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개봉한 <돼지의 왕> 포스터

지난 3일 개봉한 <돼지의 왕> 포스터 ⓒ KT&G 상상마당


일반적으로 '애니메이션 영화'라고 할 때 떠올려지는 것은 현실을 초월할 수 있는 이상적인 이야기가 판타지와 결합한다는 것이다. 사실적 이야기라 하더라도 실사 영화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기에 상상력 넘치는 장면이나 특색 있는 화면을 기대하기도 한다. 이런 기대치는 모두가 어릴 적 최고의 만화영화였던 <로보트 태권V>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런데 <돼지의 왕>은 이런 기대와는 거리가 있는 새로운 애니메이션이다. 너무 사실적이라는 게 이 영화의 도드라지는 부분인데, 이야기의 강도가 세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불편함을 전하기도 한다. 애니메이션으로 재현한 리얼리즘은 실사 영화보다 더 생생하게 다가오며 충격을 안겨준다. 상황에 대한 세밀한 묘사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고, 내내 영화에 몰입시킨다.

영화가 끝나면서 그 긴장이 풀리는 순간, 못내 찜찜함이 생기는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기존 애니메이션과 다르다는 것은 사실 핑계일 뿐이고, 그보다는 잊고 있던 오래전의 기억을 하나둘 끄집어내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지금의 현재를 비춰주는 거울과도 같은 작품은 우리 사회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면서 영화의 잔영을 길게 드리운다. 

과거를 비추는 영화가 되살려내는 망각의 기억

 <돼지의 왕>의 한 장면. 힘있는 아이들에게 짓밟히고 있는 어린 정종석

<돼지의 왕>의 한 장면. 힘있는 아이들에게 짓밟히고 있는 어린 정종석 ⓒ KT&G 상상마당


애니메이션이라지만 감독은 <돼지의 왕>을 꽤 거친 영화로 만들었다. 그래서 보는 내내 마음 한쪽에 무거움이 생긴다. 이야기 전개도 그렇고 등장인물의 모습이나 대사 등이 기존 부드러운 애니메이션과는 다른 느낌이다. 러브신이 나오는 영화도 아니건만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이 매겨져 19금 영화가 된 것은 '애니메이션 잔혹 스릴러'라 이름 붙인 장르가 충분히 설명해 준다. 그만큼 잔혹하다.

그러나 특이한 것은 결코 편하지 않은 무거움이 영화의 힘이라는 점이다. 편안하고 느긋한 마음으로 즐길 수 있는 '만화' 영화는 아니지만, 이야기의 강렬함과 무거움은 만화보다는 '영화'에 방점을 찍게 한다. 중학교를 빗댔지만 단순히 학교 안 일만이 아니라 지금 사회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로서 작용하는 것도 영화에 담긴 의미다.

<돼지의 왕>은 무리 중 어느 곳에 섞여 있을 중학교 시절 개개인의 모습을 떠올리게도 한다. 감독 자신의 경험이 담겨 있다고 했듯 그저 영화 속 각색된 이야기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많은 사람이 경험했을 수 있는,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을 수 있는 현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 <돼지의 왕>이다.

힘의 횡포 앞에 경민이와 종석이가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도 무관심하게 굴종하던 아이들 중 하나가 나였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권력과 같은 무리들에 잠시 대들어 보다가 결국 한계를 느끼고 은근슬쩍 발을 빼는 찬영이에게 나 자신을 대입해 보기도 했다. 그렇다고 힘을 과시하는 패거리들을 힘으로 제압하는 철이의 모습은 아니었기에, 조심스레 그 당시 내가 처했던 위치를 찾아보게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확인하게 되는 것은 나 역시 돼지의 무리들 중 하나였다는 것이고,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못내 불편하기만 했다. 착잡함 속에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했는데, 과거의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이 되살려내는 망각의 기억은, 대 놓고 내색할 수 없었지만 결코 편하지가 않았다.

힘 있는 개들과 힘없는 돼지의 무리들이 존재하는 세상

 <돼지의 왕>의 한 장면. 경민은 부부싸움 중 홧김에 아내에게 칼부림을 하고 만다

<돼지의 왕>의 한 장면. 경민은 부부싸움 중 홧김에 아내에게 칼부림을 하고 만다 ⓒ KT&G 상상마당


<돼지의 왕>은 회사 부도 후 홧김에 아내까지 살해한 황경민이 중학교 시절 친구 정종석을 찾아와 나누는 15년 전 학창 시절에 대한 회상이다. 소설가가 되지 못한 채 남의 자서전 대필 작가로 근근이 먹고사는 종석은 갑자기 연락해 온 경민은 뜻밖이지만,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자리에서 옛 추억을 꺼내 놓는다.

15년 전 그들의 학교생활은 몸집이나 성적, 부를 바탕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힘 있는 개들의 무리와 그저 평범하기만 한 힘없는 돼지의 무리가 존재하는 세상이었다. 학교에서 힘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패거리들은 힘없는 경민과 종석을 괴롭히지만, 경민과 종석은 마땅히 저항하지 못한 채 당할 뿐이다. 다른 친구들은 마치 돼지의 무리처럼 그 체제에 굴종하면서 방관하는 자세를 취한다.

그런 구조에 맞서는 김철은 다른 존재였다. 경민과 종석에게 구세주 같은 역할을 하며 희망이 돼 준다. 힘의 질서에 반기를 드는 철이는 교실을 장악하고 있는 권력의 질서와 번번이 부딪히며 새로운 질서가 될 것 같은 기대를 주기도 한다. 그러나 선후배 관계와 힘 있는 아이들끼리 공고하게 다져진 교실의 구조는 간단히 바꿀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가 않다. 저항하고 맞서던 철이에게 돌아오는 것은 퇴학일 뿐이었다.

분한 마음에 복수를 다짐하게 되지만 이후 전개되는 과정과 현실은 녹록지가 않다. 철이의 결심은 끔찍한 비극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15년이 지나서 경민과 종석의 만남에서 드러나는 그날의 진실은 충격적이기만 하다.

종석과 경민을 통해 드러내는 우리 사회 계급구조 단면

 <돼지의 왕>의 한 장면. 철이는 권력을 가진 패거리에 힘으로 맞서지만 퇴학 당한다

<돼지의 왕>의 한 장면. 철이는 권력을 가진 패거리에 힘으로 맞서지만 퇴학 당한다 ⓒ KT&G 상상마당


<돼지의 왕>이 낯설지가 않은 것은 학창 시절의 기억을 살려내면서 지금의 사회현실을 투영해 놨기 때문이다. 힘없거나 가난한 아이들이 힘과 성적, 부를 바탕으로 하는 아이들에게 조롱받고 놀림 받는 모습은 우리 사회 계급구조 속의 한 단면을 보여 준다.

생각해보면 학창 시절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덩치 큰 아이들이 약한 아이들을 일삼아 괴롭히는 것과 유명 메이커의 청바지를 입고 왔다가 굴욕을 당하는 종석이의 모습이 특히 그렇다.

간혹 철이의 저항이 카타르시스를 주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 그 역시도 돼지의 일원으로 '돼지의 왕'일 뿐이다. 벗어날 수 있는 출구가 없이 꽉 막힌 철이의 삶이 공고한 지배 질서의 벽을 넘어서기는 쉬워 보이지 않는다.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 자체가 철이의 처절한 몸부림에서 비롯된다.

영화는 지배와 피지배의 계급구조 현실을 15년 전 중학교 교실을 통해 또렷하게 보여준다. 그렇다고 지나간 기억 속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현재를 사는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업이 망하고 부부싸움 끝에 아내에게 칼부림을 한 경민이나 힘겹게 대필 작가로 사는 종석이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 구조의 틀에서 머무르고 있음을 확인하기란 어렵지 않다.

종석과 경민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소시민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 속에서 지금 나와 우리 주변의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섬뜩함 마저 생긴다. 지금도 나는 돼지의 일원일까 하는 의문도 갖게 한다. 그것이 <돼지의 왕>이 주는 무게감이다.

"한국 애니메이션의 취약점인 작가로서의 감독 부재 해소"

 <돼지의 왕>의 한 장면. 경민과 종석은 힘없는 돼지의 일원일 뿐이다.

<돼지의 왕>의 한 장면. 경민과 종석은 힘없는 돼지의 일원일 뿐이다. ⓒ KT&G 상상마당


<돼지의 왕>은 내용뿐만 아니라 작품적 완성도가 높고 한국 애니메이션을 한 단계 발전시켰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애니메이션으로는 최초로 3관왕을 차지하며 작품성을 입증받은 것은 그 상징성이 크다. 그동안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작가주의적 애니메이션'이 등장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부산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베를린영화제 프로그래머 미야케 호네는 자신의 심사 대상 작품이 아님에도 가장 인상 깊게 본 영화로 '특별 언급'했을 만큼 해외 영화인들에게도 강렬한 시선을 안긴 영화였다.

부산영화제 김지석 프로그래머는 "<돼지의 왕>은 내년쯤이면 전 세계에서 '올해 가장 중요한 애니메이션'으로 언급될 것"이라며 "한국 애니메이션의 취약점이었던 '작가로서 감독의 부재'가 해소되는 듯하다"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 연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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