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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당국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제재 결의에 반발해 '우라늄 농축 착수' 및 '플루토늄 전량 무기화'라는 초강수의 핵카드를 꺼내 들었다.

 

북한은 13일 외무성 성명을 통해 "유엔 안보리 1874호를 규탄 배격한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북한은 아울러 "미국과 추종세력이 봉쇄를 시도하는 경우 전쟁행위로 간주하고 단호히 군사적으로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이같은 반발은 유엔 안보리가 12일 오후(현지시간) 전체회의를 열어 북한의 2차 핵실험을 징계하기 위한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한 지 15시간 만에 나온 것이다. 이로써 한반도에 '제3차 북핵 위기'가 현실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된다.

 

오마이뉴스, 4월에 '제3차 북핵위기' 전개 가능성 경고

 

<오마이뉴스>는 지난 4월 20일자 데스크칼럼(MB, 남북관계에 도움 안 된 YS 전철 밟을까...'PSI 전면참여'는 '제3차 북핵 위기' 초청장)에서 북한의 장거리로켓 발사와 유엔 안보리 의장 성명을 계기로 조성된 한반도의 긴장이 '제3차 북핵 위기'로 전개될 가능성을 경고했다.

 

당시 북한의 장거리로켓 발사에 이은 미국 주도의 유엔 안보리 의장 성명, 북한의 국제원자력기구(IAEA) 검증팀 추방에 이은 한국의 대량파괴무기 확산방지구상(PSI) 전면참여 발표 등으로 "한반도에 이른바 '제3차 북핵 위기'라는 먹구름이 감돈다"면서 '제3차 북핵 위기' 가능성을 처음으로 언급했다.

 

오마이뉴스는 특히 제3차 북핵 위기를 94년과 2002년의 1, 2차 북핵 위기 상황과 비교해 "이번 상황은 더 선제적이고 복합적"이라며 "북한은 제1, 2차 북핵 위기의 발단이 된 '영변(플루토늄)+경수로(우라늄 농축)'라는 두 개의 카드를 한꺼번에 보여주며 미국을 압박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런데 한국 및 국세사회의 PSI 전면참여와 이에 반발한 북한의 우라늄 농축 및 플루토늄 전량 무기화 선언으로 제3차 북핵 위기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현실화된 것이다. 특히 이번 위기는 후계구도 확립 및 2012년 '강성대국 완성'이라는 북한의 내부사정과도 맞물려 있어 1, 2차 북핵 위기 때보다 선제적이고 복합적이다.

 

정창현 "2012년 '강성대국 실현' 새판 짜기 위해 제3차 북핵위기 조성"

 

이같은 제3차 북핵 위기에 대한 진단은 최근 학자들 사이에서도 제기돼 관심을 끈다. 정창현 '민족21' 대표(국민대 겸임교수)는 지난 10일 북한은 최근 2차 핵실험을 통해 '핵 억제력 강화' 노선을 실증하면서 "94년의 1차 북핵 위기, 2002년의 2차 북핵 위기 때와는 질적으로 다른" '제3차 북핵 위기'를 조성했다고 주장했다.

 

정 대표는 이날 민족21이 주최한 6.15공동선언 9주년 기념토론회 발표문에서 "북한은 6자회담이 '대북 압박의 장'이 됐다고 판단, 2012년까지 '강성대국 실현'이라는 새 판을 짜기 위해 이같은 3차 북핵 위기를 조성하고 있다"면서 "1, 2차 북핵 위기는 미국이 북한의 핵개발 의혹을 제기하면서 불거졌지만 이번 3차 북핵 위기는 북한이 핵 자위력 강화를 주도하는 데서 비롯됐다"고 설명했다.

 

정 대표는 이어 "북한이 3차 북핵 위기를 조성함으로써 북핵 문제는 2007년 북핵 '2.13 합의' 이전 상황으로, 남북관계는 2000년 6.15공동선언 이전 상황으로 되돌아 갔다"며 "북한이 영변 핵시설에서 재처리 작업을 시작한 순간 '2.13 합의'는 사실상 무용지물이 됐다"고 강조했다.

 

문제는 사태가 이렇게 엄중함에도 이명박 정부는 출범 당시부터 '기다리는 것도 전략'이라며 방관자 역할에 머물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김대중 정부가 북미 갈등을 풀기 위한 적극적 조정자 역할을 수행했던 제2차 북핵 위기 전개과정과 대비된다.

 

북핵 위기 한국 역할... 94년 훼방자→2002년 조정자→2009년 방관자?

 

94년 1차 북핵 위기 당시 한국은 북미 협상의 훼방자였다. 반면에 클린턴 행정부의 유산(제네바 합의)을 해체하려는 부시 행정부 네오콘의 HEU 의혹 제기와 중유 공급 중단에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와 영변 핵시설 재가동으로 맞선 2차 북핵 위기에서 김대중 정부는 북미협상의 파국을 막기 위한 조정자로서 역할을 다했다. 이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북핵 위기
 발단/원인
 상징 언술
 해결
주체/한국 역할
1차(94년 봄)
영변 핵개발
서울 불바다
제네바합의
북미/훼방자
2차(02년 10월)
고농축우라늄
핵무기보다 더한 것 갖고있다
6자회담
북미/조정자
3차(09년 여름)
로켓-핵실험/PSI
서울은 군사분계선에서 50km
북미회담?
북미-남북한?

 

1, 2차 북핵 위기에서 한국 정부가 훼방자였건 조정자였건, 북핵 위기는 모두 북미 갈등의 산물이었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은 PSI 전면참여를 결정한 데 이어, 13일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과의 회견에서는 "6자회담을 그대로 갖고 가는 것은 시행착오를 되풀이하는 것"이라며 "한미정상회담에서 오바마 대통령에게 북한을 뺀 5자회담을 제안할 것"이라고 밝혔다.

 

PSI 전면참여는 북미 갈등의 산물인 핵 게임에 한국이 직접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 북한을 뺀 5자회담 제안은 북한과 국제사회에 '한국은 6자회담을 부정하거나 원하지 않는다'는 잘못된 신호를 전달할 수 있다.

 

물론 북한은 13일 외무성 성명에서도 "이번 사태의 본질은 북미 대결"이라며 6자회담에는 복귀할 뜻이 없음을 시사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앞장서 핵 게임에 참여하고 5자회담을 제안하는 것은 나중에 북미 갈등이 군사적 갈등으로 폭발했을 때 한국이 개입하거나 조정할 역할공간이 없음을 의미한다.

 

남북한은 지난 노태우 정부 시절에 "탈냉전의 새로운 시대를 맞아 서로 화해하고 교류협력하며 전쟁을 배격하고 평화를 만들어 나가자"는 데 합의한 '남북기본합의서'와 '부속합의서'를 채택했음에도 문민정부를 자처한 김영삼 정부로의 교체기에 팀스피리트훈련 재개를 결정함으로써 남북고위급회담이 파탄나고 남북관계의 '잃어버린 5년'이 시작된 바 있다.

 

그런 역사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이명박 정부가 북핵 위기의 갈등 주체가 북미에서 남북한으로 바뀌게 하는 어리석음을 자초해서는 안된다.


태그:#제3차 북핵위기, #PSI, #유엔 대북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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