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말고사 채점 중이었다. 답안지를 읽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기호학의 '지표(index)' 개념을 묻는 문제였는데, 완전히 엉뚱한 답이 적혀 있었다. 강의 내용과도 관련 없고, 교재에도 나오지 않는 답변이었다.
그렇다고 학생 자신의 말로 풀어낸 독창적 답변도 아니었다. 어디서 본 사전적 정의를 기계적으로 외워 쓴 티가 역력했다. 난감했다. 출제자의 의도에서 완전히 벗어났으나, 그렇다고 전혀 말이 안 되는 답변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답안지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책의 내용을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주요 항목을 일정한 순서에 따라 배열해 놓은 목록."
기호학이 아닌 다른 과목(예컨대 문헌정보학 개론)이었다면 완벽한 답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표'의 의미('불과 연기, 또는 도로와 교통표지판처럼 지시대상과 직접적 관련을 맺고 있는 기호')를 묻는 시험문제에 '색인'의 정의를 답으로 쓴 학생에게 점수를 주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동료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자기 역시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다고 한다. '맥락을 벗어난 정답'은 학생 한두 명의 문제가 아니었다. 학생들이 교재나 강의록 대신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답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독서의 종말? 채점을 마무리할 무렵, 답안들 사이에서 또 다른 공통점을 발견했다. 학생들이 정보의 맥락을 잘 파악하지 못할 뿐 아니라, 두 개 이상의 개념을 결합시키기도 어려워한다는 사실이었다. 주장을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학생들의 답안은 아주 드물었다.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 니콜라스 카의 책에 소개된 사례가 실마리를 준다.
"'나는 책을 읽지 않는다.' 조 오셰이는 말한다. 그는 플로리다 주립대 학생회장 출신으로, 2008년 로즈 장학금 수상자이기도 하다. '인터넷 검색으로 필요한 정보만 재빨리 찾는다.' 철학을 전공한 오셰이는 더 이상 책을 읽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구글 책 검색으로 필요한 내용만 찾으면 될 것을, 뭐 하러 그 많은 책장을 넘겨가며 불필요한 시간을 보낸단 말인가." (니콜라스 카, <경박: 인터넷이 두뇌에 끼치는 영향>, 8쪽) 이 책에서 듀크 대학의 캐서린 헤일스 교수는 이렇게 탄식한다. "이제 학생들에게 책 한 권을 다 읽히는 건 불가능해졌다." 헤일스는 영문과 교수고, 그가 말하는 문제의 학생들은 문학도다. 문학 전공생들의 상황이 이렇다면, 사회과학을 가르치는 사람은 아예 기대를 말아야 하는 걸까?
좀 더 근본적인 질문에서 시작해 보자. 책 대신 인터넷으로 쉽고 간편하게 정보를 찾는 게 나쁜 일인가? 종이책이 아날로그 시대의 유물이라면, 디지털 시대에 걸맞게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얻는 것은 불가피할 뿐 아니라, 바람직하기까지 않을까?
어쩌면 이런 질문 자체가 부질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고, 이 흐름을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니 말이다. 니콜라스 카가 만난 '디지털 세대'의 이야기를 마저 들어보자.
"'책상에 앉아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인터넷으로 필요한 정보를 더 빨리 찾을 수 있는데 왜 시간을 허비하는가.' 그의 말에 따르면, '숙달된 정보 사냥꾼'이 되면, 책은 쓸모없는 것이 된다." 어떤 이들은 책이 "쓸모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사라질 거라고 주장한다. 종이에 인쇄된 책과 신문은 구시대의 유물로, 장차 전자책이나 태블로이드에 의해 대체된다는 것이다. 신문산업의 침체와 출판시장의 위축, 그리고 전자도서의 폭발적 성장은 이런 예언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인다. 정말 그럴까?
종이책은 사라질까 종이책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믿기 어려울지 모르나, 책은 더 발전하기 어려울 만큼 궁극적 형태에 도달한 매체이기 때문이다. 보존성, 사용과 휴대 편이성, 가격 등 모든 면에서 말이다. 책의 형태가 수세기 동안 거의 변함없이 유지되었다는 사실이 이 점을 말해준다.
종이책이 이상적 매체라는 사실은 전자책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잘 만들어진, 다시 말해 종이책과 효과적으로 경쟁하는 단말기와 소프트웨어일수록 아날로그책을 가장 가깝게 흉내 내는 경향을 보인다. 다시 보고 싶은 곳에 '책갈피'를 끼울 수 있고, 중요한 곳에 '밑줄'을 긋고, 필요한 곳에 '메모'를 하는 기능처럼 말이다. 애플의 '아이북스'는 화면을 누런 종이빛으로 바꿀 수 있을 뿐 아니라, 페이지를 앞뒤로 '넘길' 수 있게 만들었다. 반스앤노블의 '누크'는 전자책을 다른 사람에게 두 주간 '빌려주는' 기능도 갖추고 있다.
전자책은 인쇄도서의 장점을 모방할 뿐 아니라, 전자책만의 장점도 갖추고 있다. 예컨대 종이책에서는 불가능한 본문 검색이나 사전 기능이 있으며, 링크를 통해 추가정보도 얻을 수 있다. 책 한 권 무게의 단말기에 서재 분량의 책을 저장할 수 있고, 취향에 따라 글자꼴과 크기를 바꿀 수 있다. 원하면 책을 읽다 느낀 점을 다른 사람과 온라인상으로 공유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전자책은 종이책의 장점과 매력을 온전히 재현하지는 못한다. 흔히 디지털 매체의 특성으로 '상호작용성(interactivity)'과 '비선형성(nonlinearity)'을 꼽는다. 대상과 상호 소통하며, 이런 교류행위가 특정 방향으로 제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종이책이 오히려 전자책보다 비선형적이고 효율적인 경우가 많다. 종이책은 서두를 읽다가 결말을 잠깐 훔쳐볼 수도 있고, 두세 페이지를 한꺼번에 잡고 비교해볼 수도 있다. 책 여러 권을 동시에 펼쳐놓을 수도 있다. 전자책도 페이지를 건너뛰어 이동할 수 있으나, 종이책에 비해 느리고 번거롭다. 다른 페이지나 여러 책을 동시에 펼쳐놓는 것은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하다.
전자책과 '상호작용'하는 것은 더 어렵다. 종이책은 모퉁이를 접을 수도 있고, 여백에 나만의 글씨로 메모를 할 수도 있다. 전자책도 비슷한 역할을 하는 기능이 있지만, 메뉴를 선택하고, 키보드를 열고 타이핑을 하고, 저장을 하는 지루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더 큰 문제는 이 과정이 옷 위로 가려운 몸을 긁듯 답답하다는 것이다. 종이책이 주는 소유의 안정감이나 실체적 쾌감은 전자책의 장점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그렇다고 전자책이 실패한다는 말은 아니다. 전자책의 성장은 한동안 계속될 것이고, 이와 더불어 인쇄출판은 상당부분 위축될 것이다. 전자책은 더 가볍고, 더 읽기 쉽고, 더 많은 책을 저장하게 될 것이다. 하드웨어뿐 아니라 소프트웨어와 전자출판물의 종류도 크게 늘고 내용도 풍부해질 것이다. 그러나 두 시장의 변화폭은 생각보다 빨리 둔화될 것이며, 이후 종이책과 전자책은 상호 보완하며 공존하게 될 것이다.
누구나 '스마트'한 시대 종이책의 존속 가능성은 그렇다 치고, 책의 '효능'은 무엇일까? 독서를 통해 얻는 지식이 인터넷 검색으로 얻는 지식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인터넷이 책보다 짧은 시간에 더 많은 정보를 준다면 굳이 책을 고집할 이유가 있을까?
인터넷 사용자들이 책을 덜 읽는 것도 이런 생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인터넷 사용자들이 상대적으로 책을 멀리한다는 사실은 오래전부터 통계수치가 말해주고 있다. 주피터 리서치의 2006년 연구에 따르면, 인터넷 사용자들 가운데 37퍼센트가 독서시간이 줄었다. 웹서핑으로 인해 절대시간이 줄고 집중력도 떨어진 탓이기도 하지만, 인터넷 검색이 독서보다 효율적인 정보습득 행위라 믿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평생 본 것보다 많은 '만능지식인'을 최근 일 년 반 동안 트위터에서 만날 수 있었다. '모른다'는 말 이외에는 모르는 게 없는 이 만물박사들은 인터넷을 제2의 두뇌로, 검색을 제2의 사고로 간주하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인터넷은 언제 어디서든 꺼내볼 수 있는 모바일 기기, 즉 손바닥 위에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샬 맥루언은 기술을 '인간의 확장'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잊힌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눈을 위로 치뜨고 생각에 잠기는 것과, 어딘가 있을 정보를 찾기 위해 전화기를 꺼내 드는 것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이제 전화기만 있으면 누구든 똑똑해지는 시대다. 달리 '스마트폰'인가.
그러나 '꼭 필요한 정보'만으로 무장할 때 발생하는 문제가 있다. 이 지식은 넓되 무척 얇기 때문이다. 과거에 지식은 언제나 깊이와 함께 왔다. 필요한 정보만 골라낼 수 없는 종이책의 특성으로 인해, 독서는 상당한 시간투자와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특정 주제를 체계적이고 일관되게 발전시켜 가는 책 내용을 끝까지 따라가기 위해서는 깊은 사고와 인내가 필요하다.
지식이 존경 받아온 이유는 이렇게 어렵게 얻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터넷 시대의 '지식'은 훨씬 빨리, 쉽게, 많이 온다. 그리고 훨씬 더 얇게. 사람들은 검색으로 긁어온 단편적인 정보의 조각들을 '박식'으로 착각하곤 한다('얇다'는 뜻의 '박식'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금박처럼 얇은 정보의 조각들은 질문 몇 개로 쉽게 밑천을 드러낸다.
지식의 파편화, 시각의 '발칸화' 트위터에서 다수의 '팔로워'를 거느리며 지식을 자랑하는 이들이 타인들과 교류하는 방식을 관찰할 기회가 있었다. 이들은 합리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이들에게조차 놀랄 만큼 무례하게 대응하곤 했는데, 이들의 관심사는 소통보다는 '박식'의 자아 이미지를 유지하는 데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례함은 '꼭 필요한 만큼의' 얇은 지식을 갖춘 사람이 권위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상대를 불쾌하게 만들어 쫓아버림으로써 토론 과정에서 얕은 지식이 드러나는 낭패를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온라인상에서 흔히 목격하는 무례함 혹은 '까칠함'은 거만함이라기보다는 방어기제에 가깝다. 몸집이 작은 개일수록 독하게 짖는 법이다. 인터넷을 '소통의 도구'로 택한 사람으로서는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인터넷이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환호했다. 지리적 거리나 현실적 조건을 건너뛰어 동등한 조건에서 교류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터넷은 다른 견해를 교환하며 시각을 넓히는 교류의 장보다는, 시각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기존의 신념을 강화하는 '발칸화'의 온상으로 기능하고 있다. 내 생각과 다른 이들에게는 무시와 모욕(또는 '언팔'과 '블록')이 준비되어 있다.
토론의 공간으로서 인터넷이 갖는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처음 품었던 기대를 접어가고 있다.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다이애나 머츠 교수는 인터넷이 주는 다양한 선택의 기회가 오히려 사용자의 시야를 좁힐 수 있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견해를 반박하는 사람보다는 수긍하는 사람과 교류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선택 가능성이 갖는 또 다른 문제점도 있다. 사회가 공유하는 인식의 토대를 잃어버린다는 점이다. 각자 관심 있는 정보들을 추구하는 가운데, 공통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해결하려는 노력은 소홀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대의 지식 독서에 몰입하는 것은 기묘한 경험이다. 마치 꿈처럼 별개의 세계에 진입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극장에서 영화 속에 빠지는 경험 같기도 하다. 독서에 집중하면 주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도 인식하지 못한 채 이야기 세계 속에 매몰된다. 종이책을 읽는 것이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경험과 유사하다면, 전자책이나 인터넷은 수시로 전화가 울리고, 시도 때도 없이 음식을 날라 오는 극장에 앉아 있는 것과 같다.
스마트폰이나 아이패드처럼 '할 게 너무 많은 매체'로 책을 읽는 것은, 산만함 때문에 정보에 주목하기 어려운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독서는 정보 획득 이상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잘 조직화된 이야기 속에 자아를 인식할 수 없을 만큼 빠져드는 경험은 지식의 깊이와 이성적 사고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니콜라스 카가 <경박> 4장에서 잘 설명하고 있듯, 책의 역사는 계몽과 이성의 역사이기도 하다. 책은 처음에 띄어쓰기도 없이 손으로 쓰였으나, 서서히 문장, 문단, 장이라는 논리적 구조를 갖추는 방식으로 진화해 왔다. 책에 빠져드는 것은 이 완결된 구조 속에 사고를 투영하는 과정이다. 이 경험은 인터넷 검색이나 전자책 단말기가 흉내 내기 어려운 영역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 와서 인터넷을 포기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어떤 대안이 있을까? 답은 하나일 것 같다. 인터넷 검색과 트위터를 버리지 않더라도 지식의 깊이만은 최대한 지키는 것. 하지만 이것이 가능할까? 나는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믿는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정보'가 '지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과, 인터넷이 주는 '박식'의 달콤한 환상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다음 기사에서 가능한 대안을 모색해 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