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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등학교 시절, 2학년 3학년을 같은 교사가 담임을 맡았는데, 난 그를 매우 싫어했다. 그것은 그의 말 때문이다. 학교에 적응하기도 공부에 흥미도 없었던 나는 '자율학습'이라는 이름의 '타율학습'에 반발하여 "학교에서는 공부가 안 되니 집에서 공부하겠다, 집에 보내달라"고 담임에게 말하였다. 그러자 담임은 말하였다.

"너희들보고 공부하라고 남아있게 하는 게 아니다. 공부 잘하는 애들 공부할 수 있게 입닥치고 그냥 그 자리에 조용히 앉아있어라. 집에는 못 보내준다."

그 교사는 우리에게 돼지가 되길 강요했다. 공부 잘하는 학생들의 들러리로 그냥 그렇게 살기를 강요했다.

<돼지의 왕>은 여러모로 내 학창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놀고 먹어도 잘 먹고 잘 사는 그놈들은 애완견 같은 놈들이야. 개 같은 놈들이라고. 그놈들 먹이가 되는 우리는 돼지들이고. 우리는 죽어서 팔다리가 찢겨나가야 가치가 생긴단 말이야. 돼지가 그 정도 가치밖에 없는 동물이냐. 경민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응?"

돼지의 왕은 한국사회가 얼마나 폭력으로 점철된 사회인지 말해준다
▲ <돼지의 왕> 포스터 돼지의 왕은 한국사회가 얼마나 폭력으로 점철된 사회인지 말해준다
ⓒ 돼지의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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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가 될 것인가? 돼지가 될 것인가? 이 사회는 우리에게 두 가지 선택만을 강요한다. 돼지와 개만이 존재하는 한국사회. <돼지의 왕>은 매우 잔혹한 우화이다.

성매매업소를 운영하던 아버지의 사업마저 접게 하고 야심차게 시작한 IT회사. 하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부도가 나고 집안엔 온통 빨간 딱지뿐이다. 부도 직후 부부싸움 중 우발적으로 아내를 살해한 황경민은 어린시절 친구인 종석을 찾아간다.

종석은 소설을 쓰고 싶지만 자서전 대필작가로 살고 있다. 출판사에서는 종석의 글을 조롱하고 천시한다. 종석은 자신을 뒷바라지 해주는 여자친구에게 손찌검을 하고 분풀이를 한다. 자괴감에 빠져있는 종석은 갑자기 연락한 경민과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중학교 1학년 1학기에 있었던 이야기를 나눈다.

입안으로 들어가는 안주는 돼지고기. 입안에 털어넣는 술은 쓰디쓴 소주. 입밖으로 나오는 또 다른 안주는 괴롭고 폭력적인 중학교 시절의 기억. 종석과 경민은 자신들이 개들에게 위협받고 물어뜯기는 돼지였음을 추억한다. 그리고 그 돼지들을 지켜주며 '악'이 될 것을 다짐한 '돼지의 왕' 철이를 떠올린다.

경민과 종석이 추억하는 학교는 철저한 계급사회였다. 경민과 종석의 반은 강민패거리가 지배하고 강민 패거리 위에는 '관리자'라 불리는 옆반 송석응이 존재하고 송석응은 선배들이 뒤를 봐주고 있다. 이들은 폭력과 공포로 학교를 지배하는데 이들의 폭력은 일반 불량학생들의 폭력과 다르다.

강민 패거리, 송석응, 그리고 학생회장으로 나온 선배들은 모두가 힘세고 공부잘하고 집이 부자이다. 심지어 교사들로부터 인정받고 있는 학교의 대표얼굴들이다. 이들은 시도 때도 없이 폭력을 휘두르지만 학교에 의해 처벌 받는 건 이들의 폭력에 반항하고 저항하는 아이들 뿐이다.

이런 상황에 철이가 나선다. 잃을 것도, 지켜야 할 것도 없는 철이는 경민과 종석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강민 패거리에 맞서고 경민과 종석은 그런 철이를 영웅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종석의 기대대로 "뭔가를 바꿀수 있고 그래서 앞으로 3년 동안 지금까지 살았던 것과 다르게 살 수 있을 것"을 기대하게 했던 철이는 '영웅' 대신 '괴물'이 되고 싶어한다. '악인'이 될 것을 강요하는 철이에게 경민과 종석은 강민패거리와는 다른 또 다른 공포와 두려움을 느낀다.

폭력을 휘두르는 이들은 개, 일방저인 폭력을 당하는 이들은 돼지. '돼지의 왕'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폭력을 개와 똑같이 폭력을 휘둘러야 한다고 강변한다. '악인'이 되기 위한 잔혹한 의식을 치룬 '돼지의 왕'은 돼지들의 명분을 위한 잔혹한 의식의 희생양이 된다. 하지만 잔혹한 의식 후에도 변하는 것은 없다.

그들은 무엇을 위해서 '의식'을 치룬 것일까? 성인이 된 종석과 경민은 자신의 사는 세상이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음에 절규한다. 그렇기에 <돼지의 왕>은 마지막 대사처럼 우리의 세상은 "이곳은 얼음처럼 차가운 아스팔트와 그보다 더 차가운 육신이 뒹구는… 세상"이다.

과거 자신 또한 폭력의 가해자였음을 고백하는 연상호 감독은 폭력을 강요하는 시스템에 대한 관심을 통해 <지옥-두개의 삶>과 <사랑은 단백질>을 만든 바 있다. 단편 애니메이션 <사랑은 단백질>의 장편 확장판이 바로 <돼지의 왕>인데 그간 아동물로만 인식되었던 애니메이션으로 잔혹학원물을 만들어 관심을 모았고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44초만에 매진되는 기염을 통하기도 한 작품이다. 노무현 정권 시절인 2006년 기획하여 2011년에 완성된 이 작품은 한국사회가 변하지 않은 폭력사회임을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캐릭터 원하는 만화가 최규석이 맡고 있는데 날선 그림체가 잔혹한 이야기와 맞물려 더욱 강렬하게 다가오는 작품이다. 특히 죽은 경민의 아내를 비추는 첫장면과 종석의 독백으로 끝나는 끝장면의 강렬함은 마치 심장을 파고드는 창끝과도 같다.

덧붙이는 글 | http://booyaso.blog.me/50126051748 에도 게시되어 있습니다.



태그:#돼지의왕, #연상호, #한국사회, #폭력, #애니메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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