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쯤 되었을까. 아내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군산 시내에 나갔다가 지금은 색 바랜 흑백사진으로나 남아 있을 추억의 장면을 발견했다.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날씨에 구 군산역 광장 한쪽에서 이발하는 모습을 목격했던 것. 차에서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노인이 거리에서 하얀 천을 둘러쓰고 이발하는 모습은 오래전 어딘가에 놔두고 잊고 있던 그 모습이어서 반가웠다. 고향동네에 이발사 아저씨가 들어오면 양지바른 판자 울타리 아래 나무의자와 거울을 놓고 머리를 깎던 코흘리개 시절이 떠올랐다.
얼어붙은 몸과 마음을 훈훈하게 녹여준 '거리의 이발사'는 군산시 문화동에 사는 양청무(71) 어른. 부근 무료급식소와 광장으로 놀러 나오는 어려운 노인들 머리를 16년째 무료로 다듬어주고 있다고 해서 더욱 놀랐다.
듣고 싶은 얘기가 많았지만, 오랫동안 머물 수가 없었다. 일하는 어른을 붙잡고 이런저런 질문을 할 수도 없거니와 아내가 길가에 차를 대놓고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며칠 후 꼭 연락드리겠다며 집 전화번호를 수첩에 메모하고 헤어졌다.
2년 전 상가(喪家)에 갔다가 이발소를 운영하는 초등학교 동창을 만난 후로 마을 이발소와 번갈아 다니고 있는데, 12월에는 한 번 거르더라도 양청무 어른에게 이발할 생각이었다. 날도 춥고 조금 불편하겠지만, 의미 있는 경험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몇 차례 전화를 했지만, 만나지 못했다. 병원에도 가야 하고, 연말이어서 바쁘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그런가 보다 했는데 나를 피하는 것 같았다. 해서 엊그제(12월 27일)는 작심하고 "어른에게 이발하려고 지금까지 기다렸는데요!"라고 하니까 미안했는지 "예예 알겠습니다, 내일 오전 11시까지 나갈게요"라고 했다.
추울 때 몸을 녹여주는 모닥불 같은 '사랑의 이발사'
지난 12월 28일 오전 10시, 약속시각에 늦지 않으려고 일찍 집을 나섰다. 버스에서 내려 구 군산역 광장을 향해 걷는데 차가운 바람이 목을 움츠리게 했다. 부지런한 양청무 어른은 언제 나왔는지 철망 울타리에 바람막이 비닐을 설치하고 한 노인의 머리를 다듬고 있었다.
그동안 양청무 어른이 머리를 깎아준 노인만 해도 2만 명이 넘는다고. 그가 불우노인들 이발 봉사를 마음먹은 계기는 사업에 실패하고 실업자 생활을 하면서 갈 곳 없는 노인들 심정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란다.
육중한 체구의 양청무 어른은 자세를 이리저리 바꿔가면서 가위질을 했다. 차례를 기다리는 노인들과 담소도 나누었다. 양손에 가위와 빗을 들고 한쪽 눈을 감았다가 뜨기를 반복하면서 머리를 다듬는 모습이 일류 헤어디자이너를 연상케 했다.
양청무 어른이 이발하는 오전 내내 주변은 노인들로 북적였다. 모닥불을 중심으로 둘러선 노인들 대화에 오르내리는 인물은 2012년 총선에 출마할 군산지역 민주당 공천 예상후보들. 이명박, 박근혜에 대한 이야기도 오갔다. 동네 사랑방이 따로 없었다.
머리를 다듬은 어른들은 대부분 쌈짓돈을 꺼내 성금함에 넣었다. 1000원~2000원씩 모은 돈은 불우이웃돕기에 쓰인단다. 성금을 넣은 노인들도 보람을 느낀다고. 양청무 어른은 주위를 따뜻하게 해주면서 타오르는 모닥불 같은 '사랑의 이발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황남호(72) 할아버지는 "고맙다고 이발삯을 주믄 고개를 흔들믄서 받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받을 때는 그 돈에다 되레 사비를 더 보태서 이웃돕기 성금으로 낸다"며 "양씨는 요즘같이 각박한 세상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훌륭한 양반"이라고 말했다.
12년째 이발하러 다닌다는 오대권(75) 할아버지는 "양씨가 머리를 깎아주면 기분이 젊어지는 것 같고, 마음도 그렇게 편할 수 없다"며 "공짜여서가 아니라 이제는 양씨가 머리를 잘라줄 때면 세상의 시름이 다 수그러든다"고 흡족해했다.
화물역으로 사용하던 군산역 건물이 사라진 것을 아쉬워하는 노인도 있었다. 기차가 다닐 때는 광장에 사람으로 넘쳐나서 풍성했고 이발하려고 기다리는 사람도 많았는데, 1년 전 건물이 헐린 뒤로 썰렁해졌고, 오가는 사람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는 것.
"건강이 허락하는 한 어려운 노인들 머리 다듬어 드리고 싶어"양청무 어른은 태어난 고향과 살아온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1941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난 어른은 16세 때 이발 기술을 배웠다. 손님 머리를 감겨주는 몇 년은 밥만 얻어먹으며 다녔고, 스물한 살 되는 해부터 기술자 대우를 받았다. 급료는 한 달에 1000원.
"어렸을 때는 이발소 창문으로 풍기는 비누냄새가 어찌나 고소하고 달콤하게 느껴지던지. 그래서 먹고 살기 위해 이발소에 들어갔죠. 밥만 먹고 다니다가 한 달에 1000원씩 받으니까 나도 이제 직장인이 됐다는 생각이 들면서 세상이 모두 내 것 같더라니까. 매일 짜장면을 사 먹어도 돈이 남았으니까요···."양청무 어른은 부안 곰소에 이발소를 개업했으나 1970년대 장발이 유행하면서 문을 닫았다. 조금 있는 돈으로 바지락 양식에 투자했다가 쫄딱 망했다. 그래도 실망하지 않고 노력해서 1987년에는 지금 사는 단독주택을 장만해서 군산으로 이사했다. 집 부근에 이발소를 개업하려다 생각을 달리하고 공단에 있는 기업체에 취직, 이용업과 인연을 끊었다.
취직은 했지만, 어렸을 때 고생하면서 배운 기술을 그대로 묵힐 수는 없었다. 고민을 거듭하다 어려운 노인들을 위해 봉사해야겠다고 결심하고 1996년부터 역전 광장에서 이용 봉사를 시작했다. 조금씩 모이는 돈은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냈으나 무허가 영업으로 오해를 받기도.
"이발 기술을 좋은 곳에 쓰려고 시작한 일이 어르신들에게 작으나마 보람과 기쁨을 안겨주게 되어 뿌듯해요. 처음엔 무료로 해 드렸는데 시내 이발소 주인들이 돈을 받는 줄 알고 무허가 영업으로 신고해서 조사를 받기도 했어요.(웃음) 그 후로는 성금을 낼 때마다 영수증을 받습니다." 이제는 아들, 딸 출가시켜 손자 손녀를 넷이나 보았고, 넉넉하진 않지만, 사랑하는 아내와 둘이 오순도순 살아간다는 양청무 어른. 그는 지금도 다니던 회사에 자리가 비면 생산직으로 일하면서 짬짬이 직원들 머리도 다듬어 주고 있다.
양청무 어른은 "나에게 머리를 깎고 좋아하시는 노인들을 보면 피곤했던 몸이 금방 풀린다"라면서 "건강이 허락하는 한 어려운 노인들 머리를 다듬어 드리고, 먹을 식량도 지원해드릴 것"이라고 말했다.
12시가 되어도 머리를 다듬으려는 손님은 끊이지 않았다. 바쁘면 먼저 하시라고 양보하는 모습도 보기 좋았다. 오후 2시는 돼야 내 차례가 올 것 같았다. 해서 성금함에 2000원을 넣고 "다음 한가할 때 또 찾아뵙겠습니다"라고 인사하고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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