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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대학수학능력시험을 하루 앞둔 11월 11일 오전 서울 종로구 배화여자고등학고 3학년 교실에서 수험생들이 담임교사로부터 수험표를 받고 있다.
 2009대학수학능력시험을 하루 앞둔 11월 11일 오전 서울 종로구 배화여자고등학고 3학년 교실에서 수험생들이 담임교사로부터 수험표를 받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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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고 끝에 악수라더니, 1년 가까운 시간 동안 우리나라 내로라하는 교육전문가들이 연구하고 지난 19일 발표한 '대입 선진화 방안'은 공교육 정상화와는 사뭇 동떨어진 내용을 담고 있다. '중장기 대입 선진화 연구회'라는 단체 이름이 무색하게도 100년은커녕 1~2년 앞도 내다보지 못한 근시안적인 미봉책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임기 내 입학사정관 전형제도를 정착시키겠다는 대통령의 '어명'에 머리를 조아린 걸까.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어렵사리 정착한 수시 전형 방식을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입학사정관 전형 방식으로 통합시킨다는 입학 전형 방식 개선안은 선무당 사람 잡는 격이 되지 않을까 적잖이 우려된다.

입학사정관 전형이 대입 제도 개선에 있어 바람직한 방향이라는 점과는 별개로, 우리의 교육 현실을 감안하면 정착시키는 데에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리라는 건 모두가 공감하는 바다. 고등학교의 준비 부족과 공정성 시비 등 끊임없이 잡음이 터져 나오는 현실이 이를 증명한다. 그런데도 당장 입학사정관 전형 방식에 수시 전형을 흡수 통합하겠다는 것은 대입 제도에 대한 불신은 물론, 중고등학교 학사 운영을 뒤흔드는 등, 자칫 게도 잃고 구럭도 잃는 결과를 낳게 될지도 모른다.

수능 두 번 본다고, 수험생 부담이 크게 줄어들까

2014학년도 수능시험 개편안을 들여다보면 더욱 한심하다. 주지하다시피 시험 응시 횟수를 2회로 늘린다는 것과, 국영수 과목의 경우 난이도가 다른 2단계 수준별 시험을 치른다는 것이 골자다. 덧붙여 기존의 사회, 과학 탐구 영역은 과목을 통합·축소하여 문과, 이과 계열별로 한 과목만 선택해 수능을 치르도록 했다. 이를 통해 학생들의 학습 부담을 완화시키고 사교육비를 경감시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학습 부담 완화와 사교육비 경감? 근래 들어 교육 관련 개혁안이 발표될 때마다 아무리 전가의 보도처럼 애용되는 홍보 문구라지만, 전혀 상반되는 결과가 뻔히 예상되는 상황에서 그것은 허울 좋은 말잔치를 넘어 기만에 가깝다.

단지 보름이라는 시간을 사이에 두고 '패자부활전' 치르듯 두 번 수능을 본다고 해서 그들 말처럼 수험생의 부담이 크게 줄어들까. 물론 한 번보다는 두 번이, 두 번보다는 세 번이 나을 것이다. 시험에 대한 부담을 줄이자면 여건만 허락된다면 '다다익선'인 까닭이다. 그러나 오로지 대학 간판이 인생 전체를 좌우하는 현실에서 '수능 대박'을 꿈꾸며 '인생은 어차피 한 방'이라고 여겨 온 그들에게 수능 횟수 한 번과 두 번은 무슨 차이일까.

외려 기회비용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긁어 부스럼'이 될 수도 있다. 이번 방안을 내놓은 내로라하는 교육전문가들에게 권한다. 수능을 한두 달 앞둔 즈음에 서점에 한 번 나가보라고. '1주일 수능 갈무리', '수능 1개월 완성', '족집게 수능' 따위의 제목을 붙인 채 수험생들을 유혹하는 문제집이 서점 전체를 뒤덮다시피 하는 현실을 그들은 모르는 모양이다.

수험생과 학부모 입장에서는 불안한 마음에 보든 안 보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구입하기 일쑤고, 그런 책값에 비하면 등록금이 '껌값'이 된 건 이미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사정이 이럴진대 첫 번째와 두 번째 수능 시험 사이 보름에 어떤 상황이 전개될지 예상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다.

문제는 과목 수가 아니라, 공부를 하는 '시간'

첫 번째 수능을 망친 아이들이 보름 동안 쏟게 될 시간과, 거기에 더해질 부담감, 그리고 종국에 그 기간 동안 향하게 될 사교육에 대한 의존은 더 큰 부작용을 낳을 것이다. 그렇다고 만족할 만한 성적을 거둔 아이들이라고 해서 그 기간을 학교에서 '태평하게' 보내게 될까. 경험상 단언컨대, 지금껏 보지 못했던 수능 영역별로 세분화된 단기 사교육 프로그램이 창궐할 게 불 보듯 뻔하다.

수험생들의 가채점 성적에 맞춰 학교 차원의 개인별 지도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에서 첫 번째 수능이 끝나면 학교는 사실상 휴업에 들어가게 되고, 결국 그들이 향할 곳은 어디일지 분명하지 않는가. 삼척동자도 다 예상하는 이런 결과를 두고 그들이 자랑하듯 꺼낸 '사교육비 경감'이라는 취지는 대체 어떤 기대를 품고 나온 말일까.

또 사회, 과학 탐구 영역을 인접 과목끼리 통합하고, 계열별로 한 과목만 응시하도록 '배려'하면 수험생들의 학습 부담이 완화될 수 있을까. 언뜻 보면 그럴싸해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지나가던 소도 웃을 어림없는 소리다. 중요한 건 부과되는 학습 시간과 내용의 총량이지 과목 수는 아니지 않나.

고등학교 재학 시절 난 문과생이었지만, 국영수와 인문사회 교과목에다 심지어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까지 다 배웠고 대입에서도 자연계 두 과목을 선택해 치러야 했다. 그런데, 대입 때는 물론 학교에서 배우는 과목조차 그때와 견줘 절반 가까이 줄어든 지금의 수험생들보다 학습 부담이 더 컸다고 말할 자신, 솔직히 없다. 매일 오후 10시에 교문을 나서면 곧장 학원과 독서실로 향하는 아이들, 요즘 수험생들의 '평범한' 일상이다.

그렇다고 배우는 교과목이 줄었으니 어깨를 짓눌렀던 무거운 책들이 줄어들어 책가방이 가벼워졌을까. 천만의 말씀. 과거 책가방 속에 들어있던 사회, 과학 교과목 책들이 꼭 그만큼, 아니 더 많은 국영수 참고서와 문제집으로 달라졌을 뿐이다. 과거 학교마다 운영되는 교과별 시간표가, 예컨대, '국, 생, 수, 사, 영, 지, 史' 이런 형태였다면 지금은 조금 과장하자면 '국, 수, 영, 기(기타 교과목), 국, 수, 영'으로 바뀐 것이다.

거기에다 학기 중 방과 후 수업과 방학 중 보충 수업조차도 대부분 국영수로 편성되는 현실에서 이번 수능 개편안은 국영수 편중 현상을 더욱 심화시킬 게 분명하다. 작년 말 교육과학기술부가 발표한 이른바 '미래형 교육과정'에 따라 학교장에게 주어진 '20% 교과목 편성 자율권'도 결국 국영수로 귀착될 것이 뻔한 현실에 '날개'를 달아준 꼴이다.

국영수 제외한 다른 과목은 사교육에 의존하란 건가

2009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실시된 11월 13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고등학교 정문에서 수험생 학부모가 자녀의 좋은 성적을 기원하며 기도를 하고 있다.
 2009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실시된 11월 13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고등학교 정문에서 수험생 학부모가 자녀의 좋은 성적을 기원하며 기도를 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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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다시피 대입에 얽매일 수밖에 없는 인문계 고등학교의 경우, 음악, 미술 교과는 물론, 기술가정 교과는 수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등 사실상 퇴출됐고, 역사와 지리 등 인문사회 교과와 물리, 화학 등 자연과학 교과 등 교양 과목도 수능에서 상당 부분 배제될 예정이어서 향후 존폐를 걱정해야 할 처지다.

수능이 국영수 중심으로 치러지게 되면 교육과학기술부가 제시하는 교육과정과는 별개로 학교에선 편법이 동원될 가능성이 크다. 이미 일제고사가 치러지고 점수 올리기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중학교는 물론, 초등학교에서조차 시험에 출제되는 과목을 중심으로 수업이 진행되고 각종 문제집이 교과서를 대체하게 됐다. 대입에서 수능의 영향력이 최소화하지 않으면 수능에 배제된 과목은 단언컨대 학교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수능 시험 개편안이 곧 실질적인 고등학교 교육과정 개정안인 까닭이다.

대학에선 바야흐로 학문적 '통섭'의 시대라며 통합적 사고력을 가진 인재를 뽑겠다고 호들갑 떨면서, 정작 수능은 음악도, 미술도, 사회도, 과학도, 심지어 우리 역사까지도 다 내팽개치고 오로지 국영수로만 치르겠다고 하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국영수만으로 통합적 사고력이 길러진다고 믿지 않는다면, 결국 국영수를 제외한 다른 교과목은 사교육에 의존하라는 뜻일까.

현장 목소리 없는 개편안, 학교 현장만 어수선하게 한다

끝으로 하나만 덧붙이자. 문과를 선택한 학생에게도 자연계열 과목은 필요하고, 또 중요하다. 불과 십수 년 전까지만 해도 대학마다 문리과(文理科) 대학이라고 해서 문학, 철학, 사학 등의 인문학과 수학, 물리학 등의 이학을 한 건물 안에서 배웠다. 지금이야 상반된 학문 분야로 여겨지게 됐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서로의 학문 수준을 높여주는 멀리할 수 없는 소중한 존재였다.

과학자나 의사가 되려는 학생이 한문을 공부하고,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려는 학생이 물리학과 지질학에 흥미를 가지면 안 되는 걸까. 법관을 꿈꾸는 학생에게 영어, 수학이 음악, 미술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어느 누가 감히 단정할 수 있을까.

요컨대, 이번 방안은 학생들의 학습 부담을 줄이지 못한 채 되레 사교육 시장에 새로운 블루오션을 마련해 줄 우려가 있으며, 나아가 고등학교 교육과정의 파행 운영을 부추길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렇다면 장고 끝에 악수가 나온 이유가 뭘까.  공교육 정상화를 목표로 했다지만, 정작 거기에는 3년 동안 학생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교사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중장기 대입 선진화 연구회의 구성원 면면이 자못 궁금하다.


태그:#대입 선진화 방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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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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