를 해주지 못했다.

그런데 접수 마지막 날, 마감시간 몇 시간을 앞두고 교대 교무처로부터 고등학교로 전화가 왔다고 한다. 현재 미달상태니, 학생들의 원서 접수를 독려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갈 곳이 없어 방황하고  있던 90점 맞은 친구가 혹시나하고 지원했다. 그리고 합격했다. 교대를 가고 싶었던 두 친구는 울었다.

아! 초등학교만 1년 늦게 입학했더라도...

나중에 따지고 보니 당시 내 점수로도 서울 유명 대학교를 갈 수 있었더랬다. 내 성적이 우수해서가 아니라, 그 과가 정원 미달이었기 때문에. 그냥 헛웃음만 나왔다. 그때 그 대학을 갔더라면 어땠을까? 내 인생이 지금과 많이 달라졌을까.

모든 학생이 제 성적대로 대학을 가는 건 아니다. 어느 정도 운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94학번처럼 '혼돈' 그 자체인 학번은 없을 것이다. 수능시험이 누군가에게는 좋은 기회였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저 정말 '아이큐 테스트같은 미스터리'한 시험이었으니 말이다.

대학에 입학한 뒤에도 우리는 여전히 '수능' 개척자들이었다. '수능'을 알 리 없는 '학력고사' 선배들을 상대로 '수능' 알리기에 애썼다. 학력고사 선배들은 니들이 몰라서 그렇지 학력고사야말로 정말 '학력'을 보여주는 바로미터라고 주장했고, 우리는 학력고사 선배들이 알지 못하는 '심오하고 진지한 미지의 수능세계'에 대해 설명했다.

하지만 지금도 이해가 안 되는 게 있다. 맨 위에서 말했던 그 B의 오류다. 답은 '흑백논리의 오류'였다. 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적었다가 틀렸다.

가끔 남편과 이 문제를 얘길하면 처음엔 진지한 토론으로 시작하다가 나중에는 거의 말싸움으로 번진다. 남편은 학력고사 세대다. 급기야는 학력고사 세대와 수능세대의 장단점까지 도마 위에 오른다. 여전히 내 수능시험은 끝나지 않을 것 같다.


태그:#대입수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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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엡스키(1821-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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