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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20일부터 27일까지 7박8일간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에서 진행하는 '글로벌 비즈니스 교육프로그램 - 중국연수'에 다녀왔습니다. 연수에는 30여명의 문화예술인과 문화산업업체 임직원 등이 참여했습니다. 중국 산둥성과 상하이시에서 보고 듣고 느낀 중국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일정에 따라 몇 차례에 나눠 연재합니다. - 기자 주

옌타이산 꼭대기엔 외적의 침입을 알리기 위한 봉화대가 설치돼 있었다.
 옌타이산 꼭대기엔 외적의 침입을 알리기 위한 봉화대가 설치돼 있었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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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대 밑에 들어선 제국주의 영사관들

중국연수 둘째 날의 첫 행선지는 옌타이산(烟台山)이었다. 높이가 해발 45m로 산이라기보다는 언덕에 가깝다. 그러나 정상에선 주변 해안이 훤히 내려다보이기에 명나라 때 외적의 침입을 알리기 위한 봉화대가 설치돼 있던 곳이다. 낮에는 늑대 똥을 태워 연기를 피워올려 '낭연대(狼煙臺)'라 불렸고 '옌타이'란 지명도 그로부터 나왔다. 지금은 봉화대가 있던 곳에 등대가 서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봉화대로는 제국주의의 침략을 막을 수 없었다. 산둥성 북동부의 해안도시 옌타이는 1858년 톈진조약(天津條約)으로 개항됐다. 이후 영국을 비롯해 미국, 독일, 일본, 프랑스, 러시아 등 제국주의 열강들이 앞 다퉈 옌타이산에 영사관을 지었다. 모두 18채의 영사관이 옌타이산을 뒤덮었다.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세운 봉화대 아래에 제국주의세력의 침략 기지들이 잔뜩 들어서 있는 역사의 아이러니라니….

예전 덴마크영사관 앞 마당 벤치에서 한 중년 여성이 잡지를 읽고 있다. 자기 집 뜨락에 나와 있는 듯 편안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예전 덴마크영사관 앞 마당 벤치에서 한 중년 여성이 잡지를 읽고 있다. 자기 집 뜨락에 나와 있는 듯 편안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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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그 덕(?)에 나라마다 독특한 양식의 건물들과 수풀의 조경이 조화를 이뤄 이국적이면서도 꽤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했다. 중국 정부에서는 이곳 건축물들을 손질해 '근대건축군(近代建築群)'이란 이름을 붙여 옌타이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개발했다. 치욕스런 과거의 유산을 오히려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중국인의 발상법이 놀라웠다.

마침 일요일이어서 야외촬영을 하는 신혼 부부들의 모습이 많이 눈에 띄었다.
 마침 일요일이어서 야외촬영을 하는 신혼 부부들의 모습이 많이 눈에 띄었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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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은 마침 일요일이어서 많은 신랑·신부들이 예복과 웨딩드레스 차림으로 사진 촬영에 한창이었다. 가이드 얘기로는 "중국인은 8자를 제일 좋아하는데, 올해가 2008년이라 결혼하는 쌍이 많다"고 했다. 내려오는 길도 붉은 꽃으로 장식한 승용차와 하객들로 붐볐다. 고급 스포츠카가 연달아 세 대나 올라왔다. 일부이겠지만 개혁·개방이 선사한 중국인의 소비력이 만만치 않게 느껴졌다.

마오쩌둥의 '백화제방 추진출신'과 <패왕별희>

옌타이산의 한 건물은 내부를 경극을 안내하는 전시실로 꾸며 놓았다.
 옌타이산의 한 건물은 내부를 경극을 안내하는 전시실로 꾸며 놓았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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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건물은 내부를 중국 경극(京劇)을 안내하는 자료들로 꾸며놓았다. 밀랍 인형으로 공연 장면을 재현해놓은 방도 있고, 유명 배우들의 사진과 프로필로 벽면을 장식해놓은 방도 있었다. 건물 1층 중앙 벽엔 마오쩌둥(毛澤東)이 쓴 '백화제방 추진출신(百花齊放 推陳出新)'이란 액자가 걸려 있었다. '추진출신'이란 낡은 것을 들어내고 새것으로 바꾼다는 뜻이다.

경극 전시실 중앙벽엔 마오쩌둥이 쓴 '백화제방 추진출신'이란 액자가 걸려 있었다.
 경극 전시실 중앙벽엔 마오쩌둥이 쓴 '백화제방 추진출신'이란 액자가 걸려 있었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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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이후 '백화제방 추진출신'의 기치에 따라 경극의 현대화를 추진했다. 경극에서 봉건적인 내용을 추방하고 인민의 생활을 반영하려고 했다. 무대 위 주인공들에게 노동자·농민의 이미지를 연기할 것을 주문했다. 그러나 경극의 독특한 양식 때문에 현대화는 쉽지 않았다. 1958년 대약진운동 때까지 현대화에 대해 반대론과 신중론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에 들어서며 상황은 바뀌었다. 특히 문화대혁명 격랑 속에서 장칭(江靑)이 문화계를 이끌며 전통 경극의 수많은 연로한 예인들이 탄압을 받았고, 심지어 무대를 영원히 떠나기도 했다. <지취위호산(智取威虎山)> <홍등기(紅燈記)> <사가빈(沙家浜)> 등 '혁명 현대 경극'이 모범극으로 추대되고 10년 동안 모든 전통 경극 작품은 공연이 금지됐다. 전통 경극이 힘겹게 무대로 돌아온 것은 1978년이었다.(경극 관련 내용은 쉬청베이가 지은 <경극> 참조, 대가 펴냄)

중국 근·현대사의 격변기에 경극이 겪어야 했던 비극적 운명은 장궈룽(長國榮)이 주연한 영화 <패왕별희>에도 잘 그려져 있다. 문혁의 광풍에 휘말려 헤어졌던 두 주인공이 10년 만에 다시 만나 마지막 공연과 함께 죽음을 맞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난다. <패왕별희>는 개봉 당시 중국 내에서 상영 금지됐다. 전통 경극은 10년 만에 복권됐지만, 문혁의 깊은 상처가 치유되는 데는 더 오랜 세월이 흘러야 할 듯싶다.

중국인들은 붉은 종이를 오린 그림과 글자를 창에 붙임으로써 장수와 화복 등을 빌었다.
 중국인들은 붉은 종이를 오린 그림과 글자를 창에 붙임으로써 장수와 화복 등을 빌었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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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류장 부근의 한 건물에서는 또 다른 중국의 전통 예술을 만날 수 있었다. 붉은 종이를 오려서 갖가지 형상을 만든 전지공예(剪紙工藝) 작품을 전시·판매하는 곳이었다. 작품 소재는 주로 수(壽)와 복(福) 등의 글자와 십장생과 십이지신, 불상, 화초, 미인들이었다. 나와 아내의 띠인 '호랑이'와 '용' 그림을 샀다. 역시 용 그림을 구입한 이희재 화백이 박재동 화백에게 한 마디 건넸다. "하여간 이걸 하고 있으면 세월은 잘 가겄소."

중국이 '차이나'로 불리는 까닭

버스는 이제 칭다오(靑島)로 출발했다. 잠시 틈을 내 가이드가 마이크를 잡고 농담 삼아 질문을 던졌다. 왜 중국을 '차이나'라고 부르는지 아는가? 모두 가이드 얼굴을 바라봤다.

"한국에 비해 중국의 크기가 엄청 커서 '차이나'고, 반면 작은 부분에선 아직 한국 수준에 못 미쳐 '차이나'라고 합니다."

중국인이 죽기 전에 다 못 해보는 세 가지가 있는데, 문자(한자)를 다 배우지 못하고, 음식을 다 맛보지 못하고, 지역을 다 돌아보지 못한다고도 얘기했다. 그리고는 "후진타오가 비행기를 타고 다녀도 죽기 전에 다 돌아볼 수 없다"고 덧붙였다.

산둥성 구릉지대에선 한국인들이 배 재배를 많이 하고 있다.
 산둥성 구릉지대에선 한국인들이 배 재배를 많이 하고 있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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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창 밖으로는 전날처럼 수수밭의 지평선이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 길가에서 배를 팔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가이드가 "산둥성 해안가 구릉지대에선 사과와 배 농사를 많이 짓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곳에 들어와 배 농사를 짓는 한국인들도 많다고 했다. 경작지는 보통 20~30만 평 규모이고, 넓을 경우엔 100만 평에 이른다고 한다. 수확한 배는 아직 국내 수입은 안 되고, 주로 중국 내수시장과 동남아 등에 판매하고 있다고 했다.

중국에서 우리 배를 만나다니, 기념으로 배를 사 한 입씩 베어 물었다. 시원하고 달콤했다. 한국에서 즐겨 먹던 배와 다름없는 맛이었다.

칭다오에서 만난 '부동산' 간판

버스는 계속 달려 오후 1시께 칭다오에 들어섰다. 베이징올림픽 요트 경기가 개최된 곳답게 톨게이트를 빠져 나오자마자 올림픽을 축하하는 대형 입간판들이 눈에 띄었다. 올림픽을 맞아 도시를 정비한 까닭인지 거리는 깨끗했다.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 8만 명. '인천시 청도구'라 불리는 곳답게 한글로 된 간판들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한국총영사관 건물도 지나쳤다. 해안가엔 고급 주택들이 줄지어 들어서 있고, 또 곳곳에서 건설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부동산'이라고 한글로 쓴 간판이 도드라져 보였다.

조선족 가이드는 "이곳에선 공무원 급여에 비해 삼성프린터 직원이 3배, 관광 가이드는 7배"라면서 "몇 년 전 한국 돈으로 5천만원에 아파트를 구입했는데 현재 1억2천만 원으로 올랐다"고 자랑했다. 중국에서 불고 있다는 부동산 투기열풍도 빈말은 아닌 듯했다.

칭다오 시내의 '하이얼로'. 가로등마다 '一?世界 一?家 Haier'란 배너가 달려 있다.
 칭다오 시내의 '하이얼로'. 가로등마다 '一?世界 一?家 Haier'란 배너가 달려 있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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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단처럼 보이는 곳이 나타났다. 중국 종합가전업체인 하이얼(Haier․海尔) 기업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었다. 왕복 8차선 도로의 표지판에 '하이얼로(Hairer路)'라고 적혀 있었다. 대로 양편으로 줄지어 서 있는 가로등마다엔 '하나의 세계, 하나의 집(一个世界 一个家) Haier'이란 배너가 달려 있었다.

하이얼은 중국 민영기업 가운데 매출액 1위의 기업이다. 또한 160여개 나라에 제품을 수출하고 있는 세계 3위의 가전업체이기도 하다. 세계시장에서 하이얼을 중국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키워낸 장루이민(張瑞敏) 회장은 '중화민족의 영웅'으로 대접받고 있다. 세계적인 기업가가 '영웅'으로 칭송되는 것이 노동자·농민의 나라, 중국의 오늘의 모습이다.

중국인의 왕성한 소화력

점심을 마친 일행을 태우고 버스는 샤오위산(小魚山) 공원을 올랐다. 청나라 말기까지 칭다오는 작은 어촌마을이었다. '위산(魚山)'이란 이름도 어민들이 그물과 생선을 말리던 언덕이란 뜻에서 붙여졌다. 하지만 의화단(義和團)의 모태가 됐던 대도회(大刀會)에서 1897년 독일 선교사 2명을 살해함으로써 칭다오는 다른 운명을 걷게 됐다. 독일 군대가 출병하고, 결국 1898년 독일에 의해 강제 개항됐다. 독일은 칭다오를 "동양에서 가장 모범적인 도시로 만들겠다"며 개발하기 시작했다.

박재동 화백이 샤오위샨 누각에서 칭다오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다.
 박재동 화백이 샤오위샨 누각에서 칭다오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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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오위산 정상에 있는 누각에 올랐을 때 날씨는 맑았고 햇살은 다소 따가웠다. 초록의 수풀 사이로 붉은 지붕과 흰 벽면의 독일식 건물들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풍광이 산 아래로 펼쳐졌다. 왼편으로 내려다보이는 해변 백사장에선 늦은 9월임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해수욕을 즐기고 있었다. 마치 지중해 연안의 한 휴양도시에 온 것 같았다. 오전 옌타이산에서 올랐을 때처럼 활용 가치가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자기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중국인의 왕성한 소화력이 다시금 무서워졌다.

샤오위산을 내려온 뒤 숙소인 하이티안(海天) 호텔에 짐을 풀었다. 호텔에선 전 세계 화상(華商)들이 모여 화상의 미래를 논의하는 컨퍼런스를 열고 있었다. 자신들에게 수모를 안겨줬던 세계를 향한 중국의 반격은 이미 시작됐다. 그럼 그 곁의 한상(韓商)과 한국기업의 미래는?

중국정부는 '녹색고양이'를 원한다

장소를 옮겨 칭다오지역 KOTRA 관계자들을 만났다. 칭다오대학 국제상학원 서영휘 교수가 '칭다오 지역 투자 한국기업의 경영 실태와 향후 과제'에 대해 발표했다.

지난해 3월 기준으로 중국에 들어와 있는 한국기업의 숫자는 1만5000여 개. 그 가운데 약 3500여 개의 기업이 칭다오에 진출해 있다. 한때 '차이나드림'을 꿈꾸며 많은 기업들이 진출했으나 지금 경영 상황은, 한 마디로 "어렵다". 50%가량의 기업이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다.

칭다오 소피아호텔에서 열린 칭다오 KOTRA 관계자와의 간담회. 현재 칭다오에 진출한 한국기업 가운데 50%가량이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다.
 칭다오 소피아호텔에서 열린 칭다오 KOTRA 관계자와의 간담회. 현재 칭다오에 진출한 한국기업 가운데 50%가량이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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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통계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칭다오 진출 건수는 2000년 560건에서 2005년 1691건까지 치솟았다가 2006년부터 급감해 2007년엔 609건으로 줄었다. 반면 철수기업 숫자는 해마다 늘고 있다. 특히 '무단철수'하고 있는 기업 숫자만도 2003년 21곳에서 2007년 87곳으로 늘어나 한국기업에 대한 여론을 악화시키고 있다.

왜 그럴까. 그 원인 가운데 하나는 '값싼 노동력'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인건비가 급상승했다. 칭다오의 경우 최저임금이 2001년 월 370위안에서 2008년 760위안으로 105% 증가했다. 게다가 2008년 '5대 보험' 가입 의무화 등 신노동법이 시행되면서 지난해에 비해서도 인건비가 20~30% 상승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 바탕에는 '양적 성장'에서 '질적 성장'으로 경제 성장 모델을 전환한 중국 정부의 정책 방향이 깔려 있다. 이전과 달리 외국인 투자도 선별적으로 허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연수를 앞두고 열렸던 사전 워크숍에서 KOTRA 이평복 중국팀 팀장은 "예전엔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 가리지 않았으나 지금은 기술집약적이고 친환경적인 녹색고양이를 원하고 있다"고 했다.

한국기업들의 경영 사정이야 나빠지겠지만, 그 같은 중국 정부의 정책 방향은 올바른 것이 아닐까. 그에 비해 860만 명의 비정규직이 존재하는 우리는? 과연 누가 장기적으로 승리할까.

칭다오에서 어려움 겪고 있는 '대장금'들

칭다오 시내의 한 한국식당. 입구에 <대장금>의 이영애 사진 입간판을 세워놓았다.
 칭다오 시내의 한 한국식당. 입구에 <대장금>의 이영애 사진 입간판을 세워놓았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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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담회를 끝낸 뒤 같은 건물에 들어 있는 한국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이름은 '잔칫집'이었다. 한자로는 '盞綵家(잔채가)'라고 적었다. 식당 입구에 <대장금>의 이영애 입간판을 세워놓았다. 중국에 온 지 이틀 밖에 안 됐는데, 한국음식을 보니 반가웠다.

칭다오 내 한국식당은 2007년 기준으로 약 1500여 개로 추정되고 있다. 한국기업처럼 한국식당 역시 어렵기는 마찬가지라고 한다. 최근 한 요식업 잡지는 '한국식당 경영악화 심각, 물건너 간 꿈 차이나 드림'이란 제목으로 칭다오 한국식당에 관한 특집기사를 싣기도 했다.

하지만 이곳 식당은 겉보기엔 장사가 잘 되고 있는 듯했다. 3년 전 이곳에 문을 열었다는 주인은 "처음엔 한국인 손님들이 많았으나 지금은 오히려 중국인들이 더 많다"고 말했다. 옆 자리를 건너보니 어린 딸과 함께 온 젊은 중국인 부부가 고기에 상추쌈을 싸 된장찌개와 함께 맛있게 먹고 있었다.

중국 맥주시장,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삼국시대로

저녁을 먹고는 일부 일행과 함께 마침 칭다오에서 열리고 있는 국제맥주축제 현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칭다오는 독일 조차지였던 까닭에 일찍부터 맥주 산업이 발달했다. 가까운 곳에 광천수로 유명한 라오산(嶗山)이 있는 것도 이점이 됐다. 우리에게도 칭다오맥주는 중국을 대표하는 맥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작 중국 내에선 지금 맥주 전쟁 중이다. 저녁이 아닌 아침이나 점심 식탁에도 차와 함께 맥주가 올라오는 곳이 중국이다. 지역정부의 보호 아래 각 지방마다 생산되고 있는 중국 맥주는 한때 약 1600여 개에 이르렀다. 2000년대 초반 춘추전국시대를 지나 지금은 인수합병이란 합종연횡을 거쳐 삼국시대로 재편되고 있다.

칭다오 맥주축제 현장에서 중국 소수민족 상인들이 춤을 추며 꼬치 안주를 판매하고 있다.
 칭다오 맥주축제 현장에서 중국 소수민족 상인들이 춤을 추며 꼬치 안주를 판매하고 있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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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강'은 칭다오 맥주와 베이징의 옌징(燕京) 맥주, 그리고 선양(瀋陽)에서 출발한 화룬(華潤)기업의 쉬에화(雪花) 맥주. 중국 내 시장점유율은 쉬에화가 칭다오를 앞서고 있다. 칭다오와 옌징 맥주는 '1품목 1기업' 원칙에서 볼 때 예외적으로 베이징올림픽의 공식 협찬사로 함께 선정돼 치열한 '장외 올림픽'을 벌이기도 했다.

칭다오 국제맥주축제는 독일의 옥토버페스트를 모방해 1991년부터 매년 열리고 있다. 올해로 18회 째. 연 참가인원만 50만 명에 이를 정도로 큰 축제다. 원래 8월에 열렸으나 올해는 베이징올림픽 때문에 9월로 연기돼 운 좋게 우리 일행의 칭다오 방문시기와 겹쳤다. 올해 주제로 '올림픽 성공을 축하하며 세계와 함께 건배'를 내걸었다.

사회주의 중국 맞어?

칭다오 맥주축제 현장에서 조선족 인절미를 팔고 있는 포장마차. 역시 <대장금>의 이영애 사진이 붙어 있다.
 칭다오 맥주축제 현장에서 조선족 인절미를 팔고 있는 포장마차. 역시 <대장금>의 이영애 사진이 붙어 있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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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날은 어두워졌다. 축제장 입구는 인파로 붐볐다. 노점상들이 가면과 형광도깨비뿔 등을 판매하고 있었다. 축제장에 들어서자 왼편으로 하이네켄, 칼스버그, 크롬바커, 호프브라우 등 세계적인 맥주 브랜드의 대형 천막촌이 이어졌다. 모두 살펴보지 않아 모르겠으나 한국맥주 브랜드는 찾지 못했다.

맥주 매장들은 천막으로 꾸민 대형 홀에서 맥주를 판매했다. 홀 앞에는 무대를 마련해 그림을 경매하거나, 맥주 마시기 시합 등을 벌이고 있었다. 마이클 잭슨 복장을 한 채 '데인저러스'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모습도 보였다. 천막 앞에 고급 승용차를 내놓은 곳도 있었는데, 아마도 경품인 듯했다.

맥주 광장보다는 그 주변에 늘어선 안주거리를 판매하는 곳이 더 볼만 했다. 중국 소수민족의 음식들이 많았다. 한국식 떡을 판매하는 곳도 꽤 많았다. 소수민족 전통 복장이나 희한한 분장을 하고 춤을 추며 호객하고 있었다. 한 곳에서 양고기 꼬치구이를 샀다. 돈을 건네자 돈을 찢으려고 해 깜짝 놀랐다. 일행 가운데 한 명이 "가짜 돈인지 확인하려고 그런다"고 귀띔했다.

술을 마시는 사람들의 풍경도 다양했다. 가족끼리, 친구끼리, 연인끼리 각자 맥주를 마시며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테이블 위로 올라가 춤을 추는 꼬마도 있고, 전통 악기를 연주하는 중년 남자도 있었다. 한 젊은 커플은 태연하게 입맞춤을 했다. 대체 이곳이 사회주의국가 중국이 맞나 싶었다.

칭다오 맥주축제에서 친구끼리, 연인끼리, 가족끼리 맥주와 축제를 즐기고 있다.
 칭다오 맥주축제에서 친구끼리, 연인끼리, 가족끼리 맥주와 축제를 즐기고 있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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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행도 한 곳에 자리를 잡고 맥주를 마셨다. 당연히 생리현상이 찾아왔다. 'TOILET'라고 쓰인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가건물로 들어섰다. 그런데 '그곳'에 문이 없다! 두 남자가 태연하게 '큰일'을 보고 있었다. 세계인과의 건배를 제안하며 뒤처리는 중국식으로? 중국인들의 그런 배짱의 정체가 궁금했다.

개혁·개방의 그림자를 살짝 엿보다

밤 10시 폐장시간이 지나서야 홀로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왔다. 한 젊은 여성이 호텔 앞에서 서성이다가 작은 스티커를 건넨다. 야한 옷차림의 여성 사진과 함께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 한 중년의 서양인이 내 손에 들린 스티커를 보고 자기가 받은 스티커도 보여주며 "same(같다)"이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expensive(비싸다)"라고 친절히 충고까지 해준다.

호텔 로비에는 '칭다오의 밤'이란 제목의 일본어로 된 팸플릿이 놓여 있었다. 유흥주점을 안내하고 있는 광고 팸플릿이었다. 각 업소마다 선정적인 여성 사진과 함께 '안심 안전 명랑회계(安心 安全 明朗會計)'란 문구를 적어놓았다. 낮에는 중국 개혁·개방의 빛을, 그리고 밤에는 살짝이나마 그 그림자를 엿본 느낌이었다. 중국연수 둘째 날이었다.


태그:#옌타이, #칭다오, #옌타이산, #샤오위샨, #청도맥주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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