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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를 정복하기 전에는 시리아에 돌아가지 않겠어!"

아나스는 선언했다. 그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See You(나중에 보자)'나 'Bye(잘가)'와 같은 간단한 영어도 알아듣지 못해서 위축돼 있던 아랍 소년이었다.

시리아에 영어 열풍? 필요하면 절로 늘어

시리아에서 온 철인삼종경기 선수인 아나스 알하자르 군(14)
 시리아에서 온 철인삼종경기 선수인 아나스 알하자르 군(14)
ⓒ 박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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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부 열풍, 광풍이 한국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시리아에도 있다는 얘기냐고? 한국 아이들이 비싼 돈 들여 미국, 캐나다, 호주로 떠날 때 한국에 와서 영어를 배우는 중동 청소년도 있다는 소리를 하는 거냐고?

아니, 나는 지금 평창 알펜시아 리조트에서 진행되고 있는 2010 드림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눈이 없는 나라의 청소년들을 초대해 동계스포츠를 체험하게 해주는 2010 드림 프로그램. 전세계에서 모인 백여 명의 청소년들이 영어, 불어, 스페인어, 아랍어, 중국어, 그리스어 등등 온갖 언어로 떠들어대다 보니 동계스포츠 체험은 기본이고 외국어 공부는 덤이다.(관련 기사: 카리브해의 섬나라, '세인트루시아'를 아시나요?)

아나스 알하자르(14)는 시리아의 청소년 철인3종경기 선수다. 철인3종경기(트라이애슬론, triathlon)란 수영과 사이클, 달리기를 한꺼번에 하는 경기를 말한다.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스포츠라고 하여 철인3종경기라고 부른다.

대부분 눈이 없는 나라의 청소년들을 초청해 스키, 보드, 스케이트 등의 동계스포츠와 한국문화를 체험하게 해주는 드림 프로그램에는 주로 해당 국가의 청소년 운동선수들이 선발되어 참가한다(그러다보니 드림 프로그램을 통해 동계 스포츠를 처음 접한 선수들이 해당 스포츠로 종목을 전환해 국가대표로 활동하는 경우도 있다).

지난 21일 처음 한국 땅을 밟았을 때, 그는 음식도 맞지 않고 말도 안 통하는 어려움에 의기소침해 있었다. 하지만 스키 훈련이 시작되자, 그의 표정은 급속도로 밝아졌다.

시리아에는 최근 십여 년 간 내린 적이 없다는 눈이 소복한 슬로프 위에서 넘어지고 구르며 스키를 배우고, 투호와 제기차기 등 한국 문화를 체험하면서 아나스는 평범한 열네 살짜리 소년다운 모습이 됐다. 충치먹은 치아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는 모습에 기자는 그를 납치(?)라도 해서 남동생 삼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기 어려웠다.

"내가 오바마? 너는 콘돌리자 라이스"

스키 훈련 시작 전, 몸을 풀고 있는 드림프로그램 참가자들
 스키 훈련 시작 전, 몸을 풀고 있는 드림프로그램 참가자들
ⓒ 박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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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락 오바마'를 닮았다는 기자의 놀림에 그는 낄낄대더니 "너는 콘돌리자 라이스야"라며 반격하는 고품격 정치 개그를 구사한다. 처음에는 언어 장벽 때문에 과묵했지만 하루 종일 세계 각국의 언어, 특히 영어를 집중적으로 듣다 보니 저절로 '몰입교육'이 되었는지 기본적인 영어를 금세 깨쳤다. 이내 기자와 아나스는 서로 영어와 아랍어를 가르치고 배우는 사이가 됐다.

'앗살람 알라이쿰' = 안녕하세요(hello)
'옐라' = 가자(go)
'레디다' = 맛있다(delicious)
'델리쉬' =  눈(snow)
'우힙부카' = 사랑합니다(I love you)

영어를 할 줄 아는 아이였다면 한국어를 가르치련만, 한 번에 영어와 한국어를 동시에 주입하는 건 아이에게 폭력(!)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딱 한 마디만 가르쳤다.

'나는 훈남입니다'

문장의 뜻을 듣더니 박장대소한다. 하지만 부끄럽고 수줍어하기보다는 신이 난 모양새다.

남아공 소녀와 사랑에 빠져

좋아하는 소녀에게 같이 사진 찍자는 말도 못하는 아나스를 위해 기자가 자리를 주선했지만, 사진의 주인공 두 사람은 멀찍이 떨어져 있다.
 좋아하는 소녀에게 같이 사진 찍자는 말도 못하는 아나스를 위해 기자가 자리를 주선했지만, 사진의 주인공 두 사람은 멀찍이 떨어져 있다.
ⓒ 박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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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네 살 소년은 사랑에 빠져 있다. 남아공에서 온 열세 살 소녀 비키를 좋아한다. 소녀는 아랍어를 하지 못하고 소년은 영어를 잘 못하지만, 이 기세로라면 정말 순식간에 영어를 정복해서 소녀에게 사랑을 고백할 모양새다.

리조트 곳곳에서 그녀를 볼 때마다 먼발치서 바라만 보는 그가 답답해 기자가 등을 떠밀어 보지만, 그는 철인3종경기로 단련된 달리기 실력으로 도망쳐 버린다. 그래도 어제는 비키를 포함한 아이들 여럿이 모여 함께 피자를 먹었다면서, 신이 나 떠들어 댄다. 순수한 소년의 모습에 황순원의 <소나기>가 떠오른다. 정말이지 귀여워 죽겠다.

전세계 청소년들이 동계스포츠와 한국의 문화 뿐 아니라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친구들을 만들 수 있는 꿈 같은 행사인 '2010 드림프로그램'은 1월 21일부터 30일까지 강원도 평창 알펜시아 리조트에서 진행된다.

덧붙이는 글 | 기자는 2009년에 이어 2년째 드림프로그램에서 통역 자원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드림 프로그램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계속해서 소개할 예정입니다.



태그:#철인삼종경기, #시리아, #드림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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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없는 곳이라도 누군가 가면 길이 된다고 믿는 사람. 2011년 <청춘, 내일로>로 데뷔해 <교환학생 완전정복>, <다낭 홀리데이> 등을 몇 권의 여행서를 썼다. 2016년 탈-서울. 2021년 10월 아기 호두를 낳고 기르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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