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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놀러온 이웃 할머니, 엿새 머무른 여관 주인 할머니, 그 옆 식당 아주머니
 (왼쪽부터)놀러온 이웃 할머니, 엿새 머무른 여관 주인 할머니, 그 옆 식당 아주머니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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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포 마을에서 이제 막 떠날 채비를 마치고 편지를 씁니다. 호미곶을 보고 돌아나오다 웬일인지 마음이 동해 이곳에 머문 지 오늘(8일)로 엿새째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잠시 산책을 했는데 태풍 '말로'가 지나가고 부쩍 바람이 차가워졌습니다. 벌써 가을을 타는지 요며칠 마음이 영 싱숭생숭합니다.

그새 이곳 풍경, 사람들과 정이 듬뿍 들었습니다. 특히 여관 주인 할머니와 그 옆 식당 이모와는 방금 전 헤어지면서 몇 번이고 포옹을 하고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습니다. 든 자리보다 난 자리가 크다는데, 떠나기 전 어김없이 고봉밥 한가득 퍼서 속을 채워준 할머니가 내일은 홀로 앉아 쓸쓸해하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계단에 새겨진 일본인 이름...식민지 시대 애증의 역사 간직한 구룡포

구룡포는 100여 년 전 일본인들이 이주해오기 전까지 그저 이름없는 작은 어촌이었습니다. 그랬던 것이 1883년 일본 내에서 조선통어를 합법화하고 1908년 한일어업협정이 체결되면서 '코리아드림'에 부푼 일본 어민들이 앞다퉈 진출해 집성촌을 형성하고 경쟁적으로 어업활동을 벌였다 합니다.   

당시 하룻밤 잡은 물고기를 배에 실으면 배가 가라앉을 만큼 어자원이 풍부했다는 구룡포에서 일본 어민들은 나날이 번창했고, 마을은 그들을 주축으로 '일본화' 되어갔습니다. 그 가운데 원래의 구룡포 주민들은 가난을 면치 못해 일본인 어선에서 잡부로 일하거나 고향을 등지는 사례가 다반사였습니다. 

구룡포 공원 입구에서 보는 마을 전경
 구룡포 공원 입구에서 보는 마을 전경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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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당시 구룡포에 정착한 일본인들은 원 주민들을 핍박하기보다 조심스레 공생을 꾀했다고도 하고, 일부 구룡포 사람들은 몰라보게 활기를 띠게 된 항구 모습에 순응하며 나름의 삶을 이어갔다고도 합니다.

식민지 시대 이런 애증의 역사는 구룡포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그 대표적인 곳이 포구에서 한 블록 안쪽에 위치한 '일본인 가옥거리'인데, 걷다 보면 당시 일본인들이 거주한 주택이나 여관, 약국, 식당 건물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중 가장 인상적인 것 하나가 일본인 가옥거리 가운데 구룡포공원으로 이어지는 돌계단입니다. 이 계단 양옆 기둥에는 선명한 한자들이 보이는데, 그 안에는 숨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구룡포공원으로 가는 계단. 양쪽 돌기둥엔 일제시대 당시 이곳 살던 일본인의 이름을 새겨 넣었는데 해방 이후 그것을 돌려 세우고 시멘트로 덮은 뒤 지역 유지 이름을 다시 썼다고 한다.
 구룡포공원으로 가는 계단. 양쪽 돌기둥엔 일제시대 당시 이곳 살던 일본인의 이름을 새겨 넣었는데 해방 이후 그것을 돌려 세우고 시멘트로 덮은 뒤 지역 유지 이름을 다시 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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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포 공원 안에 있는 어느 일본인의 공덕비. 해방 이후 이곳 주민들이 시멘트를 덧발라 그 흔적을 지워버렸다.
 구룡포 공원 안에 있는 어느 일본인의 공덕비. 해방 이후 이곳 주민들이 시멘트를 덧발라 그 흔적을 지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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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인즉 일제시대 이곳에 살던 일본인들이 구룡포공원 안에 자국민의 공덕비를 세우고 계단 기둥엔 자신들의 이름을 새겼는데, 해방 이후 구룡포 주민들이 시멘트를 덧바르고 기둥을 돌려 지역 유지들의 이름을 다시 새긴 것입니다. 이런 작업을 통해 주민들은 지난날 그 오랜 울분과 수치스러움을 꺼이꺼이 토해냈던 거겠지요.

계단 끝에 이르러 시원스런 마을 전경에 한숨 돌리고 구룡포공원 안으로 들어가면 앞서 말한 어느 일본인의 공덕비가 보입니다. 1미터여 석대 위에 세로로 그보다 긴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이것 역시 분노의 시멘트 세례를 피하지 못했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주위에 이 비석의 역사적 의미를 알 수 있는 표지판이 없었던 것인데, 추한 과거일수록 후세에 되새길 바가 크니 '얼굴없는 비석'의 유래 정도 알려주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뒤돌아 나오는데 과거의 일 따위 알길 없는 천진난만한 꼬마들이 한창 신이 나서 놀고 있었습니다. 이 아이들이 전쟁의 고통을 다시금 경험할 필요는 없겠지요. 절대 그래서도 안 되지요. 저 역시 그저 짐작할 뿐인 엄청난 희생을 통해 오늘의 평화를 얻었으니, 이를 지키기 위해선 갑절의 노력과 의지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아픈 역사의 흔적이 남은 구룡포 공원에 그 사실을 알리 없는 어린 아이들이 신이 나서 놀고 있다.
 아픈 역사의 흔적이 남은 구룡포 공원에 그 사실을 알리 없는 어린 아이들이 신이 나서 놀고 있다.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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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마다 깃든 속사정 들으니 구룡포 마을에 동화된 듯

과거에서 돌아나와 이제 오늘의 구룡포입니다. 지난 엿새, 가족같이 푸근한 여관 주인 할머니 덕에 공짜밥도 여러 번 먹었습니다. 밥 사먹으러 나갈라 치면 찬이 없다 걱정하면서도 두 번 묻지 않고 얼른 밥을 퍼다 주셨습니다. 짧지 않은 여정에 넉살이 늘은지라 그럼 "잘 먹겠습니다!" 하고 앉아 넙죽 얻어 먹었습니다.

식사 중에 찾아오는 이웃에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한곳에 20~30년씩 서로 부대끼며 살다 보니 말그대로 '이웃사촌'들입니다. 매일 술에 절어 사는 아들 때문에 상심이 큰 할머니, 손주들 태우고 차 몰던 아들이 교통사고를 냈다는 할아버지, 몇 해 전에 남편을 잃은 아줌마… 사연은 각기 다른데, 피차 그 무게 만큼의 애환을 품고 있어 "그래그래, 안다안다" 서로를 다독입니다.

방에 있기 무료해지면 산책을 나섰습니다. 낯선 동네를 후즐근한 차림으로 어슬렁거리다 보면 새로운 시간 속으로 이동해 온 것도 같고, 그 자체가 마냥 각별한 낭만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렇게 여러날 마주치다 보면 처음엔 경계어린 눈빛으로 쳐다보던 사람들도 어느새 눈인사 건네며, 그중엔 각별히 친해지는 이들도 생깁니다.

신도여관 옆 신도식당 '꽁치추어탕'. 1인 한끼 5000원.
 신도여관 옆 신도식당 '꽁치추어탕'. 1인 한끼 5000원.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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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관 바로 왼편에 식당 이모가 그랬습니다. 첫날 도착해 술도 밥도 고프던 차에 주인 할머니 권유로 이곳에 갔는데 음식이 여간 정갈하고 맛난 게 아니었습니다. 주문한 음식은 이름이 낯선 '꽁치추어탕'이었는데, 꽁치를 뼈째 갈아서 육개장처럼 끓인 것입니다. 거기에
소라 조림, 도루묵 찌개, 이름이 기억 안 나는 무슨 해산물 무침까지… 흔히 먹어보지 못한 반찬이 입맛을 돋궈 술은 놔두고 밥을 두 그릇이나 먹었습니다.    

가족들 먹는 음식 그대로 그날그날 상에 올린다는 이모는 식사를 하는 동안 부담이 안 될 만큼 말동무를 해줬습니다. 그러다 반찬이 빈다 싶으면 더 줄까 물어보고, 식사가 끝날 즈음 과일을 깎아 상에 올렸습니다. 그러다 세 번째 보는 날, 젊은 나이에 남편 먼저 보내고 2년여 몸저 누워있다 '이럼 안 되지' 싶어 가게를 연 얘기를 해줬습니다. 몇몇 집 속사정을 알게 되니 저 역시 구룡포 마을에 동화돼 가는 듯했습니다.

구룡포 시장 안에 야채가게 할머니.
 구룡포 시장 안에 야채가게 할머니.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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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살 할매, 78살 아줌마, 62살 아가씨"... "그럼 저는 핏덩이네요?"

그제는 태풍 '말리' 영향으로 하늘이 거뭇해지는 중에 포구에 나갔다 인근 시장구경을 했습니다. 가구수가 그닥 많지도 않은데다, 날씨가 흐려 재래시장 안은 휑했습니다. 그 와중에 야채 하나 더 팔겠다고 바닥에 앉아있던 노부들이 싸게 주겠노라 구매를 권했습니다. 호박 속을 파고 있던 할머니는 사진 한장 찍자 하니 "이 못난 걸 뭘" 하면서도 웃어 줬습니다. 

시장길 끝까지 갔다 되돌아 나오면서 생오징어 한 마리를 샀습니다. 바닷가에선 돈 안 내고도 먹는 게 오징어인데, 한 마리 가격이 5000원이나 했습니다. 포항 오면서 삶은 오징어에 초고추장 곁들여 소주 한잔 해야지 했었는데 어렵사리 소원을 이뤘습니다. 어민들 말에 따르면 올해 부쩍 오징어가 줄어 아예 잡히질 않는 탓이었습니다. 

검정 비닐봉지에 오징어를 담아 숙소에 돌아오니 주인 할머니 외에도 이웃 할머니 세 분이 더 계셨습니다. 오징어를 달랑 한 마리 사온지라 나눠 먹자기도 뭣했습니다. 그래도 적으면 적은대로 한점씩 먹자 싶어 할머니께 오징어를 건넸더니 옆집에 반 말린 오징어를 냉큼 가져와 함께 데쳐 주셨습니다. 소주 드실 줄 아냐 하니 안다 해서 얼른 나가 소주도 두 병 사왔고요.

마침 비가 뚝뚝 떨어지는 길목을 내다보며 할머니들과 함께 먹는 데친 오징어와 소주가 어찌나 맛이 있었던지요. 손녀뻘 되는 저를 앉혀 놓고 주인 할머니가 오랫 이웃사촌들을 소개해 주셨는데 그 말이 또 재밌었습니다. "여긴 83살 할매, 여긴 78살 아줌마, 나는 68살, 이쪽은 62살 아가씨." "그럼 저는 핏덩이네요?" 자리에 웃음이 넘쳐 났습니다.

시장에서 산 오징어를 여관 할머니가 데쳐서 먹음직하게 잘라 주셨습니다.
 시장에서 산 오징어를 여관 할머니가 데쳐서 먹음직하게 잘라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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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 두 병 사서 숙소 가는 길. 동네 백수가 따로 없습니다.
 소주 두 병 사서 숙소 가는 길. 동네 백수가 따로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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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그림처럼 흘렀습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엿새 전 왜 이 마을 앞에서 문득 발걸음이 멈춰졌는지 이해가 됩니다. 짧은 나날이지만 영영 잊지 못할 인연의 힘이 원인이라 하겠습니다. 가령 마음이 움직이는대로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면 이 소중한 사람들을 어찌 만날 수 있었겠습니까. 너무 다 알고 가려말고 그저 길 따라 가보라 권하는 이유입니다.

이제 차를 타러 나가야겠습니다. 다시 만나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네이버와 다음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합니다.



태그:#국내여행, #공정여행, #가을편지, #구룡포, #태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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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니 삶은 정말 여행과 같네요. 신비롭고 멋진 고양이 친구와 세 계절에 걸쳐 여행을 하고 지금은 다시 일상에서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닷가 작은 집을 얻어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멋진 '영감'과 여행자들을 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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