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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출판업계의 이슈는 단연 '전자책'이다. 그런데 출판업계가 이런 변화에 대해 매우 혼란스러워 하고 있는 것 같다. 언제부턴가 유통업자들이 출판사를 제 집 드나들 듯하며 일정한 금액을 조건으로 '권리'를 넘기라고 회유하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는 출판사를 아예 제끼고 세상 물정 잘 모르는 저자와 직접 만나 거래를 트고 있다고 한다. 물론 '권리'에 대한 거래다.

 

여기서 말하는 유통사란, 주로 온라인 서점 유통사를 가리키고, 최근에는 SKT, KT와 같은 이동통신사들이 전자책 시장에 뛰어들면서 출판사들과의 만남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출판사들도 세상 물정 잘 모르기는 저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 몇몇 대기업보다는 중소기업, 심지어는 1인 기업이 절대 다수를 이루며 시장을 이끌어 가고 있기 때문에 정보력이나 협상력에서 대형 유통사를 상대하기가 버거운 게 사실이다. 더구나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호주머니가 얇아진 출판사들은 유통사가 제시하는 '현찰'에 솔깃해 하는 게 사실이다. 인지상정인데, 이를 두고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중견 이상급 되는 출판사들이 의기투합해 일종의 '대리중개업체'를 만들기도 했다. '(주)한국출판콘텐츠'(KPC)가 그 주인공인데, 김영사, 문학과지성사, 더난출판, 시공사, 창비 등 나름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출판사들이 주주로 참여하고 있다.

 

이 회사는 개별 출판사로부터 책의 '2차 저작권'을 위탁 받아 대형유통업체와 기타 콘텐츠 기업 등을 상대할 뿐만 아니라, POD(Publish on Demand)와 같이 개별 출판사가 하기 어려운 2차 출판사업을 펼치기 위해 만들어졌다. 즉 '전자책', '오디오북' 등을 만들어 유통사와 계약하는 일, 그리고 원작을 가공해 영화·드라마 등의 콘텐츠로 만들어질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 원작을 토대로 한 이러닝 사업 등을 맡게 되는 것이다.

 

대표성을 갖는다는 건 매우 유리한 조건

 

음악 사례와 비교해보면, 출판업계는 확실하게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먼저, KPC가 다수의 메이저 출판사의 참여로 상당한 대표성을 띠고 있다는 점은 무척 다행스럽다. 음악에서는 이런 역할을 하는 기업으로 과거 '만인에미디어'와 같은 대리중개업체 다수와 '음원제작자협회'와 같은 저작권신탁단체가 있었다. 그러나 음악업계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런 저작권 위탁 또는 신탁 사업에 메이저 음악제작사가 대부분 빠져 있었다는 거였다.

 

다들 주판알을 굴려봐서 내린 결론이었겠지만,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음악업계는 대부분 유통사, 특히 이동통신사에 심하게 휘둘렸다. 구글은 미국 출판사협회와 작가협회와 수익(판매수익+광고수익)의 60%를 권리자들에게 내놓는 것으로 협상했는데, 우리나라 음악 권리자들은 이통사로부터 콘텐츠요금의 40%를 받아내는 데 만족해야 했다. 게다가 소비자가 음원을 다운로드 받기 위해 지불한 '데이터요금'은 분배 대상에서 아예 제외됐다.

 

이처럼 말도 안 되는 분배 조건을 음악 권리자들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음악업계를 대표해서 거대한 이통사와 협상할 주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통사들은 개별 음악기업과 만나 하나둘씩 계약을 성사시켜 나갔지만, 대리중개업체와 신탁단체들은 이미 성사된 계약을 뒤집을 만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결국 힘의 논리에 밀려 음악업계가 휘둘렸던 것이다.

 

따라서 출판업계의 대표성을 갖는 대리중개업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매우 다행스럽다. 물론 대표성 자체가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보장은 해줄 수 없겠지만, 최소한 대형 유통사의 힘에 맞서 전열을 정비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출판업계는 구글이 만들어 놓은 '6 대 4'의 수익분배 선례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이만큼의 조건만으로도 출판업계는 음악업계의 전철을 밟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음악시장 장악한 수직계열화 멀리해야

 

다음으로 '수직계열화'가 아직은 크게 진행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도 다행스럽다. 수직계열화란 기획, 창작, 제작, 유통에 이르는 모든 비즈니스 가치사슬이 한 회사 안에서 수직으로 이뤄지는 상황을 가리키는데, 음악업계에서는 2005년 SKT가 당시 최대 음반제작 및 유통사였던 YBM서울음반을 인수한 것이 효시였다.

 

콘텐츠 비즈니스에서 수직계열화가 갖는 폐해는 바로 시장구조를 '왜곡'한다는 사실이다. 콘텐츠 비즈니스에서 권리자는 아무리 작고 허약하더라도 '갑'의 지위를 갖고, 유통업자는 아무리 돈이 많고 덩치가 커도 '을'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을'이 '갑'을 집어삼켜버리면, 시장에서 합리적인 질서를 기대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독점적인 지위를 갖는 유통업자가 스스로 권리자가 되는 순간, 다른 권리자들이 설 자리가 크게 위협 받기 때문이다.

 

앞서 음악시장 사례에서 권리자들이 이통사로부터 콘텐츠 요금 수익의 40%밖에 받아내지 못한 이유도 이통사가 진행한 수직계열화와 무관하지 않다. 특히 이 수직계열화는 '권리자가 유통사에 종속'되는 그림이기 때문에 백이면 백 권리자가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좀 더 쉽게 설명하면 이렇다. SKT가 YBM서울음반을 인수했다는 것은 이마트가 농심라면을 인수했다는 것과 비슷하다. 이마트가 농심라면을 인수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이마트에서 과연 삼양라면과 오뚜기라면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최근들어 음악시장을 걱정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주로 '아이돌 일변도'와 '30초짜리 음악'을 거론한다. 이처럼 우리 음악시장이 층이 얇아진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30초 짜리 음악이 판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음악시장이 이렇게 망가진 것과 이통사가 주도했던 음악시장의 수직계열화와는 관련이 없다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들리는 이야기로는 출판시장에서도 유통사들이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야금야금 수직계열화를 꿈꾸고 있는 것 같다. 출판사 없이 저자를 직접 만나 담판을 짓는다든지, 영세한 출판사를 현금으로 회유한다든지 하는 일련의 권리확보 활동들은 권리자가 되고 싶어하는 유통사들의 욕망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출판업계가 음악업계의 실패를 답습하지 않으려면, 유통사가 주도하는 수직계열화를 경계해야 한다.

 

그런데, 전자책 담론에서 독자가 빠졌다

 

그러나 위 두 가지는 출판업계가 전자책 시장에 연착륙하기 위한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급변하는 외부 환경에 대응하기 위한 시스템은 갖추고 있지만, 아직까지 전자책 시장 전반에 대한 청사진은 뚜렷하게 나와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물론 여러가지 활동계획들은 많이 나와 있다. 그런데 이 계획들에 맹점이 하나 있다. 모든 언설들이 오로지 '출판사'와 '유통사'에 관해서만 이야기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둘 사이에 긴장관계를 어떻게 형성해야 하고, 또 이해관계를 어떻게 조정해야 할지에 관해서만 몰두하고 있다. 정작 시장의 주체인 '독자'에 관한 이야기가 송두리째 빠진 것이다.

 

혹자는 출판사와 유통사간 문제만 잘 해결되면 독자에게 행복한 환경이 만들어질 거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독자를 고려하지 않은 유통시장의 구조가 과연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까?

 

지금의 음악시장은 우여곡절은 많았지만, 어쨌든 권리자와 유통사업자가 합의를 본 것이다. 소리바다와 벅스, 그리고 웹하드 업체들을 둘러싼 저작권 공방도 많았고, 이통사의 전횡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많았지만, 어쨌든 지금의 음악시장은 '모두(권리자와 유통사)가 합의한 시장'이다. 그런데 과연 음악소비자들은 그 시장에서 행복한가.

 

애플 앱스토어에서 배워야

 

전자책의 태풍을 앞두고 있는 출판업계는 요즘 부쩍 '출판생태계'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다. 출판사들이 먹고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일념에서 나온 슬로건일 것이다. 그러나 출판을 중심에 둔 생태계는 매우 근시안적이고 또 협소할 수밖에 없다. '출판사가 먹고 살아야 한다'는 구체적인 당위가 너무 강하게 배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래 가지고는 유연한 전략과 아이디어를 짜낼 수가 없다. 무슨 생각이든, 무슨 행동이든 오로지 '출판사'부터 고려하고 넘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애플의 지혜를 본받을 필요가 있다. 애플은 '휴대폰 제조업체'다. 그런데 그들은 아이폰을 팔아먹기 위해 기계를 잘 만든 게 아니라(물론 기계도 잘 만들었다, 그러나 기계 자체만으로 봐서는 삼성이나 엘지보다 낫다고 보기는 어렵다), '앱스토어'를 만들었다. '휴대폰 생태계'가 아니라 '어플리케이션 생태계'를 만든 것이다.

 

그들은 먼저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을 독려했다. 개발자들이 개발하기 쉬운 환경부터 먼저 만들고, '7 대 3'이라는 혁신적인 수익분배 구조도 도입했다. 그 결과 개발자들은 미친듯이 기발한 어플리케이션을 만들어냈고, 거기에 꽂힌 소비자들이 아이폰을 사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작금의 전자책 담론의 무게중심은 '출판생태계'에서 '독서생태계'로 옮겨가야 한다. 소탐대실이라고, 유통사와의 줄다리기에 몰두하다가 독자를 도외시한 서비스모델을 내놓을 게 아니라, 전자책을 계기로 독서문화를 획기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독자 친화적'인 서비스 모델을 개발해야 한다.

 

아마존은 최근 '킨들을 사용하는 독자가 그렇지 않은 독자보다 책을 3.1배 더 많이 읽는다'는 통계를 내놓았다. 전자책의 보급이 독서문화를 획기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전자책이 도입됐다고 자동적으로 독서량이 늘어나는 것은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전자책을 통해 독자가 '편리하게' 책을 읽을 수 있어야만 독서량이 획기적으로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출판생태계'가 아니라 '독서생태계'다

 

만에 하나 유통사들이 자기 전자책 단말기에 대한 욕심을 과다하게 부려서, 특정한 콘텐츠를 배타적으로 독점하려 든다면? 권리자들이 유통사로부터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특정 단말기에만 읽혀질 수 있는 폐쇄적 DRM을 쓰도록 허락해준다면? 권리자들이 불법복제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전자책 제작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는다면?

 

만약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독자들은 전자책 단말기를 구입한 것을 금방 후회하게 될 것이다. 비싼 돈 주고 구입한 단말기로 내가 원하는 책을 내가 원하는 시점에 구매할 수 없다면, 그런 단말기가 과연 얼마나 오래갈 수 있겠는가?

 

그래서 결론은 '독서생태계'여야 한다. 저자든, 출판사든, 유통사든, 정부든 전자책 시장의 핵심은 "독자들이 전자책 덕분에 예전보다 훨씬 편리하게 책을 읽을 수 있게 됐다"는 것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모두가 대승적 차원에서 '독서생태계'를 만들어가는 데 매진해야 한다. 그래야만 전자책 시장의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필자의 블로그 '문화도 습지처럼'(http://timshel.kr)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출판생태계, #독서생태계, #킨들, #전자책, #앱스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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