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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소설 <도가니> 표지
 원작소설 <도가니> 표지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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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사용되지도 않던 말인 '도가니'가 보통명사가 되어 버린 지 오래다. <도가니> 속 실제 사건은 이미 2006년에 광주고등법원에서 솜방망이 처벌을 받으며 끝났지만, 공지영은 2009년 소설 <도가니>를 출간, 그리고 그 작품이 영화화되어 지금에서야 사람들은 사건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 가해자의 제대로 된 처벌 없이 그냥 묻혀버릴 수도 있었던 사건이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재수사 되는 과정은 글의 힘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지만, 그 전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사회가 씁쓸하게 느껴지는 내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소설 <도가니> 속 사건의 무대는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에서 따온 듯 무진시의 자애학원이다. 자애로워야 할 곳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건.

소설의 초반부, 한 소년이 기차가 달리는 선로에 서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장면을 영화에서는 열차에 치여 죽어 가는 고라니 한 마리로 표현한다. 사람들의 욕망으로 죽은 어린 짐승은 어른들의 잘못된 욕망으로 죽어버린 청소년기를 평생 안고 살아야 하는 인화학교 아이들의 모습과 꼭 닮아있다.

두 달 사이에 두 명의 학생이 죽어도 단지 안개의 탓으로 돌리면 그만이었다. 열차에 치여 죽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들짐승 같은 삶들을 강인호도 처음엔 다른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보지도 않고 듣지도 않은 척 하고 살아가고자 노력한다.

'솔직히 말해. 너는 서유진에게 말했듯 세상에 좋은 일을 하기 위해서 여기 온 게 아니야. 너는 월급을 받기 위해 왔을 뿐이야. 물론, 월급 받으면서 좋은 일 한다는 건 좋은 일이지. 오케이! 하지만 거기까지라구. 서른 네 해를 살고도, 그렇게 수없이 패배하고도 아직 그걸 모른다면 너 역시 지적장애 3급 판정을 받을 거야. 그러면 동사무소에서 기본연금은 나오려나. 농담이야. 그러니 이제 적당히 모른 척하며 여길 빠져나가. 그만하면 넌 너의 할 바를 다했어. 대답하지 않은 건 아이들이라구. 어차피 넌 어제 여기 도착했고 아무것도 몰라. 추리영화 찍냐? 인마!'(54p)

그러나 지적장애 3급이자 청각장애인인 중복장애아 유리를 따라간 그 순간부터 그는 사건의 중심에 있었다. 린치 당하는 연두를 보고도 말리지 않는 지도교사 뿐 만이 아니었다. 아직 중학생밖에 되지 않은 연두를 성폭행하려다 실패한 교장, 유리가 초등학생 때부터 지속적으로 돌아가며 성폭행한 학교 선생들, 형제까지 성폭행 하고 죽음으로 내 몬 남자 선생  외에도 너무 많은 것들이 있는 정부가 지원해주는 특수학교는 서유진의 말대로 정말 광란의 도가니였다.

그렇다면 도가니는 그냥 생겨난 걸까.

그런데 말이야, 여기서 한 가지 더 주목할 점은 전 자애학원 터가 지금의 무진경찰서 터라는 거야. 말하자면 국가에 이 땅을 팔고 간 건데…… 경찰과 자애학원의 유착관계는 밝혀진 것은 없어. 다만 독재시절 시위대를 잡아오면 무진경찰서가 꽉 차고 그러면 가끔 자애학원 기숙사 한 층을 고스란히 경찰에 빌려주기도 했다는 거야. 거기에는 시위대를 불법감금하고 고문해도 들을 사람이 없으니까. 이 정도면 경찰이 왜 수사를 미루고 미적거리는지 좀 냄새가 나지 않아?(78p)

소설에서는 친절하게 설명해주지만, 영화에서는 "아이들이 그런 일을 당했는데 도대체 이게 누구 소관이란 말이에요?"라는 고밀도의 말 한마디로 응축한다. 결국, 모두가 쉬쉬하는 그 사건을 서유진은 자신이 일하는 인권운동센터를 통해 해결하고자 한다. 아이들의 인터뷰는 너무 끔찍해 읽는 동안 저도 모르게 한숨과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얽히고 설킨 관계를 넘어 방송을 통해 아이들은 법정에 서게 된다. 법정에 선 뒤로부터는 아이들과 선생들의 대결이 아니라, 부패한 권력과 아직 싱그러움을 지니고 있는 민중들의 치열한 전투였다.

세상은 동화처럼 그렇게 녹록지 않은 것이다.(153p) 들을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통역사도 없이 시작된 재판이었다. 쌍둥이를 구별하고 청각장애아가 노래를 듣고 반응해도, 아무리 진실들이 아멘, 아멘이라고 진심을 다해도 차가운 철문이 빗물을 가볍게 튕겨내듯 세상은 그들을 밀어냈다. 설상가상으로 강인호의 아주 가벼운 죄질, 정확히 따지자면 죄질이라고 할 수도 없는 과거의 흔적들이 더욱 부추겼다. 피해 학생들의 어른들이 합의서를 내는 방식으로 사건은 그렇게 사라져 갔고, 남자 선생 한 명만 실형을 받았다.

일종의 약점을 지닌 사람들이 윗사람이 주는 단물을 빨아먹으며 자신보다 더 약한 자들을 짓밟은 그 사건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믿고 싶었던 사람들도 참 많았다. 그러나 우리 주변엔 이전의 죄질보다 달걀과 밀가루를 뒤집어 쓴 젊은 여교사를 더 주요하게 다룬 신문이, 상처 받은 아이들이 생활하는 천막보다 기념식이 더 중요해 철거용역반을 부른 정부가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아이들이 좋은 후원자들과 헌신적인 사람들 덕분에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난 내 어깨는 너무 무거웠다. 그러나 지금 세상은 '나는 이 사건을 세상에 알리기로 결심했다'라는 영화포스터의 문구가 실현되고 있다. 처음 영화로 보았을 때에는 단순한 노기와 두려움의 감정만이 남았으나, 사건이 올바른 방향으로 진행되어 가는 과정을 보고 들으면서 원작 소설을 읽으니 조금 다른 감정이 생겨났다. 그것은 일종의 세상에 대한 사랑이었다. 사랑은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 외에도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흘려야 할 때 흘리는 눈물, 분노해야 할 때 실행에 옮기는 용기, 세상을 바꾸려는 게 아니라 세상이 나를 바꾸지 못하게 싸울 수 있는 힘도 사랑이다.

소설 속에는 어떤 일이 있다 해도, 자신의 두 딸 바다와 하늘이의 이름을 걸고 이 아이들을 지켜주자고(99p)다짐하는 서유진, 비록 깃발을 휘날리는 그런 영웅은 아니나, 어리고 힘없는 아이들이 개들에게 짓밟히는 걸 그냥 바라볼 성도로 형편없는 인간은(169p) 되고 싶지 않았던 강인호, 아이들이 홀로 서고 더불어 살기를 소망하는 최요한 목사, 자신의 딸처럼 아픈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는 연두 어머니가 있다. 이러한 인물들을 그려내며 정나미가 떨어지는 그 만큼 인간에 대한 경외 같은 것이 내 안에서 함께 자란다는(292p) 공지영과 같은 사람들이 표현하는 사랑이 세상을 조금씩 변화시킨다고 믿고 싶다. 그들도 똑같이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될 날이 오도록.


도가니 (100쇄 기념 특별개정판)

공지영 지음, 창비(2017)


태그:#도가니, #공지영, #광주인화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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